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모토리 Jan 31. 2019

전설이 된 복수극, 주신구라 이야기 <47인의 자객>

47 Ronin (47인의 자객. 1994) 이치카와 곤 감독

47 Ronin (47인의 자객. 1994) 감독 : 이치카와 곤 / 출연 : 다카쿠라 켄, 나카이 키이치, 미야자와 리에, 이시자카 코지


이 영화는 에도막부시대 쇼군에 의해 할복을 당한 영주의 가신 47명이 2년의 준비기간을 거쳐 마침내 복수극을 완성한다는 주신구라에 관한 이야기다. 근세 일본 사회를 뒤흔들었던 이 역사적 사건을 아코의 낭인들이 일으켰다고 해서 <아코 사건>이라고도 하며, 그 외에 겐로쿠 시대에 일어났다고 해서 <겐토쿠 사건> 혹은 <주신구라 사건>이라고도 부른다. 


이 스토리는 1701년 천황의 사절로 에도에 온 아코번 영주 아사노 나가노리로부터 시작된다.  그가 치욕을 당했다는 이유로 쇼군 앞에서 칼을 꺼내 기라 요시나카 얼굴에 상처를 입히자 쇼군은 불경죄를 물어 할복을 명한다. 


당시는 에도 막부의 5대 쇼군인 쓰나요시의 시대였다. 쓰나요시는 성군이 되고 싶은 욕심에 정치적 무리수를 많이 둔 쇼군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개를 지나치게 좋아해서 개를 포함한 동물을 죽이지도 먹지도 못하게 하는 악법을 선포해 별명이 ‘개쇼군’으로 불린다. 


에도막부 5대 쇼군 쓰나요시 - 에도막부의 가장 번성했던 시기를 구가했다.


주군 아사노가 할복하자 가신들은 낭인(로닌)이 될 처지에 놓였는데 주군을 죽게 만든 기라에게 복수를 결심하고 2년의 준비를 거쳐 1702년 12월 14일 밤, 원수 기라의 집을 습격해 기어이 그의 목을 따내는 데 성공한다.


이들의 복수를 보고 많은 이들이 열광하자 쇼군은 47명 모두에게 할복을 명한다. 그렇게 47명의 자객은 스스로 세상을 떠나며 일본 전역의 사무라이 전설을 만들게 된다. 주신구라 스토리의 끝이다.



주신구라는 이후 일본에서 열풍을 불러일으키며 각종 민속극과 가부키의 단골 주제로 등장한다. 물론 이러한 주군을 향한 맹목적 충성심은 목숨을 버리며 불속으로 뛰어드는 천황표 카미가제 불나방을 낳는 제국주의의 변질된 애국적 모티브로 작동하기도 했으며. 일제시대 우리나라에서는 황국신민을 양성하는 도구로도 활용되었다. 그러니 영화를 보고 재밌네 하며 좋아할 일이 전혀 아닌 것이다.



하지만 이런 영화를 일본 사람이 만든다고 해서 우리가 뭐라 할 수는 없다. 그들에게 주신구라는 잊혀지지 않는 역사적 팩트이자 사무라이 정신의 빛나는 결정체니까.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러한 주신구라가 천황에 대한 충성심을 높이고, 동남아 공영권을 정당화하는 목적으로 우익스러운 일본인들이 본받고 따라야 했던 제국주의의 상징이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부록_사무라이란 무엇인가? (표준전과식 정리 --;)

일본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사무라이다. 사무라이는 12세기부터 1868년 메이지 유신까지 일본을 지배한 무사계급을 뜻한다. 오래전 귀족을 보호하던 역할만 담당하던 무사계급 사무라이가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직접 권력을 잡고 통치한 가마쿠라 막부(1192~1333), 무로마치 막부(1338~1573)를 거치며 권력 전면에 등장했다.


사무라이는 이후 스스로 무사도를 정립, 자신의 목숨보다 의리, 명예, 충성 등의 가치를 더 중요하게 여기며 전투에서 패하거나 치욕스러운 일을 당했을 때 할복으로 명예를 지키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족보 1도 없는 하급 사무라이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하고 그 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막부를 열며 일본의 평화를 지킨 것도 사무라이 정신이었다. 하지만 에도막부의 후기 쇼군들은 이런 사무라이들의 무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활동을 제약시켜 사실상 일반인처럼 무력하게 만들어 버렸는데 이때 사무라이들은 정치적, 경제적 지위가 최고로 낮아졌다.


이후 19세기 중반 미국의 개항 요구를 기점으로 일본 전역에서 에도막부에 불만을 가져오던 하급 사무라이들이 천황을 전면에 내세우며 막부에 반기를 들었다. 이때 등장한 하급 사무라이가 바로 사카모토 료마다. 이들은 에도막부를 물리치고 메이지 유신을 이루지만 1871년 봉건제도가 폐지되면서 사실상 사무라이 계급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표표히 사라지게 된다.




매거진의 이전글 사무라이는 두 번 웃기지 않는다 <사무라이 픽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