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내 인생의 데자뷔, 파리(Paris)

by 다모토리
누구나 평생 한 번쯤은 꼭 가보고 싶어 하는 도시


꼬마일 적 형과 낡은 사회과부도를 펼쳐놓고 도시 이름 찾기 놀이를 할 때부터 난 파리가 좋았다. 나중에 커서는 거기서 살고 싶어 하기도 했다. 예술이라는 것이 치장된 즐거움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도 역시 파리는 꿈의 대상이었다.



'에두아르도 푹스'라는 독일 풍속 학자는 루이 16세의 음란한 소풍을 경험했던 어느 노인의 자전적 고백을 책으로 전하며 노인이 '세상의 즐거움은 그때 거기서 다 맛보았다'라고 전하고 있다. 그 이야기를 읽고 나자 도대체 얼마나 현란하고 중독적이고 자극적이었으면 그 노인은 이후 자신의 생애를 통틀어 단 한 번도 당시에 느꼈던 즐거움 근처까지도 가보지 못했다고 고백했을까.



알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파리는 그 안다는 것이 좀체 쉽지 않은 그런 도시다. 파리의 화장기 넘치는 요부의 얼굴은 그렇게 내가 고개를 몇 번인가 연실 끄덕이고 나서야 비로소 나에게 슬쩍 웃음을 보내온다. 그건 멀리 에펠탑의 번쩍이는 네온이 내 눈에 들어오면서부터였다.



크리스마스 이브. 우린 캠핑카를 블로뉴 캠핑장에 박아놓고 셔틀을 타고 터덜터덜 걸어서 샹젤리제로 나갔다. 가로수엔 수많은 전등이 거리를 밝히고 사람들은 길거리 카페에 고양이처럼 웅크리고 앉아 수다를 떨고 있다. 개선문 앞에 다다르자 좀은 이상한 풍경이 내 앞에 펼쳐진다.


“응? 여기가 어디지? 여기가 샹젤리제인가? 파리인가? 동대문인가?”


재밌는 풍경이다. 파리 시민들은 다 어디 가고 수십 명이 넘는 대한민국의 동포들이 비행기를 타고 수고스럽게도 여기까지 넘어와 크리스마스 이브에 파리의 샹젤리제를 접수하고 있었다. (무려 15년 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연일 터지는 플래시와 고함소리와 떠나갈 듯한 안내 소리, 거기에 깃발에 배지까지 가슴에 달고 등장한 중국 일행들까지 긴급 투입되자 이내 샹젤리제는 왁자지껄 동대문 벼룩시장이 되고 만다.



그러더니 이내 파리만이 보여줄 수 있는 미묘한 화장기를 감추고 축음기 위에 망가진 카트리지를 떨어뜨려 난데없는 굉음을 울려대기 시작한다. 지구촌 모든 사람들이 바로 오늘 이 자리에 다 모인 것 같다. 만국박람회 때 세워진 에펠탑이 이제는 인종 박람회를 밝게 비추는 등대가 되었구나 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격세지감을 느낀다. 세월 참 좋아졌구나~ 파리에서의 크리스마스라니. 개선문을 뒤로하고 걸으면서 생각한다. 파리는 내게 동경의 대상이면서 한편은 언제나 늙은 창녀의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진한 향수를 뿌린 채 아직도 화려한 옷을 입고 샹젤리제나 오페라 근처의 꽤 유명한 카페테라스에 앉아 에스프레소 한 잔 앞에 놓고 다리 꼬고 담배 물고 있는 그런 늙은 창녀. 그런데 이 늙은 창녀는 꽤나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자유와 예술을 사랑하고 인생을 즐길 줄 아는, 그래서 인생의 맛을 제대로 아는 그런 늙은 창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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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캠핑여행으로 파리를 택한 것은 그리 나쁜 경험은 아니었다. 늙은 창녀와의 대화는 가능하면 조신하고 길게 그렇게 진득하게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나는 파리를 방문하면 꼭 들르게 되는 거리가 있다. 생 제르망 데 프레. 이곳은 바로 근처의 생 미셀의 번잡함에 비하면 관광객도 적고 차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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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오면 먼저 타쉔 이라는 예술 전문서점에서 책 구경하다가 바로 옆에 있는 유명한 이태리 아이스크림을 먹는다. 그리고 작은 화랑들을 기웃거리다가 근사한 카페에서 커피 한잔. 뭐 이 정도면 파리에 온 것 같다. 꼴레뜨 매장에 가서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처럼 비싼 물을 사 먹어보기도 하고. 나도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파노라마 잡지를 들었다 놨다 하면서 눈치를 보기라도 한다면 언제부터라도 여기 살았었던 놈 같은 생각마저 들기까지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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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골목 한편,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잘 보이는 거리의 카페에서 진한 에스프레소를 시켜 놓고 한참을 앉아 거리를 바라본다. 나는 지금 파리에 와 있다. 파리는 이미지다. 내 안에 꿈을 조그만 도화지에 옮겨 그린 이상한 데자뷔다.



보면 사라지고 그리면 기억이 나지 않는 원천적인 꿈의 이미지. 사회과 부도에서 보았던 그런 작은 이미지. 카메라를 만지작거려 본다. 내가 본 것은 다 이 필름 속에 저장될 것이다. 기억이 이미지로 남는다 해도 그 속엔 내가 있을 테니까. 파리에선 그렇게 그냥 길을 걷는 게 나에겐 언제나 즐거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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