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거진4리 고향집_알리와 이노키 그리고 만물상회

CHAPTER 2. 첩첩산중에서 망망대해까지 (춘천-속초)

by 다모토리


1976년 6월 26일 초여름 날씨가 상당했던 날로 기억한다. 집 뒤 언덕 위에 있던 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형과 나는 건넌방으로 들어가 잽싸게 텔레비전 문을 드르륵 열고 전원을 넣었다. 띵~하고 흑백 브라운관이 켜지더니 세기의 대결이 mbc 라이브로 중계되고 있었다.



세기의 복서 무하마드 알리와 일본 레슬링의 기린아
안토니오 이노키가 K1 같은 허슬 대결을 하고 있었다. 학교에선 이미 알리와 이노키 중 누가 이길지에 대한 관심이 엄청났다. 이 경기는 아마 전국적으로도 가족 모두가 둘러앉아 지켜봤을 것이다. 당시 대략 3 가정에 텔레비전 한 대 정도가 있었다고 한다. 다행히 우리 집에는 고모가 사준 신줏단지 같던 흑백 티브이가 있었다.


이 날 내가 기억나는 건 이노키가 경기 내내 링에 누워 지루한 경기를 하고 있었다는 것과 알리가 주먹을 부르르 떨며 열 받아하고 있었다는 것 정도다. 하지만 기대했던 경기가 생각만큼 재미없자 형이 내게 집 앞 만물상회에 가서 시원한 하드를 사 먹자고 제안했다. (물론 돈은 안 주면서)



투덜대며 문에 걸려있던 대나무 발을 걷고 나가려는 순간 뭔가 엄청난 폭발음이 들리며 집 앞에 파편들이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아이스케끼였다. 만물상회 마당에 있던 하드 통이 섣부른 더위에 터진 것이다.

70년대에는 전기장치 없이 구멍가게에서 사용했던 하드 통이 있었다. 고무 질의 플라스틱 뚜껑과 케이스 속에 거울 같은 유리 보온병이 들어있어 밑에 얼음을 채운 고무주머니를 넣어 시원하게 저장하던 방식인데 이게 ‘펑’하고 터진 것이다.



뭔가 큰 폭음이 들리자 동네 아이들이 만물상회 마당으로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나는 물론 아이들이 여기저기 널려있는 하드를 주워 잽싸게 집으로 도망쳤다. 하드를 들고 오니 세기의 대결은 이미 끝나고 말았다. 누가 이겼냐고 물으니 비겼다는 싱거운 답이 돌아온다.


나중에 안 얘기지만 경기 후 알리는 이노키를 향해 "누워서 돈 버는 놈은 몸 파는 창녀 하고 이노키 밖에 없다"라고 힐난했고, 이 말을 들은 이노키는 "그럼, 넌 누워있는 창녀 앞에서 아무것도 못하는 고자냐?"라며 맞받아쳤다고 한다.


그 넓었던 만물상회를 다시 찾아가 봤다. 용케도 아직 영업을 하고 계셨다.


#버스오딧세이 #거진4리_고향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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