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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모토리 Feb 29. 2020

47. 속초를 스치며(2)_온기 없던 싸늘한 추억

CHAPTER 2. 첩첩산중에서 망망대해까지 (춘천-속초)


아이들은 속초라는 도시의 정체성에 관심이 없었다. 아이들은 그냥 풀 같은 존재들이었다. 골목이 있으면 거기서 뛰어놀고 친구가 있으면 자연스럽게 사귀면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당시 내 친구들은 다들 가난하고 형편이 넉넉하지 못했다. 대문이라는 개념조차 없던 거진에 있을 때보단 덜했지만 그래도 여기 아이들의 가정형편이 더 낫다고 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아이들은 집에서 놀기보다는 늘 골목길이나 동네 공터, 심지어 공장부지까지 쳐들어가며 놀이를 즐기곤 했다. 바다가 보이는 수복탑 조그만 공원에서 야구시합을 하던 우리들은 어머니가 아들 손을 잡고 북녘 땅을 응시하던 그 동상의 의미를 전혀 몰랐으며, 그 동상은 우리들의 작은 구장에 존재하는 상징탑 정도로만 여겨졌다.



그렇게 속초의 길바닥은 흥미진진한 꺼리들로 가득했다. 건어물 덕장과 잡상인들의 난전 그리고 집 같은 만화방에 요란스러운 롤라 스케이트 장까지. 이러한 번잡스러움은 전국에서 모두 훔쳐온 것처럼 보였다. 중앙시장 오락실에는 수동 핸들로 움직이는 자동차 게임과 킹콩을 맞추는 레이저 건샷까지 갓 건져낸 어물전보다 싱싱한 놀이터였다.



한때 바다 경기가 좋았던 시절이 있었지만 대부분은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다. 아마 5학년 때였는가 싶다. 반 친구 녀석 중 한 명이 학교에 뭔가를 조심스럽게 싸 가지고 온 적이 있었다. 조그만 라면봉지에 싸여있던 것은 다름 아닌 갓 태어나 눈도 뜨지 못한 어린 생쥐 세 마리였다. 여자 아이들이 기겁해서 비명을 질러대는 바람에 담임선생님한테 들통이 난 녀석은 이실직고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반 여러 명의 집안 장롱 속에 그렇게 쥐들이 서식하고 있었다. 지금이야 말도 안 되는 이야기 같지만 그때는 그게 놀랍지도 않은 무덤덤한 일상이었다.



더욱 놀라운 건 먹을 것이 없어 쥐들조차 없는 친구 집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대문과 담벼락은 고사하고 지나가는 길에 드르륵하고 여닫이 문을 열면 곧바로 방이 등장하는 그런 집들이 태반이었다. 내가 전학을 온 이후 1년 간 대부분의 놀이를 그런 친구네 집에서 경험했다.



부모님은 도회지로 돈 벌러 간지 오래고, 남아 계시는 할아버지는 폐지를 주우러 온종일 집을 비워 그야말로 우리마저 없으면 사람 사는 집이 아닌 그런 집들이 천지였다. 보리밥이 상해서 시큼털털한 냄새가 진동하는 부엌에서 몇 날 며칠 바삭하게 말린 양미리를 구워 먹으려 꾀꼬리 놀이를 했던 친구들. 하지만 지금은 그들을 만날 수 없다. 다들 도시로 나가 뿔뿔이 흩어졌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어린 시절의 기억을 따라 골목길을 헤매고 지나가 본다. 예전엔 없었던 담들이 길게 늘어져 있고 거리도 조금은 넓고 시원하게 바뀌어 있었다. 하지만 골목 어디에도 웅성거리는 소음조차 없고 심지어 동네 강아지 짖는 소리조차 사라진 묵음의 도시로 바뀌어져 있었다. 추억은 있으나 실체는 없고, 기억은 있으나 존재감이 사라진 싸늘한 도시. 그게 나의 속초였다.

#버스오딧세이 #속초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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