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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모토리 Mar 07. 2020

62. 태백 통리고개_보리고개보다 힘들었던 나날들

CHAPTER 4. 산골 오지에서 삶을 돌아보다 (동해-영주)


동해 터미널에서 태백으로 가는 완행 버스를 탔다. 도계를 거쳐 태백시장에 들렀다가 종점인 태백 터미널까지 가는 노선이다. 완행 시간대긴 하지만, 경유지에 하차 승객이 많이 없어서 완행이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가는 길 중간에 38번 국도와 나란히 달리는 영동선과 오십천을 따라 구비구비 도는 절경은 절로 감탄사를 내뱉게 한다.



특히 도계에서 통리로 넘어가는 통리고개 구불길에 펼쳐진 풍경은 시내버스가 아니면 절대 느낄 수 없는 정취를 선사해준다. 오래전 유럽 캠핑카 여행을 할 때 미쉐린 지도를 가지고 다녔는데, 거기엔 그린로드가 따로 표기되어 있었다. 이 길은 시간이 조금 더 걸리더라도 돌아서 가볼 만큼 아름다운 길이란 뜻이었다. 통리고개가 바로 그런 고갯길이다.



그 옛날 이런 고개는 먹고살기 위해서 장똘뱅이들이 몇 번이나 쉬며 땀을 식혔던 고난의 길이었다. 서두른다고 쉬이 갈 수 있는 길도 아니고, 샛길도 지름길도 없는 것이 고갯길이었다. 한 가지 위안이라면 고갯길 정상에서 바라보는 아름다운 풍광이었을 것이다.



조선시대 통리고개는 영동의 삼척과 경상도의 봉화를 잇는 유일한 통로였다. 경상도 상인들이 무명, 배 같은 직물을 이고 지고 통리고개를 넘었다. 그들은 도계, 삼척, 북평 장날에 직물을 팔아 건어물과 소금을 구해 통리고개를 다시 넘어갔다. 그러다 탄광이 개발되자 일제는 서둘러 삼척 철도를 건설했다. 묵호항에 석탄부두를 만들고 일본으로 석탄을 실어 나르기 위해서였다. 당시 일본은 유연탄은 있었지만 무연탄은 생산되지 않았다.


삼척 철도의 운행은 오랜 기간 통리고개를 무대로 삶을 이어가던 짐꾼들을 현역에서 떠나게 만들었다. 하지만 예외 구간이 있었다. 영동선 구간 중 통리와 도계의 심포리역 사이 1.1㎞ 거리는 높은 해발고도와 경사면 때문에 철도를 연결하지 못했다. 이 구간은 1963년 5월까지 인클라인 철도를 통해 화물과 석탄을 끌어 옮긴 뒤 다시 열차를 갈아타는 번거로운 여정이었다.


그런 이유로 당시 통리고개는 비탈길을 30여 분간 오고 가는 열차 승객으로 북적였다. 한겨울 눈보라가 날리는 통리고개를 어린아이와 짐까지 가득 짊어지고 힘들게 고개를 올라 열차를 갈아타야 했다. 당시 이런 열차 승객들을 위한 지겟꾼들이 1,000여 명 정도 있었다고 한다. 그 고갯길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보릿고개 넘기보다 통리고개 넘기가 더 힘들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이제 통리고개는 터널이 뚫려 예전의 고생길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다행히 이런 시내버스 길이 군데군데 남아있어 당시 광산촌의 애환이 담긴 ‘마의 구간’을 어렴풋하게나마 상상해 볼 수 있다.


#버스오딧세이 #통리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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