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도 걸어도(步いても步いても), 2009 _ 고레에다 히로카즈
'요코야마 가의 둘째 아들 료타가 이제 막 재혼한 아내와 그녀의 아들을 데리고 부모님 집을 방문한 그날. 오랜만에 한 자리에 모인 대가족은 끝없이 이어지는 식사를 마주하며 반가운 수다를 시작한다. 하지만 서로의 안위를 묻는 일상적인 대화 사이에 서서히 스며드는 긴장감...그리고 12년 전 이 가족에게 일어났던 사건이 가족간의 일상적인 분위기에 예리한 파장을 일으키는데...'
키네마 준보가 선정한 2008 일본 영화 베스트 10 중 한 편이자 영화평론가 이동진이 만점을 준 영화 중 하나다. 언듯 보면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일본의 명감독인 '오즈 야스지로' 감독에 대한 삶의 시선을 오마쥬한 작품으로 여겨질 만큼 일상의 디테일이 물씬 묻어나는 영화이다.
일반적으로 영화에서 몰입도와 사건을 정비례시키며 극을 전개시키는 스피디한 영화는 아니지만 그래서 이 영화는 한 여름 흘러내리는 땀만큼이나 무척 끈적이며 숨겨져 있던 신경을 자극시킨다.
일본의 유명 배우 아베 히로시가 주연한 영화로 일상적인 가족의 진솔한 삶과 그 안에서 벌어지는 갈등의 흐름을 잘 짜인 연출력으로 보여주고 있다. 가족의 구성원을 잃어버린 한 가정 내에서 남겨진 가족들이 그 상처를 보듬고 극복해 나가며 느끼는 갈등과 공감대가 잔잔하게 어우러져 마치 한 편의 에세이를 보는 듯한 감동을 전달한다.
극의 전개상 주요한 테마는 장남인 준페이가 휴양지에서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하고 사고로 죽은 이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이 영화에서 정작 말하고자 하는 것은 가족이란 구성원들이 서로에게 기대하고, 느끼고, 때로는 불편해하는 모든 삶의 과정을 담은 파편들이라는 사실이다.
아들이 의사가 되길 원하던 완고한 성격의 아버지와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아들, 평생 조용히 남편을 내조했지만 결정적 배신감을 '블루라이트 요코하마'라는 노래로 승화시키는 어머니...항상 눈치만 보는 누나와 매형 그리고 이런 가정을 3자의 시선으로 담담하게 바라보는 새로운 가족구성원들까지..
등장인물들 중 허투루 보이는 캐릭터는 없다. 이 영화에서 감독은 충분히 계산된 그리고 치밀하게 연관된 스토리를 함축적으로 다루지만 극의 전개는 너무나 일상적이고 담담해, 마치 시간을 소비하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주인공 료타의 가족이 세상을 떠난 장남의 기일에 맞춰 고향집에 모인다. 가족들은 평생을 함께 살아왔지만 지금은 서먹서먹하고 뭔가 숨기고 있다. 나의 인생을, 누구의 인생을 직접적으로 나서서 간섭하려고 하지 않지만, 불편함을 덜기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공동의 시간을 소진한다.
누구는 거짓말을 만들고, 누구는 변명을 하며, 누구는 기억하지 않아도 될 일을 끄집어낸다. 그 불편한 하룻밤 사이에 우리는 가족이라는 유대감이 지니는 정체성을 날 것으로 들여다볼 수 있다. 그것은 가족이 한데 모이는 혼잡함... 그리고 가족이란 유대관계를 새삼 확인해야 하는 서먹함...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의 사건을 되돌리는 갈등들... 묻힌 자신만의 삶의 이야기를 비로소 확인하는 비장함까지... 가족을 주제로 하는 영화에서 보기 드물게 감독은 다양한 시점의 화두를 던지고 있다.
하지만 그 서먹한 시간이 영화에서 갈등으로만 비치는 것은 아니다. 오즈 야스지로의 작품들이 늘 그렇듯이 가족이란 언젠가 유대감을 회복하는 그러한 관계로 귀속된다. 이 영화 역시 마찬가지다. 어렸을 적부터 좋아했던 아들의 음식들을 만들어주는 어머니, 그 레시피를 따라 하며 애정의 시간적 관계를 재 설정하는 자식들, 어렵게 어렵게 부딪히며 건네는 아들과 아버지의 별일도 아닌 일상적인 대화.. 그리고 영원히 지켜지지 못하게 된 약속까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가족'은 언제나 일관되고 그 만의 색깔이 입혀져 있다. 나는 칸 영화제 최연소 남우주연상에 빛나는 영화 '아무도 모른다'를 보고 하루 종일 아무것도 못하고 황당한 적이 있었다. 그것 뿐이랴..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서 보여준 가족이라는 관계의 디테일한 시선과 해석은 두고두고 날 감동으로 몰아넣었던 기억도 있다.
그가 가족이라는 주제에 특별하게 집착하는 이유가 '오즈 야스지로'의 영향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속마음조차 교류하기 힘들어진 현대의 가족들이 풍겨내는 날것로의 갈등과 고민들이 영화라는 장치를 통해 완벽하게 정화되고 순수해지는 과정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관객으로서 축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살아있어서 영화를 즐기는 행복..."
영화평론가 이동진은 이 영화를 이렇게 한 줄로 평가했다. 인간의 생애라는 그 절실한 시작점을 이루는 관계망인 가족은... 정말로 내가 살아있음을 절절하게 공감하고 느낄 수 있는 가장 소중한 무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이란 가장 작은 사회다. 서로 조화를 이루면 행복하지만 그 반대면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된다.
하지만 가족은 쉽게 해체되지 않는다. 마치 걸어도 걸어도 사람은 죽을 때까지 계속 걸어야 하듯이 죽음으로 생을 마감하지 않는 한 계속해서 걷듯이 가족과의 관계는 이어져 간다. 결국 갈등하고 싸우고 미워하더라도 우리는 가족이란 테두리 안에서 절대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말은 늘 이렇게 쉽게 하지만 나 역시 이 주제만큼은 솔직히 불편한 게 사실이다...
한줄 평 : 정신줄 놓고 있는 아들 놈...한 방에 철들게 하는 참 괜찮은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