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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모토리 May 17. 2016

절벽을 걷는 자들의 세상 <란(亂), 1985>

란(亂), 1985 - 구로자와 아키라

그는 왜 셰익스피어에 부처를 덧입히려 했을까?

란(亂), 1985 - 구로자와 아키라

세계적인 감독으로 평가받는 일본의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1985년 작 '란(亂)'은 알다시피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을 나름의 시선으로 재해석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셰익스피어의 원작에서 영국의 리어왕이 자신의 왕국을 세 딸에게 나눠주는 이야기를 모티브로 일본 전국시대의 성주인 주인공 히데토라가 자신의 세 아들에게 성을 물려준다는 이야기가 큰 줄거리를 이룬다.  


주인공 히데토라는 아들을 이끌고 사냥을 나간 자리에서 분위기에 휩쓸려 후계자를 정해버린다..  

물론 구로자와 감독은 중간중간에 원작의 모티브를 자신의 영화 철학에 맞게 다양한 변주를 시도한다. 전체적인 영화의 줄거리는 자신의 오만한 실수로 인해 자식들에게 버림을 받는 과정을 지켜가지만 특별한 감독의 영화적 사인(sign)이 원작과는 다소 다르게 이 영화 속에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삶을 전제하는 자신만의  기준이다.


예를 들면, 원작의 경우는 리어왕이 세력을 빼앗기고 광기에 빠지는 인간적인 어리석음을 광대의 대사를 통해 빗대고 있는데 반해, 영화 ‘란’에서는 주인공 히데토라의 광기와 몰락한 운명을 인간적 어리석음보다는 주인공의 비인간적인 과거로 인한 죄과로 해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죄과의 중심에는 악한 본성과 선한 본성을 지닌 두 명의 인물이 극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둘째 아들의 부인인 스에. 스에의 가족을 멸문시킨 장본인이 바로 히데토라이다
영화에서 악의 중심으로 등장하는 복수의 화신, 카에데 

첫째 아들 타로는 영화 시작에서 아버지로부터 모든 권력을 물려받지만 아버지의 철천지 원수인 아내 카에데로 인해 복수의 화신으로 점철되다가 죽음에 이른다. 악의 본성을 지닌 인물적 핵심의 주인공 '카에데'이다. 그런가 하면 모든 권력을  첫째 아들 타로에게 빼앗겨 버려 심사가 뒤틀린 둘째 지로의 아내는 시아버지 히데토라에게 멸문지화를 입은 '스에'라는 여인이다. 


그녀 또한 카에데와 마찬가지인 상황이지만 스에는 불교에 귀의해 주인공 히데토라를 용서한다. 선한 마음의 본령으로 등장하는 또 한 명의 구심점이다. 여기에 정확한 상황판단과 미래를 예견하는 날카로운 눈으로 아버지의 권력이양을 극력으로 반대해 결국 추방당하는 셋째 아들 사부로가 등장해 극을 극적으로 전개시킨다. 


권력을 물려준 아들들에게 배반을 당하고 성에서 쫒겨나는 히데토라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은 인간 본성에 집중하지만, 구로자와 아키라는 인간의 업보에 주목한다. 서양과 동양의 시선이라는 이 협소하지만 분열된 인간 성찰의 구조도는 영화 속에서 구로자와를 만난 진정한 빛을 발한다. 현실과 욕망에 집중하는 인간형보다는 역사와 시간 속에서 자신의 죄과를 인정해야만 하는 성찰적인 광기가 영화 전편에 흐르는 이유다. 원작과 란의 두 주인공은 모두 광기에 시달리지만, 점차 현실적 인식을 찾아 예리한 설전을 통해 자신의 문제점을 찾아가는 리어왕 대신 구로자와 감독은 광기 속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는 극한의 인간적 실존 세계를 그리고 있다.   


그는 아들들의 벌이는 전쟁의 한가운데에서 마침내 광인이 되어가는데...

주인공 히데토라가 존재하는 세상은 비록 일본의 전국시대로 설정되어 있지만, 이는 인간들이 서로 암투하고, 자식과 부모의 인륜조차 통하지 않으며, 형제의 정이나 부부의 정조차 쉽게 버려지는 세상으로 잔인하게 그려진다. 그런데 감독의 시선은 이런 세상이 등장하게 된 원인이 바로 주인공 히데토라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빼앗은 모든 성주의 가문을 죽이는데 그 자녀 중 한 명을 철저하게 이용했으며, 그 두 여인이 영화 속 악과 선의 본령을 지닌 카에데와 스에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불교에서 말하는 업보다. 주인공이 이 업보를 없애기 위해서는 인간의 모든 죄를 멀리하고 해탈의 경지에 올라야 하지만... 그 결과는 난폭한 광기로 이어진다.  난세라는 시절에 평화는 상대방을 제압하는 비상식적인 폭력으로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영화 속에서 선과 악은 분리되지 못하고 영화 속에서 장렬한 죽음을 맞는다. 구로자와 감독은 셰익스피어의 인간적 본성에 부처라는 업보와 마음을 입힘으로써 광기 속에 살아가는 모두를 아우르고자 했다.




구로자와의 전쟁은 영화 속에만 있지 않았다 


이 영화는 1985년에 제작되었다. 피가 흩뿌려지는 전투 씬은 지금 보면 그다지 현실감이 있지 않지만 영화적 미학으로 바라볼 때 이 영화는 연극적 미장센과 비장한 색채가 향연을 이루는 그리스 시대의 잔인한 비극 서사를 마주 대하고 있는 것 같다.  더욱 특이한 것은 '7인의 사무라이'에서 보여준 구로자와 아키라만의 카타르시스가 다른 모습으로 변주되고 있다는 점이다. 전작에서는 현실에선 불가능한 권선징악으로 관객에게 통렬한 카타르시스를 안겨주는 그였지만... 이 영화에서는 통렬함 대신 슬픔과 허망함 그리고 진정한 인간사의 비극을 곧이곧대로 목도하게 해준다는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믿었던 셋째아들 사부로와 주인공 히데토라는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다..

이러한 패배적인 카타르시스는 이 영화를 만들고자 했던 구로자와 감독이 처한 시대적 상황과 개인적 욕구 그리고 번민의 과정 속에서 탄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당시 구로자와 감독은 종종 이 영화가 자신의 마지막 스펙터클 영화가 될 것이라고 공언하곤 했다고 한다. 그 이면에는 자신 스스로가 영화예술의 시대적 변화 속에서 점차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되어가는 리어왕과 같은 처지를 느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미국에서 1960년대 말에 데뷔한 할리우드 감독들이 구로자와 감독의 영화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게다가 당시 할리우드 감독들은 그의 스타일을 자신의 영화를 통해 모방하기도 했는데, 이때가 1970년대였다.  하지만 당시 일본에서 개봉된 그의 영화들은 점차 관객들에게 외면을 받게 된다. 그 이유는 당시 젊은이들이 역사영화만을 고집했던 구로자와 감독의 영화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흥행이 저조해지고 점차 낙담한 구로자와는 70년대 초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러한 시련 이후 그의 영화는 더욱 염세적 세계관을 지니게 된다. 영화 '란'은 이러한 그의 인생 사적 감정을 담아낸 마지막 보루이자 영상적인 외침이었던 것이다. 


1985년 영화 '란'을 제작하던 당시에 조지 루카스와 함께 한 구로자와 감독

이 영화를 제작할 당시 에피소드가 하나 있는데, 구로자와 감독이 그의 수제자라 자칭하는 스티븐 스필버그와 조지 루카스의 지원을 받아 '카게무샤'를 찍을 때, 그가 몰래 자금을 나누어 이 영화를 준비했었다고 한다. 그 때문에 그 사실을 알게 된 스필버그와 루카스가 엄청나게 화를 냈다고 하는 일화가 전해진다. 영화 '란'은 이런 분란을 겪으면서도 그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만들어 낸 비장한 역작이라 할 수 있다. 




광대의 언어로 우리 시대를 풍자하다


이 영화 속에서 연극적 미장센을 극적으로 상징화시키는 주역은 주인공 히데토라의 시중을 들고 있는 광대 '쿄아미'(이케하타 신노스케 분)이다. 영화의 플롯과 사건 전개의 분절 속에는 반드시 이 광대 쿄아미가 등장해 관객의 시선을 붙들고 상황을 정리한다. 그가 말하는 장난 섞이고 우스꽝스러운 대사들 속에는 해학과 풍자보다는 비극적 아포리즘이 고인 피처럼 흥건하게 묻어난다.  


이 영화에서 연극적 미장센을 연출한 주인공 광대 '쿄아미'
"새의 알은 더럽고, 뱀의 알은 깨끗하다. 새는 더러운 알 대신, 깨끗한 뱀의 알을 품는다. 뱀이 알에서 나와 새를 잡아먹는다." 늙은 영주는 어리석은 새다. 
"인간은 울면서 태어난다. 울만큼 울다가 사람은 죽는다." 
"예전에는 내가 미쳐서 너를 웃겼는데, 이제 네가 미쳐 나를 웃기는구나." 
"미친 지금의 세상에서 미친다면 제정신이다." 


구로자와 감독은 영화 속에서 광대 쿄아미의 입을 빌려 인간의 삶을 말한다. 이러한 작위적인 대사들은 영화 속에서 또 하나의 소극장을 마주 대하고 있는 포켓 트립 효과를 관객들에게 선사한다. 이중적 전개 장치다. 사람들은 극의 전개에 목말라 있는데 비해 감독의 목소리는 진중하게 극을 멈추고 뜬금없이 산만한 춤판을 벌인다. 일종의 무성영화 속 변사의 역할이다. 이는 일본 영화에서 특히 볼 수 있는 강력한 직설화법이라 할 수 있다.  


회화적 이미지가 물씬 풍기는 구로자 아키라 감독판 전투씬

또 하나 지적하자면, 이 영화 속 전투씬은 당시로서는 엄청나게 스펙터클한 씬이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전투씬이 지니는 의미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감독이 영화의 말미에 쓸데없이(?) 이런 광활한 전투씬을 넣은 이유는 이 영화의 가장 빛나는 반전이다. 영화의 얼개를 따라가다 보면 관객은 이미 전투의 유용 가치를 단 하나라도 찾아볼 수 없는 위치에 서 있다는 것을 자각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를 감독이 모를 리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피가 터지는 잔혹하게 거대한 전투씬을 라스트 씬으로 설정한 이유는, 그것이 바로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이 당대를 가늠하는 명 감독임을 증명하는 하나의 강렬한 핏빛 시그널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음이다.. 부처님 손바닥 안에서 아무리 거대하고 잔인한 살육극이 벌어진들 그 권력이 대체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이냐는 장자의 곤붕(鯤鵬)과도 같은 물음. 그 비웃음의 절정이다.

                    

영화의 대단원... 이 장면이 바로 감독이 말하고자 한 인간 군상의 완결판이다.

그리고 졸린 듯한 관객의 목을 내리치는 마지막 엔딩. 전쟁의 참화가 모두 끝이 나고 주인공 때문에 눈이 멀게 된 스에의 남동생 츠루마루가 절벽에서 조심스레 한 걸음 한 걸음 지팡이를 내딛다가 낭떠러지 앞에 자신이 서 있음을 알게 되자 흠칫 놀라 넘어지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우리는 비참하게 깨닫는다. 영화를 보는 내내 우리는 거기에 함께 서 있었던 것을... 그것도 아주 위태롭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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