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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성 Oct 19. 2022

아무리 힘든 일에도 끝은 있으니까

집에서 일하는 프리랜서의 일상 회복 에세이

그야말로 사투 그 자체였던 마감을 마치고 얼음 가득한 잔에 모스카토 와인을 부어 다시 책상 앞에 앉는다. 프리랜서는 매달 자신이 택한 일 때문에 고통받고 돈을 버는데 이번 달은 일 조절에 실패해 2주간은 휘몰아치는 스케줄에 나를 돌볼 시간도 없이 보냈다. 일이 많은 것은 너무 감사한 일이지만 기한내 다 해내야 하는 압박감과 쉴 새 없이 진행되는 인터뷰와 촬영 스케줄, 원고 마감으로 발을 동동 굴러야 한다. 나와의 싸움이다.



일을 적당히 하면 어때, 라고 가족이나 친구들은 말하지만 그게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 폭풍같은 시간이 지나고 나면 지난날의 고통과 압박감은 금세 미화된다. 다시 새로운 일이 주어지면 새로운 기분으로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다신 이렇게 일을 많이 하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마감이 지나면 단 며칠만에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하는 생각이 든다. 실은 며칠도 아니고 반나절도 안되어 내 안의 일 모드가 리셋되는 것 같다. 정말 오랜만에 메일함의 알람이나 핸드폰으로 올 연락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한숨 자고나면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평온해진다. 어쩌면 이런 면 때문에 늘 능력치보다 많은 일을 하고 그 경험으로 인해 강제로 임계점을 넘으며 새로운 도전을 하고 성장할 수 있는 것 같다. 이것은 자기 효능감이 높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지난날의 힘듦을 잘 잊어 버리고 금세 회복하는 면 때문이기도 하다. 과거의 고통을 잘 잊어버리는 건 뭐라고 표현해야 하죠? 대체할 단어가 있을 것 같은데, 30분 전에 마감이 끝나서인지 잘 떠오르지 않는다. (혹시 아시는 분들은 알려주세요)


이 글을 쓰는 동안 얼음과 적절히 블렌딩된 모스카토 와인을 홀짝 홀짝 마신다. 와인을 얼음잔에 먹게 된 계기는 얼마 전 친구들과 1박 2일로 롯데호텔월드에 호캉스를 하러 갔다가 바로 근처 보틀벙커에서 산 와인을 편의점 얼음컵에 따라 먹으면서다. 와인을 칠링할 시간이 없어 얼음컵을 산 거였는데 그 맛이 예상하진 못했지만 무척 좋았다. 와인을 천천히 마시며 얼음이 조금씩 녹으니 적절히 희석된 농도도 그렇고, 넘길 때마다 차가운 와인이 넘어가는 느낌도 좋고. 딱 내 스타일이었다. 그 후로 무조건 얼음잔에 와인을 따라 마신다. 그 모습을 본 후배는 '선배, 완전 윤여정 선생님 스타일로 마시네요'라고 TV에서 배우 윤여정이 그렇게 마시는 걸 봤다고 했다. 와인 마니아들은 인상을 찌푸릴 지 모르겠지만, 알쓰들에게 추천하는 와인 마시는 법. 한 번 해보시길.    


마감도 끝났는데 다시 책상에 앉은 이유는 또 할 일이 있어서다. 잡지 마감 때 미뤄둔 덜 급한 일들, 그러니까 나중에 해도 되는 일들을 쉬엄 쉬엄 처리한다. 정신없이 쌓여 지저분해진 다운로드 폴더 속 파일도 비우고 쓸데없는 메일도 지운다. 마감 직후 꼭 하는 루틴이다. 정말 집중해서 일할 때는 음악을 듣지 못하는 편인데, 듣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못한다'고 표현한 이유는 음악을 들으면서 동시에 무언가에 집중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지금은 오늘 기분에 어울리는 음악을 듣고 있지만 정말 바쁘게 처리해야 할 일이나 고도의 집중력을 요하는 일, 기사나 칼럼을 쓸 때는 아주 고요한 적막이 흐르는 상태에서 하는 편이다. 중간 중간 기분 전환 삼아 음악을 듣기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기분 전환용이다.  


오랜만에 들뜬 기분으로 블루문을 들으니 작년 겨울 크리스마스가 떠오른다. 작년 3월을 마지막으로 10여년 가까이 다닌 직장 생활을 마무리하고 프리랜서가 되었다. 사실 그만 둘 당시만 해도 어떻게 살아야 겠다는 계획이 없었기 때문에 퇴사를 결정한 시점부터 이런 저런 곳에 면접을 보기도 했다. 그 시점에 헤드헌터를 통해 제안이 와 그동안 일하던 분야와 다르지만 접점이 있는 회사 몇 곳의 전형을 진행했는데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만한 대기업도 있었고 한 번쯤 가보고 싶었던 회사도 있었기에 그 때만 해도 그 일들이 잘 마무리되어 새로운 회사에 다니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런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최종 면접에서 떨어지거나 전형이 잘 진행되다 채용 조건 중 하나가 안 맞아서 무산되는 일이 벌어져 결과적으로는 아무데도 합격하지 못했다. (응?)


지금에 와 생각해 보면 그 모든 일들은 너무도 다행스러운 일. 모든 곳에 불합격했기 때문에 혼자 일하는 기쁨을 알게 된 지금이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 때는 그 모든 일이 불행하게 느껴져 '왜 나만 안될까'하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기도 했다. 그리고 내가 혼자서 얼마나 부지런히 일을 잘 해낼지도 그땐 알 수 없었고 과연 그 기회들이 주어질지도 미지수였다. 때문에 작년 한 해는 미래에 대한 계획이나 목표 없이 주어지는 일들을 바삐 하며 지냈다. 그 중에선 난생 처음 해보는 일들도 꽤 있었고 하나하나 퀘스트 수행하듯 깨부수어 나갔다. 그러면서 내가 몰랐던 내 안의 워커홀릭 기질까지 발견하면서 나를 알아가느라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렇게 고군분투하며 지내다 한 해의 끝에 일주일 정도 제주도로 리트릿 여행을 떠났다. 마찬가지로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는 후배와 함께. 객실에 TV가 없고 요가, 명상, 다도를 할 수 있는 명상 리조트와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머물 수 있는 숙소 두 군데를 예약했다. 크리스마스 즈음에는 성산 쪽에 머물렀는데 그곳에서 거의 유일한 와인 보틀숍이 있어 갔다가 와인을 마실 수도 있다고 해 거기서 크리스마스를 보냈다. 마침 그 날은 눈이 조금씩 흩날리고 가게 안에는 자세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재즈가 흘러 나왔던 것 같다. 추천을 받아 와인을 고르고 케이크를 닮은 양배추와 치즈 같은 안주들을 먹으며 금주령 시대의 스피크이지바에 모인 사람들처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무슨 대화를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꺄르륵'으로 요약되는 그 날의 분위기가 요즘들어 자꾸 생각난다. 그 때만큼은 아무 걱정이 없었고 꽤 즐거웠으며 우리는 취해 있었기 때문에. 마감하다 힘들 때 자꾸 그때의 기분이 떠올라 웃을 수 있었기 때문에.


그러고 보니 올해도 거의 다가고 벌써 내년 다이어리를 살 때가 다가왔네.    


후배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준 빈티지 성냥
피스 오브 양배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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