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것 하나쯤은 이고 지고 살아도 되지 않을까요

그것이 책장이라는 게 문제이지만...

by 김희성

최근에 이사를 하면서 책장 레이아웃이 망가졌다. 사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보면 별 문제를 못 느낄 것이다. 책이 책장에 가지런히 꽂혀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나만 아는 책의 배열이 있다. 어떤 칸에는 같은 색깔의 책끼리 모아 꽂아 두었고, 어떤 칸은 지금 더 이상 펼쳐 보지 않지만 나와 대학 시절을 함께한 전공 서적으로만 구성했다. 그런가 하면 최근 읽고 있는 책들만 한데 모은 칸도 있다.


일단 집을 정리해야해서 책장 빈 자리에 아무데나 꽂아둔 책들을 두 달 정도 흐린 눈으로 외면해 오다 지난 주말 드디어 책장 정리를 시작했다. 거실 한 쪽 벽면을 가득 채운 책들을 모조리 꺼내고 책장에 쌓인 먼지를 빡빡 닦았다. 세월이 흐른만큼 책도 조금씩 늘어난다. 특히 그동안 기고를 한 잡지와 작업물들이 많이 생겨났다. 자리를 많이 차지하지만 열심히 일한 흔적이자 소중한 결과물이라 버릴 수가 없다. 유독 깨끗이 힘주어 닦은 칸에 가지런히 정리해 둔다.


책을 정리하다보니 과거에 나에게 소중했으나 지금은 별 감정을 일으키지 않는 책들이 손에 잡혔다.


- 그 시절에는 한 문장 한 문장을 온 몸에 새기듯 소중히 읽었지만 지금은 검은 잉크일 뿐인 책

- 인기 있는 작가의 책이라 언젠가는 읽어야지 하고 소장해 왔지만 몇 년이 지나도록 한 번도 읽지 않은 책

- 사람들은 좋다고 하는데 나에게는 아무런 감흥이 없는 책

- 나의 관심사와 가치관이 달라져 더 이상 소장의 의미가 없는 책

- 표지와 띠지에 끌려서 샀는데 영 재미가 없어 읽다 만 책

- 지금은 구시대의 이야기가 된 트렌드 서적


이 책들은 아쉽지만 책장에서 솎아내기로 했다. 중고서점에서 매입 가능한지와 혹시 이 책이 필요한 지인이 있을지 한 번 더 생각해 보고 처분 방법을 결정할 계획이다.


가진 책을 찬찬히 들여다 보고 남길 것과 떠나 보낼 것을 심사숙고 하다보니 책장도 생물처럼 진화하는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으며 바뀌어 나가는 책장 주인의 관심사와 생각에 따라 책장의 면면도 끊임없이 바뀌어 나간다. 책이 챙기면 생기는 대로 계속 쌓아나가면 좋겠지만 공간이 한정되어 있으니 주기적으로 가지치기를 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물론 이 과정은 책을 좋아하는 나같은 사람에게는 최대한 미루고 외면하고 싶은 순간이다. 지금은 감흥이 없어졌다 하더라도 한 때 그 책을 읽으며 생겨난 감정과 생각들이 아직도 내 안 어딘가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한 번 책장에 입성한 이상 더 이상 의미없는 책은 없으므로 한 권, 한 권 떠나보낼 결심을 할 때마다 마음 한 켠이 살짝 아려온다.


나는 작은 집에 살면서 거실 한 쪽 벽면을 책장에게 기꺼이 내어준 사람이다. 대신 지금의 책장이 수용할 수 있는 한에서만 즐겁게 책을 사고, 모으기로 정했다. 가끔은 책 때문에 집이 더 좁아 보이고 소파도 못 놓아서 아쉽다는 생각을 하기도 하지만, 태어나서 유일하게 모으는 취미로 삼은 건 책 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면 이 정도의 짐은 지고 살아도 괜찮을 것 같다. 한때는 책장을 다 없애고 더 홀가분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도 했지만... 물건을 비운다고 해서 마음까지 가벼워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좋아하는 것 한 가지쯤에는 정성을 쏟고 그것에 몰입해야 오히려 마음이 허하거나 복잡해 지지 않고 비로소 즐거운 생활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든다. 가볍게 살고 싶다고 좋아하는 물건도 버리고 비워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좋아하는 것 하나쯤은 이고 지고 살아도 되지 않을까.


물론 이 생각에도 얼마든지 변화의 여지가 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바뀌는 책장 목록처럼 언젠가는 '책을 소유하지 않는 삶'에서 충만함을 느낄 수도 있을테니 말이다. 어쨌든 지금의 나는 온전히 나만의 규칙대로 배열한 책장을 하루에도 몇 번씩 바라보며 기쁨을 느끼는 사람이다. 좋아하는 것을 보고 있으면 일상의 크고 작은 근심의 무게가 줄어들고 마음이 가벼워진다. 커다란 심경의 변화가 없을 때까지는 당분간 이렇게 살 계획이다. 어느 날은 새 책을 들이고, 하루는 과거가 된 책을 나누면서.



푸른색 계열의 책을 모아 꽂아둔 칸. 그 위는 아트북을 가로로 눕혀 두었다. 시체스 영화제에서 산 머그컵처럼 오래오래 기억하고 싶은 인생의 순간들도 책장 곳곳에 전시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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