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 엄마. 또 갈칫국이야?
가을이 되면 친정엄마가 단골로 상에 올리는 메뉴가 있다. 허연 국물에 큼지막하게 썬 노오란 늙은 호박, 토막 낸 갈치 몇 점이 함께 담겨 있는 갈칫국. 하지만 난 갈칫국이 밥상에 올라오면 단 한 수저도 들지 않았다. 고등학생 때 내가 제일 싫어했던 우리집 음식, 갈칫국.
하지만 지금은? 없어서 못 먹는다.
내가 학창시절 갈칫국을 싫어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국 위로 둥둥 떠 있는 갈치 비늘 때문이었다. 그리고 청소년기에는 누구나 어류보다는 육류를 더 선호하기 때문에 더 그랬던 것도 같다. 나의 아버지가 제일 좋아했던 갈칫국은 나와 내 형제들이 냉대하는 제주음식이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은 가끔씩 엄마가 해 준 음식이 그리울 때면 갈칫국이 당긴다. 그럴때 나는 항상 가는 식당에서 이렇게 외친다.
“갈칫국 하나 줍써.”
학창시절 비늘이 둥둥 떠 있는 갈칫국이 그렇게나 싫었지만 신선한 생갈치가 아니면 이렇게 비늘이 뜨지 않는다는 사실은 최근에야 알았다. 양념이 듬뿍 들어가 있는 조림보다 맑은 국물이 특징인 갈칫국이 더 갈치의 신선도에 따라 맛이 좌우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갈치조림을 파는 제주향토음식점은 많지만 갈칫국을 파는 식당은 생각외로 많지 않다. 특히 비늘이 둥둥 떠 있는 갈칫국은 그야말로 신선한 제주의 갈치를 공수하지 않으면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가을을 대표하는 생선은 무엇일까?
동문시장 어물전이나 마트를 가 보아도 제주에서 나는 제철 생선을 만날 수 있겠지만 나는 주저말고 제주 서부두 공판장에 가보기를 권한다. 아침 7시 전후면 제주시의 아침을 먼저 맞이하는 활기 넘치는 사람들이 이곳에 모인다. 물론 이들이 모이는 이유는 딱 하나이다. 갓 잡아 올려 싱싱하고 펄떡이는 제주의 생선들이 이곳에 모여 있기 때문이다. 10월의 이곳 아침 풍경을 보면 눈이 부실 정도이다. 활기 넘치는 사람들의 좋은 기운 못지않게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눈부시게 자태를 뽐내는 생선이 가득 넘치기 때문이다. 지금 현재 서부두 공판장의 주인공은 바로 이 생선이다.
은갈치!
가을부터 살과 맛이 오르는 생선은 비단 갈치뿐만 아니다. 각재기라 불리는 전갱이와 고등어도 지금부터 제주의 가을 맛을 제대로 알려주는 생선들이다. 제주 조기도 지금부터 등장하기 시작한다.
비린내가 가득할 거라고 짐작한다면 오산이다. 가장 신선하고 생생한 생선들이 이곳으로 모이기 때문에 비린내보다는 향긋한 바다냄새, 마치 이제 곧 여행을 떠나야 할 것 같은 설레는 마음이 가득한 부두의 냄새가 이 곳을 감싸고 있다. 가을 아침 제주에서 가장 매력적인 공간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제주의 진상품 중에도 갈치가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갈치라는 단어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다. 그 대신 재미있는 한자어가 하나 보인다. 바로 刀魚(도어).
한자 그대로 칼도를 썼다. 제주의 은갈치의 모습이 흡사 칼과 같아 도어라는 이름으로 갈치를 기록했던 것 같다. 갓 잡은 갈치는 날이 시퍼렇게 선 칼 모양이다. 은색 빛이 아닌 오히려 퍼런빛이 서늘하게 도는 갈치를 보고 있노라면 정말 바로 구입하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이고 탐이 난다. 제주의 갈치를 은갈치라고 한다. 이와 반대로 육지부의 갈치는 먹갈치라고 하는데 이 둘의 차이점은 어획 방식 때문에 생긴다. 제주에서는 갈치를 낚시로 하나하나 낚는다. 그래서 갈치들이 서로 부딪히지 않아 은색의 반짝임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육지부에서는 그물로 한꺼번에 잡는다. 그래서 그물망 안에서 서로 부딪히며 비늘이 다치기 때문에 색이 바래지고 검어진다. 물론 육지의 모든 갈치가 그물에서 다 모아 잡아 올리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제주의 어물전 상인들이 입을 모아 이야기하는 제주 은갈치가 그토록 매력적인 자태를 뽐내는 이유는 낚시로 낚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매력적인 갈치는 구이로 먹거나 조림으로 많이 먹는다. 그런데 갈치조림이나 갈치구이보다 더 제주사람들의 음식문화를 대변해 주는 음식은 뭐니뭐니해도 갈칫국일 것이다. 물론 제주에서만 갈치를 국으로 만들어 먹는 것은 아니다. 농촌진흥청의 조사에 따르면 경상남도 해안가 지방에서도 갈치에 늙은 호박을 넣어 국을 만들어 “생갈치호박국”이라 하고 먹는다고 한다. 제주사람들과 경상도사람들이 우연히 같은 음식을 해서 먹었는지 어떠한 음식문화의 교류가 있었는지는 보다 더 찾아보아야 할 대목이다.
그렇다면 왜 갈칫국을 만들어 먹게 되었을까?
일단 갈치는 갯바위에서 낚시를 해서도, 뭍에서 가까운 곳에서도 잡을 수 있었다. 그래서 제주사람들한테는 출륙금지령과는 상관없이 뗏목만으로도 갈치를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갈치는 예민한 생선인 축이어서 잡자마자 쉽게 상하기 일쑤다. 이런 갈치를 국으로 만들어 먹는다는 것은 잡은 직후부터 조리하는데 까지 걸리는 시간이 무척 짧아야만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갈치구이나 조림은 수입산(주로 세네갈산)으로도 어느 정도 맛을 낼 수 있지만 갈칫국 만큼은 신선하게 받아 온 생물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만들 수 없는 음식이다. 그래서 갈치구이나 조림을 파는 식당은 많지만 갈칫국을 파는 식당은 의외로 많지 않은 것이다. 또한 냉동 갈치를 넣고 갈칫국을 끓이면 비늘이 둥둥 뜨지 않는다. 그래서 갈칫국에 비늘이 둥둥 뜰수록 전날 밤 잡아 올린 신선한 갈치로 만든 갈치호박국임을 알 수 있다.
살이 여물고 담백함이 절정에 오르는 가을 은갈치는 잡아서 가장 신선한 상태에서 최대한 단시간에 조리해서 먹는, 제주 바닷속 갈치의 맛을 온전히 느끼는 조리법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가을에 제철을 맞는 각재기국과 고등어국도 지금이 가장 맛있게 먹을 수 있다.
여기에 제주사람들이 갈칫국에 짝꿍처럼 넣는 늙은 호박은 갈치의 담백함에 달콤함과 구수함을 더한다. 이 맛의 조화는 먹어본 사람들만 느낄 수 있다. 여기에 고추를 쫑쫑 썰어 알싸한 개운함까지 더하면 그야말로 금상첨화(錦上添花)이다. 이게 바로 양념장으로 버무려져 나온 갈치조림이나 구이와는 비견할 수 없는 제주의 가을 바다 맛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이 갈칫국을 만들때면 가는 곳이 있다. 바로 할망좌판.
나이가 들면 누구나 좌판을 깔고 물건을 팔 수 있도록 배려하는 제주사람들의 인심이다. 할망좌판에 할망들이 가지고 오는 것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할망들이 그냥 아무 생각없이 물건들을 까는 것 같지는 않다. 각각 가지고 온 물건들에 이야기가 담겨 있고 연유가 담겨있다. 내가 좋아하는 할망좌판의 물건은 그냥 바로 갈치국을 만들어서 먹을 수 있도록 세팅이 되어 있다. 공판장의 갈치보다 신선도는 조금 떨어지지만 그렇다고 싱싱하지 않은것은 아니다. 할망만의 싱싱함을 유지하는 비법이 있다.
그런 귀한 갈칫국의 맛을 어렸을 땐 제대로 모르고 이제서야 알게 되었다. 제대로 된 제주의 가을 맛을 제대로 느끼고 싶은 사람은 다음과 같은 경로를 따라 움직여보기를 추천한다. 첫째, 선선한 바람이 부는 10월 아침, 서부두 수협 경매장이나 수산시장에서 먼저 눈으로 제주의 가을을 본다. 두 번째, 근처 동문시장에 가서 활기찬 상인들의 갈치 파는 소리를 귀로 들으며 제주의 가을을 듣는다. 마지막으로, 근처 갈칫국 전문 식당에 가서 뜨뜻한 갈칫국 한 그릇으로 제주의 가을 바다 맛을 음미한다. 눈과 귀와 입이 모두 즐거운 가을여행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