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멩질, 가장 풍요롭고 행복한 제주의 먹는 날
제주사람들에게 가장 으뜸으로 치는 명절은 뭐니뭐니 해도 정월멩질이라고 부르는 설날이 아닐까 싶다.
제주는 설날보다는 정월멩질이라는 단어를 더 많이 쓴다. 지난 추석편에도 언급했지만, 새해를 맞는 정월 초하룻날인 설날은 정월멩질, 추석은 고슬(가을)멩질 또는 팔월멩질이라는 단어가 더 익숙하다.
“설 쇠러 가자”라고 육지 사람들이 말한다면
“정월멩질 먹으러 가자”라고 제주 사람들은 말한다.
이 먹는다라는 표현, 참 독특하고 재미있다. 그런데 비단 설이나 추석 등의 명절에만 먹는다는 표현을 하는 것은 아니다. 결혼식에 참석하는 것도 '잔치 먹으러 가게'고, 제사에 참석하는 것은 '식게 먹으러 가게'이다. 심지어 상갓집에 갈 때에도 '영장 먹으러 간다'라고 표현한다.
이쯤 되면 제주사람들은 평소에 얼마나 먹을 것이 궁했으면 '먹는다'라는 단어를 쓸까?라는 의아함이 들 수도 있겠다.
이 의아함을 갖고 있다면 한 가지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공통점은 있다. 이 '먹는다'라는 표현을 쓰는 멩질(명절), 잔치(결혼), 대소상, 식게(제사) 등은 제주 사람들이 일상을 제쳐두고서라도 참여해야 하는 상당히 중요한 집안 행사, 친척 행사, 지인 행사라는 점이다.
나는 디즈니 애니메이션 '코코'를 참 좋아한다. 그 이유는 코코가 가족의 따뜻한 감성을 담은 스토리를 풀어내기도 하지만 멕시코 사람들과 제주사람들의 정서와 감성이 비슷한 부분을 꽤 찾을 수 있어서이다. 코코는 멕시코의 '죽은자들의 날'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가족드라마인데 멕시코 사람들도 우리나라의 설날과 같이 모든 가족이 모여 조상들을 이 죽은 자들의 날에 맞춰 기린다.
죽은 자의 날(Dia de Muertos)은 부활절, 성탄절과 함께 멕시코의 최대 명절 중 하나인데 각 가정에서는 제단을 꾸미고 고인들을 추모한다. 보통 신주를 4대까지 모신다는 점이나, 제단에 고인의 사진과 생전에 그가 좋아하던 음식이나 물건 등을 올린다. 그러면 조상이 제단으로 찾아와 음식을 먹고 간다고 생각하는 점이 우리나라의 설날과 그 맥락이 거의 같다.
우리나라에서는 고인들이 찾아오는 의식으로 향을 피운다면 멕시코에서는 금잔화를 집 앞부터 깔아 오는 길을 만들어 주며 제단까지 화려하게 꾸민다. 육지부의 제사가 향을 피우며 다소 엄숙한 분위기로 설날의 모습을 보여준다면, 가족들이 모두 모여 죽은자들을 함께 기리면서 음식을 함께 나누며 축제처럼 즐기는 멕시코 사람들의 모습은 제주 사람들의 '멩질 먹으러 가게'와 그 결이 비슷하게 보인다.
물론 제주 사람들도 엄숙하게 차례 의식을 지낸다. 단, 축제 같은 느낌을 받은 부분은 제주사람들에게는 다른 명절보다도 음식을 더 다양하게 만드는 날이면서 한 해를 여는 명절이기 때문에 이 날을 맞이하는 사람들에게 느껴지는 설렘과 반가움이 좀 더 크게 다가와서이다.
이런 비슷한 느낌을 받는 의례는 마을제, 영등제 등 제주의 신을 모시는 제에서 또 한 번 느낄 수 있다.
제주 사람들이 평소에 얼마나 먹을 것이 부족했으면, 또는 환경이 척박해서 늘 배고픔에 허덕였으면 관혼상제에 '먹는다'라는 표현을 쓰나 싶은 생각마저 들 정도지만 확실하게 이야기해 둘 수 있는 점은 그들은, 제주사람들은 늘 바쁘다는 점이다. 화산회토라 땅이 척박하고 태풍의 길목에 있어 어떤 자연재해가 들이닥칠지 모르는 섬이기 때문에 그들이 늘 부족하고 먹을 것이 없이 살았다라고들 말한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화산섬인 제주는 밭농사를 할 수 있도록 자연이 준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논농사를 했던 육지부는 과연 모든 이가 일 년 내내 풍족하게 쌀 떨어질 걱정 없이 살았으랴. 곡식이 없어 힘든 시기는 제주나 육지나 똑같이 있지 않았을까?
다만 제주는 밭농사 특성상 일 년 내내 농사를 해야 한다. 제주 사람들은 필요한 만큼만 농사를 통해 얻었고 부족한 부분은 들에서, 바다에서, 산에서 얻었다. 물론 한겨울에는 먹거리가 부족하여 애를 먹기도 했다. 하지만 온화한 기후와 섬이라는 특성상 겨울에도 푸른 채소를 얻을 수 있다는 선물을 받았다. 또한 섬이기 때문에 바다에서 나는 선물도 일 년 내내 얻을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제주 사람들은 일 년 내내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그런 움직임 속에 주기적이고 일정한 쉼을 정해 두지도 않는다. 그들에게는 쉬는 날은 오로지 비 오는 날, 궂은날이다.
이러한 이유로 친지들과도 자주 모여 밥 한 끼 나누며 서로의 안부를 물을 수 있는 날도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제주 사람들에게 '먹으러 가게'라는 표현은 단지 음식을 먹는 행위 자체에만 그 중요함을 두지 않는다. 바로 가족과 친지, 소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바로 이 '먹는날'을 통해 표현되는 것뿐이다. 그래서 정월멩질이야말로 한 해에 온 가족이 함께 모일 수 있는 새해의 약속된 첫날이자 시기적으로는 농한기이다. 즉 제주에서 가장 여유로운 시기에 맞이하는 명절이자 친지와 지인들을 만나며 안부를 물을 수 있는 기쁜 날이 아닌가 싶다.
농한기인 정월멩질은 확실히 음식을 준비할 시간이 넉넉하기 때문에 풍족하고 다양한 종류를 준비한다. 이는 특히 고슬(가을)멩질, 즉 추석의 명절차례상과 비교해보아도 알 수 있는데 일단 추석에 올라가는 떡의 가짓수에 비해 설날의 떡의 가짓수가 훨씬 많다. 이는 좀 더 정성으로 떡을 만들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가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떡은 침떡, 은절미, 세미떡, 곤떡(송편), 고달떡(기름떡), 솔변, 절변, 빙떡(정기떡) 등을 만든다.
제주에서는 쌀을 가루내어 떡을 만들어 먹는 것이 사치라고 생각할 정도로 귀했는데 정월멩질 만큼은 이런 사치가 허용되는 유일한 날이기도 하다. 대부분 은절미와 세미떡만 메밀로 만들고 나머지는 흰쌀로 만든다. 제주향토음식 제1호 명인인 김지순 선생님에 따르면 침떡(제펜이라고도 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시루떡)은 땅을, 네모난 모양의 은절미(메밀로 사각형 모양으로 만든 떡)는 밭을, 동그란 모양의 절변은 해(멥쌀을 동그란 떡틀로 찍어 삶은 떡)를, 반달 보양의 솔변(멥쌀을 반달 모양의 떡틀로 찍어 삶은 떡)은 달을, 고달떡(기름떡, 멥쌀이나 찹쌀을 별 모양 틀로 찍어 지지는 떡)은 별을 의미하며 이를 차례로 쌓는다고 했다.
물론 지역마다, 집집마다 떡의 명칭이 조금씩 다르고 올리는 떡의 종류도 조금씩 다르다는 특이함을 갖는다. 그래서 처음에 책으로만 제주의 떡을 공부했을 때 나도 역시 많이 헷갈리기도 했다. 같은 떡 같은데 어르신마다 명칭이 다르기도 했고, 그 외에 올리는 떡도, 빠지는 떡도 집집마다 달랐다.
분명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제주의 명절 떡이 육지의 명절 고임떡하고는 그 모양과 맛이 확연히 다르다는 점이다. 육지부에서는 화려한 맛과 모양을 위해 다양한 부재료를 넣어 만드는 것과 달리 제주는 메밀, 쌀 원물 그대로의 맛을 살려 담백하게 만든다. 소금도 넣지 않는 곳도 있다.. 아마 신인공식(神人共食), 즉 신과 사람이 함께 먹는 음식이라 생각하는 듯하다.
또한 육지부에서는 침떡, 치대는 떡, 지지는 떡 등 다양한 방법으로 만든다면 제주의 떡은 침떡(찌는떡)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 물떡, 즉 삶은 떡이라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그 떡 삶은 물 또한 허투루 버리지 않고 다시 사용했다고 하니 제주 사람들에게 식수가 얼마나 중요했는지 유추해 볼 수 있다.
가문 잔칫날은 접시에 고기, 순대, 두부를 똑같이 나누어 나눠주었던 괴깃반, 식게날에는 제사 퇴물을 똑같이 나누어 배급했던 식게반을 받았다면, 멩질날은 떡반을 받는다. 흰 쌀로 만든 담백한 떡과 과일, 적이 똑같이 담긴 떡반을 누구나 공평하게 한 개씩 받는다. 여기서 말하는 '반'은 제주에서는 접시를 뜻한다.
이는 큰 낭도고리(나무사발)에 밥을 떠서 함께 그 밥을 먹는 낭푼밥상을 일상식으로 먹는 제주 사람들에게 이날만큼은 나만을 위한 특별하고 선물 같은 내 몫의 '한 접시' 음식이 주어지는 문화임을 뜻한다.
그리고 제주, 즉 상에 올리는 술도 추석보다는 더욱 다채로워진다. 정월멩질이 술을 빚기 좋은 계절인 겨울이기 때문에 그러하기도 하겠지만 정월멩질에는 여유 있는 시기이기 때문에 오메기술도 정성으로 준비하고 상에 올린 골감주(제주에서는 엿기름을 감주라고 한다. 차조밥에 엿기름을 넣어 삭혀 만든 식혜)도 꼭 만든다. 그리고 고소리술도 준비하기도 하며 다양한 제주(祭酒)가 두루두루 쓰인다. 추석에 보관기간이 길어 미리 장만해 둘 수 있는 고소리술을 주로 쓰는 것과 비교된다. 이렇게 다양한 술을 마련해 두는 것도 정월멩질이 고슬(가을)멩질보다 세배하러 오고 가는 사람들의 왕래가 훨씬 많기 때문이란다.
물론 지금은 거의 대부분 희석식 소주로 대체되어 예전의 그 술들을 만나기가 어려워졌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꼭 골감주는 만들어 올리는 집은 꽤 있다.
이 외에도 곤밥(쌀밥)과 옥돔이나 붉바리를 넣어 만든 갱(국)처럼 평소에는 귀해서 볼 수 없었던 음식들도 준비된다. 메밀이 많았던 지역에서는 메밀묵을, 그러지 않은 지역에서는 두부를 적으로 만들고 어적, 육적, 탕쉬라 불리는 숙채, 과일도 준비한다. 현대사회로 넘어오면서 조금씩 멩질음식이 변화하였지만 가장 큰 변화를 보인 음식이 바로 떡과 술이 아닐까 싶다.
제주의 정월멩질은 비단 죽은 자들과 산 자들만의 날은 아닌 것 같다. 가택 신인 문전제나 조왕제를 지내는 집도 여전히 많이 남아있다. 육지사람들이 가장 신기하고 재미있게 생각하는 소상인데, 조상이 아닌 다른 신을 위한 상을 명절날 함께 올린다는 부분이 독특해 보이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제주인들은 늘 신들과 함께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점을 바로 정월멩질 날 다시 환기시켜 준다.
문전 앞에 좌정한 문전신을 위한 문전상, 부엌(정지)에 좌정한 조왕신을 위한 조왕상도 함께 준비한다. 문전상과 조왕상은 한 해 동안 집안에 별 탈없이 좋은 일만 가득하길 바라며 올리는 제주만의 멩질상이다. 멩질차례상을 남성들이 주도한다면 문전상이나 조왕상은 여성들이 주도하는 상이다. 유교적 제의와 무속적 제의가 함께 어우러져 있는 제주의 멩질아침 모습이다.
진성기 선생님의 남국의 향토음식에 의하면 '굅시한다'. 즉 걸명이라는 제물을 진설하는 잡식은 제물을 정(正)한 물에 조금씩 떼어 넣어 지붕이나 올레(마을 골목) 어귀담에 던지는 행위이다. 이는 명절에 온 선령의 뒤에 따라온 군졸들의 몫으로 대접하거나 그 집의 올래직이 몫으로 대접하는 잡식 문화이다. 지붕과 올래 어귓담에 던져두면 이튿날 까마귀가 날아와 다 쪼아 먹는다고 한다. 그래서 제주 사람들은 까마귀를 영혼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 같다. '가메기 모른 식게 없주(까마귀 모르는 제사 없다)'라는 말이 괜히 나온 말은 아닌 듯하다.
마치 애니메이션 코코에서 죽은 자 들의 영혼의 안내자로 나오는 환상의 동물인 ‘알레브리헤’와 오버랩된다. 실제 멕시코에서 창작된 동물인 ‘알레브리헤’는 나쁜 기운을 몰아내고 가정을 보호해 준다고 믿는다.
의례 간소화 시책이 실시 전인 70년대 초까지는 새벽 3시에 일어나 떡국제도 지냈었고, 세배하러 온 사람들에게 메밀칼국도 많이 대접했었다. 이러한 설날 문화는 이제 거의 사라져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다.
그렇지만 모처럼의 정월멩질에는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인사하느라 멩질날 하루로는 부족했다. 며칠 동안 찾아다니며 인사를 해야 했고, 어린아이들의 세뱃돈 주머니도 두둑해지며 행복해하는 날이었다. 물론 아이들은 과식으로, 어른들은 과음으로 몸은 비록 힘들었지만 마음은 늘 행복했고 풍요로웠고 따뜻했다.
올해는 이러한 정월멩질의 모습을 다음 해로 기약해야 하는 아쉬움이 있다. 하지만 내년 정월멩질은 모든 집안사람들이 한 공간에 모여 지나간 시간들을 웃으며 서로 다독이며, 잘 견뎌왔다고 웃음꽃 피우며 이야기 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이 글은 <제주의 소리> "제주댁, 정지에書" 에 연재되는 글과 일러스트입니다.
@jeju_cookinglife
오늘도 제주댁 : 제주 음식을 공부하는 제주 토박이 워킹맘
@iroiro.one
이로이로 : 제주도 작은 마을 작은 공방에서 그리고 쓰는 일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