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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도제주댁 Mar 12. 2021

제주의 감저, 그리고 절간고구마

제주 물고구마가 그립다

진경아, 빼떼기 가루로  만들어 , 대박 날  같아. 모슬포에서 빼떼기 가루  보내줘?”


2016년 1월의 어느 토요일, 셋째 외숙모가 나에게 말했다.


2007년 8월부터 2015년 2월까지, 평범한 직장을 다니고 있던 나는 그 시기에 떡에 푹 빠져 살았었다. 주말마다 전국의 맛있는 떡집을 찾아다녔고, 서울의 유명하다고 소문난 떡 카페 모두 찾아다녔다. 그중 맛있게 먹었던 떡은 인터넷과 책을 보며 만들면서 주위 사람들과 나누었다. 인터넷과 책을 보며 만든 나의 떡을 맛있게 먹어준 후 오는 피드백에 행복함을 느꼈다. 그 행복이 너무나 커서일까, 잘 다니던 직장을 2015년 퇴사하고 2016년 1월, 나는 그렇게 회사원에서 자영업자 떡집 사장님이 되어 있었다.


빼때기 떡은 셋째 외숙모의 아이디어였는데, 나는 사실 그 당시 외숙모의 제안에 시큰둥했다. 왜냐하면 내가 중ㆍ고등학생 시절 제일 싫어하는 음식 중 하나가 엄마가 모슬포에서 종종 가지고 오셨던 그 커다랗고 속이 허연, 물컹물컹하고 단맛도 별로 없는 물고구마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외숙모의 빼때기 떡 아이디어에 건성으로 보내주시면 한번 만들어 보겠노라고 대답을 하고는 빼때기는 그 날 이후 내 기억 저장고 속 아주 깊은 곳에 꼭꼭 숨겨두었다.


“아이, 엄마. 모슬포에서 가지고 온 물고구마 말고 밤고구마 쪄 주면 안 돼요?”


철없던 나는 엄마가 왜 이 맛없는 물고구마만 가지고 와서 쪄 주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물론 친정엄마는 나의 이 볼멘소리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 고구마에 새우리 김치를 얹어서 먹으면 얼마나 맛있는지 아냐며 물고구마 위에 새우리 김치 한 점 올려 내미셨다.


, 물론 물고구마와 새우리 김치의 조합은 정말 훌륭하다. 볼멘소리가 다시  들어갈 정도로 대정 모슬포에서 넘어온 허옇고 커다랗고 물컹물컹하며  맛이 별로 없는 고구마는 유독 새우리 김치와  환상궁합을 자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내가 원했던 고구마는 물고구마가 아닌 노랗고 단단하며 단맛이 도는, 굳이 김치를 곁들이지 않고 먹어도 너무나 맛있는 밤고구마였다


서귀포시 대정읍 산방산 부근 밭에서 고구마를 기계로 썰어 말리는 작업이 한창인 모습. 하얗게 말린 고구마는 주로 주정의 원료로 쓰여졌다. 출처=제주도청

물론 당시 친정엄마가 가지고  고구마는  오신 것이 아닌 얻어  고구마라는 것도, 당시 밤고구마가 흔하지 않았다는 것도 당연히 모르고 있었다. 가끔 먹었던 노랗고 단단한 밤고구마를 호호 불어가며 맛있게 먹었던 순간이 너무 황홀해서였는지, 그래서 매번 엄마가 들고 오셨던 물고구마를 보면서 시시하다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물고구마는 점점 우리 집에 들어오는 횟수가 줄더니 언젠가부터 자취를 감춰버렸다. 하지만 나는 전혀 섭섭하지 않았다. 물고구마 대신에 밤고구마가 더 자주 우리 집 식탁 위에 올려졌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미 세상은 자고 일어나 보면 너무나 맛있는 음식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던 시기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제주음식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할 즈음인 2017, 제주 향토음식책을 걷어보다 “절간고구마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절간고구마 “빼때기인데 이는 내가 어렸을  싫어했던  물고구마를 얇게 편으로 썰어 말린 것을 의미하는 제주 음식 명사이다. 어느 구술 자료집에 보니 고구마를 말려 절에 갖다 주면 돈으로 바꿔 주었기 때문에 절간고구마라고도 불렸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사전적 의미는 얇게 썰어서 볕에 말린 고구마를 두고 절간(切干)고구마라 한다. 절간의 ()자는 ‘마를 자로도 읽고 ‘방패 자로도 읽는다.



감저뻿데기솖음(절간고구마찜) 만드는 법. 출처=제주인의지혜와 맛 전통향토음식(2015, (주)휴먼컬처아이랑).



그런데 아쉽게도 나는 빼때기를 먹어본 기억이 없다. 물론 외가에서 봤었던 적은 있었다. 하지만 백년손님 서울 사위가 오는 날, 외할머니는 빼때기를 음식으로 꺼내 놓을 리 만무했다. 해녀였던 외할머니는 전복, 소라, 해삼, 성게, 옥돔과 같이 귀한 음식만 꺼내 두셨고 그래서인지 나는 마치 새침데기 서울 아이처럼 빼때기를 먹으려고도, 쳐다보는 척도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제야  절간고구마라고도 불리는 제주향토음식 “빼때기 진짜 맛이 너무 궁금해졌다. 그래서 친정엄마한테 전화를 걸어 빼때기를 구할  있냐고 물어보았다. 물론 친정엄마는 빼때기를 구하는 것도, 만드는 것도 어렵지 않다 하셨다. 하지만 옛날  빼때기 맛은 지금은 어렵다고 했다.  이유인즉슨, 내가 싫어했던  물고구마를 이제 거의 재배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란다. 밤고구마로 빼때기를 만들 수는 있지만, 물고구마를 빼때기로 만들었을 때와는  맛이 다를 거라 하셨다. 허탈했다.


아니 엄마, 근데  고구마를 감자라고 ? 감자는 따로 있는데?”


엄마를 비롯한 제주의 어른들이 고구마를 고구마라고 부르지 않고 감자(정확히 말하면 감저)라고 불러서 어렸을 때 영 헷갈렸던 적이 한두 번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알다시피 우리나라에 고구마가 들어온 경위는 조선 후기 문신이었던 조엄이 1763 통신사로 대마도를 다녀오면서 ‘고귀위마 불리는 종자를 가지고 영도와 제주도에 재배를 했다. 명나라 이시진의 의학 백과사전 『본초강목(本草綱目)(1590) 감저(甘藷) 대한 기록이 있는 것을 보아 중국에서도 오래전부터 고구마를 재배했다고 본다. 그런데 제주도와 영도는 고구마보다는 감저로  많이 불린다. 아마 조엄이 처음 고구마를 가지고 왔을 때부터 영도와 제주도에서 고구마보다 감저라는 이름으로  많이 불렸던 것은 아닐까? 혹은 따뜻한 기후에서 재배되는 고구마의 특성상 감저의 한문  그대로,  감자. 제주도와 남부지역에서 나는 단맛이 나는 감자라는 의미로 감저라고 불렸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래서 오히려 한국에서 고구마라는 통용되어 불리는 단어는 일본 대마도 지역에서 고구마를 부르는 방언인 ‘고귀위마에서 들어온 외래어다.



조엄이 고구마 종자를 가지고 오면서 해사일기에 고구마를 “감저”, “고귀위마”로 기록하며 농법과 보관법도 기록해 두었지만, 그것으로만 조선에 고구마를 정착시키기에는 쉽지는 않았던 듯싶다. 그 이후 실학자들에 의해서도 지속적인 고구마재배 노력을 했지만, 대량재배로 이어지지는 않아 구황작물의 역할로서 조선시대에 크게 도움을 주지는 못했었다. 오히려 일제강점기 이후에 일본인들이 조선으로 들어오면서 고구마 재배기술이 함께 들어와 본격적인 고구마 대량생산이 가능해졌다.


가파도에 있는 개경기념비. 사진=김진경.



그런데 가파도에 개경 기념비에는 주목할 만한 글이 써져 있다. 1886 을유년 일본 잠수기선업자 일행이 가파도에 고구마 종자를 가지고  재배를 했고  재배법을 전수받아 마을 유지를 중심으로 근세 제주도 고구마재배를 장려했다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일제강점기 이전 가파도를 중심으로  대정지역은 이미 고구마 대량생산 기술력이 어느 정도 보급되지 않았을까?라는 추측도 조심스레  본다. 그래서 다른 지역보다 유독 대정지역에서 고구마 재배와 가공이 빨리 자리 잡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일제강점기 이후에 제주도는 고구마의 최대 생산지가 된다. 아마 본격적인 대량재배기술을 일본인들이 제주로 정착시켜서인 듯싶다. 또한 고구마 재배와 함께 고구마 주정공장, 전분공장들도 함께 세워졌다. 일본인들은 고구마를 이용하여 주정을 제조하여 제2차 세계대전에 화학원료로 사용했다. 그리고 고구마로 전분을 제조, 판매한 후 막대한 이윤을 챙겼다. 공장에서는 고구마 원물보다는 빼때기를 더 선호했다. 아무래도 보관도 고구마보다는 빼때기가 훨씬 나았고, 제조공정도 더 편리하고 경제적이었다. 그래서 제주에서는 꽤 많은 고구마 공장들이 세워졌었다. 그리고 각 마을에서는 빼때기 공출량도 정해져 있어 정해진 만큼 빼때기를 만들어 공출하는 것도 큰 노역 중 하나였다.


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제주에 있던 일본인들은 바로 본국으로 돌아갔다. 물론 제주 사람들에게 남기고 간 것은 하나도 없었다. 제조기술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음은 물론이거니와 남은 원물이나 제조된 가공품도 불태워버리고 가 버렸다. 다행히 제주사람들은 어깨너머 보고 배운 기술과 농법으로 제주의 고구마 산업을 이어나갔다. 1970년대까지 제주도에서 고구마는 제주사람들의 주요한 작물이었다. 하지만 곧 그 고구마도 값싼 수입산 원물들로 대체되거나 88년 수입 개방된 당면 완제품에 경쟁력에서 밀려 1990년 급격한 하락세를 겪더니 결국 제주에서 고구마 식품산업은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그래도 가장 최근까지도 제주 사람들의 기억에 고구마 빼때기는 먹을 것이 없었던 시절 정말 맛있는 간식이자 주식이자 생계를 이어나가기 위한 중요한 음식이었다. 빼때기를 당원 넣은 물에 푹 삶아 먹으면 그렇게 맛있을 수 없었다며, 물론 당원 맛이었겠지만, 그땐 그 삶은 빼때기가 얼마나 맛있었는 줄 아냐며 회고하신다. 그렇게 삶은 빼때기를 간식이 아닌 주식으로 드셨다고 하니 우리가 생각하는 고구마와 어르신들이 생각하는 고구마는 꽤나 다른 의미일 것이다. 전분공장에서 고구마 전분을 사서 조배기와 범벅, 돌레떡 등을 해서 먹었다고 한다. 먹을게 너무 없었을 때에는 감저쭈시(고구마 빼때기를 전분으로 만들고 남은 찌꺼기)를 공장에서 얻어 와 삶아 먹기도 했었다.


작년 한경면 저지리 마을 입구 폭낭(팽나무) 아래에서 만났던 어르신은 지금 가장 먹고 싶은 음식으로 고구마 빼때기죽을 꼽으셨다. 놀랍게도 친정엄마랑 같은 이야기를 했는데 지금 나오는 고구마로 빼때기를 만들어서 죽을 만들어 먹으면  옛날 맛이 아니라고 했다. 여기에  한 줌 넣어 만들어 먹은 빼때기죽이 당시에는 그렇게 맛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던 음식이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죽기 전에    먹어보았으면 하는 음식이 빼때기죽이라고 말씀하시는데 괜스레 눈물이 났다.  80 어르신도 나도 이제  이상 제주에서 물고구마를 쉽게 구할  없다는 사실에 눈물이  것인지 골목에서 처음 보는  제주 어르신과 제주 청년인 나의 마지막 연결고리가 빼때기여서 그랬던 것인지는 모르겠다.


올해는 그 물고구마를 꼭 공수해 보리라. 볕에 잘 말려 곱게 빻아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빼때기떡을 만들어 동네 어르신들에게 함께 나누어 먹고 싶다. 이로이로


970년대 감귤산업이 본격화되면서 제주의 주요 농업작물인 고구마, 아니 엄밀히 말하면 물고구마는 그렇게 제주의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역사의 마지막 편에 82년생인 내가  있었다.  세대는 그저 밤고구마의 맛에 밀려 맛없는 촌에서 가지고  고구마 정도의 기억이었지만 30년대~60년대생 에게는 나와 우리 가족의 삶과 촘촘하게 얽혀있는 고구마였다.


그래도 아직도 제주에 물고구마를 재배하는   되는 곳이 있다는 소식이 들었다. 올해는  물고구마를  공수해 보리라. 볕에  말려 곱게 빻아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빼때기떡을 만들어 동네 어르신들에게 함께 나누어 먹고 싶다. 여전히 단단히  자리에 계셔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글은 <제주의 소리> "제주댁, 정지에書"  연재되는 글과 일러스트입니다.

@jeju_cookinglife

오늘도 제주댁 : 제주 음식을 공부하는 제주토박이 워킹맘

@iroiro.one

이로이로 : 제주도 작은 마을 작은 공방에서 그리고 쓰는 일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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