풋마늘대 장아찌, 김치보다 더 사랑한 제주사람들의 반찬
지금으로부터 8년 전, 첫 아이를 임신하고 임신으로 인한 몸의 변화에 적응을 하지 못했던 때가 있었다. 나름 미식가라고 자부했던 나는 아무것도 입에 댈 수 없는 이른바 먹고 토하는 입덧을 하기 시작했고 임신 5개월까지도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했다.
그렇게 맛있게 먹었던 친정엄마의 밥상을 받는 것도, 평소에 좋아하던 외식도 나에게는 모두 어려운 일이 되어 버렸다. 물도 잘 넘기지 못해 이온음료와 사탕으로 힘들게 내 몸의 변화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가장 원초적인 욕구인 식욕이 충족되지 못하면 삶의 의욕도 없어진다는 사실도 온몸으로 체감하게 되었다.
입덧의 절정기였던 여름, 일을 마치고 파김치가 되어 집에 돌아왔다. 냉장고 냄새조차 너무 힘들어 냉장고 열기가 두려웠지만 뭐라도 먹지 않으면 곧 쓰러질 것 같아 코를 막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 그 순간 내 눈에 들어온 네모난 반찬통. 그 반찬통 안에는 친정엄마가 보내주신 마농지가 들어 있었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뚜껑을 열어 마농지 하나를 얼른 입으로 넣었다. 아삭함과 적당한 짭조름함과 달콤함, 새콤함이 어우러진 시원한 마농지 하나는 서걱거리는 모래알이 잔뜩 들어있는 것 같던 나의 입안을 순식간에 달래주었다. 나는 거의 넉 달 만에 밥솥을 열어 뜨거운 흰밥을 한 사발 펐다. 그리고 마농지를 한 국자 가득 접시에 담고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흰밥에 마농지를 올려놓고 밥 한 그릇을 금세 비워냈다.
몇 달 동안 사막만 걷고 있던 중 시원한 물과 달콤한 나무 열매가 가득한 오아시스를 만난 기분이랄까, 마농지에 대한 나의 강렬한 추억은 이렇게 갈무리되었다.
한국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겨울의 초입에 들어서면 집안의 큰 행사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김장을 하기 시작한다. 적게는 50여 포기에서 많으면 500포기까지, 각각의 집안의 식구수와 사정에 따라 김장의 규모는 다르다. 제주에 내려와 정착했던 나의 지인들도 김장철이 돌아오면 김장하러 고향으로, 부모님 댁으로 갔다. 나는 그런 지인들의 모습이 무척 흥미롭게 느껴졌다. 물론 우리 집도 김치를 하지만 친정엄마는 늘 5인 가족이었던 우리 집 규모에 맞추어 10포기 이상 배추를 절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겨우내 먹을 양의 김치를 담그는 육지의 김장문화를 들었을 때는 놀라울 뿐이었다. 그렇게 겨울에 담근 김치는 따뜻한 봄이 돌아오고 푸른 채소가 날 때까지 그 집의 식탁에 올라간다. 김치는 늘 식탁 한 부분을 차지했고, 김치를 활용한 다양한 요리는 일 년 내내 한국인의 밥상에 올라온다. 김치찌개, 김치볶음밥, 김치부침개, 김치전, 묵은지 김치찜, 김치김밥 등등 김치를 활용하여 일 년 내내 먹는 음식들은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그렇게 겨우내 소비할 김치의 양을 계산하여 초겨울 온 가족이 함께 만나 몇 백 포기 씩 담그는 것이 한국의 김장문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앞서 언급했듯이 제주 사람인 나에게는 이렇게 몇 백 포기 씩 김치를 담그는 모습이 영 낯설다. 엄마는 그때그때 김치를 조금씩 만들었다. 부추가 나올 땐 새우리김치, 동지가 나오면 동지김치, 무가 실할 땐 깍두기, 쪽파가 나올 땐 패마농김치, 오이가 맛있을 때는 오이소박이 등 그때그때 맛있는 김치를 조금씩 해서 먹었다. 생각해 보니 우리집에는 묵은지가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육지의 김장문화처럼 일 년 동안 먹을 양을 생각해 둔 후 만드는 제주음식이 있었다.
바로 마농지!!
제주 서쪽지역을 중심으로 마늘이 많이 재배된다. 특히 요즘 같은 봄이 되면 대정지역을 다니다 보면 마늘밭이 가장 흔하게 눈에 띈다. 이렇게 재배된 마늘은 알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마늘의 알은 대체로 앙념용으로 사용하고 마늘 줄기는 나물로 먹는다. 그리고 어쩌면 제주사람들이 마늘에서 가장 주인공이라고 여길 수 있는 “풋마늘대”로는 일 년 내내 두고 먹을 마농지를 담근다.
일부 지역에서는 마늘대를 콥대산이(혹은 콥대사니)라고도 부른다. 풋마늘대를 콥대산이라고 하는지, 마늘잎과 마늘대, 마늘알을 통틀어서 콥대산이라고 하는지는 어른들마다 조금씩 그 설명이 다르시다. 아무튼 콥대산이라고 부르는 이 마늘은 지금 제주의 봄철에 만날 수 있는 식재료이다.
참고로 국립국어원에서 펴낸 <우리말샘>에 의하면 “콥대산이”(콥大蒜이)는 마늘의 제주말이다. 한자 蒜은 “마늘 산” 자인데, 중국어 '대산'(大蒜)은 마늘을 뜻한다. 우리가 아는 마늘이 아닌 산마늘, 즉 엄연히 말하면 달래라고 한다. '콥'은 속껍질에 싸인 마늘 등의 알맹이(인경)을 뜻하는 제주말이다.
이렇게 '콥' + '대산'에 '이'가 붙은 말이기에 표기도 '콥대사니'가 아니라, "콥대산이"로 하는 것이 맞다고 국립국어원은 밝혀두었다.
마농지라고 해서 마늘의 제주말인 마농알을 이용한 장아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수도 있겠다. 그런데 제주에서는 주로 풋마늘대를 가지고 장아찌를 많이 만든다. 제주에서는 보통 마농지라는 단어가 일반화되었지만 콥대산이지라고 부르는 지역도 있다. 육지의 풋마늘대의 굵기보다는 훨씬 굵은 것이 제주의 풋마늘대의 특징인데, 그래서 제주의 마농지는 육지의 풋마늘대 장아찌보다 굵직하다. 완전히 여물지 않은 풋마늘대를 2~3cm길이로 썰어 장아찌를 담그는데 어르신들이 장아찌를 담그는 것을 보면 그 양이 한 철 먹고 끝낼 정도가 아니다. 거의 일 년 내내 두고 먹을 정도를 마련하신다. 마늘대를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장아찌를 담그는 모습을 보면 마치 육지의 김장을 하는 연상시킨다.
육지의 김장은 겨울을 맞이하여 하지만, 제주의 마농지 작업은 봄을 알리는 시기에 한다.
일 년 동안 먹을 마농지를 잘 숙성시켜 두면 그대로 맛있는 밥반찬이 되지만 제주 요리에도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다. 생선조림이나 돼지고기 볶음 요리에 마농지를 함께 넣어 볶으면 그 맛과 식감의 조화롭다. 이 때 사용되는 마농지는 양념의 재료로 사용이 된다,
입맛 없는 날 싱그러운 쌈채소에 젓갈이나 된장 올려놓고 마농지 하나 톡 얹어서 먹으면 밥도둑이 따로 없다. 어르신들은 입맛이 없는 한여름에 밥에 물을 말아 다른 반찬 없이 마농지 하나만 꺼내 밥 위에 올려서 먹으면 더위에 혼미했던 정신이 돌아온다고 하셨다. 친정엄마는 옛날 해녀셨던 외할머니가 오분자기를 주면 그 오분자기로 죽을 쑤어 주셨는데, 그 죽과 함께 상에 올랐던 반찬은 당연히 마농지였다. 요즘은 돼지고기를 파는 식당에서 마농지를 찬으로 내는 곳이 꽤 많다. 돼지고기 구워 먹을 때 쌈에 마농지를 함께 곁들여 먹기는 제주 돼지고기 맛은 가히 일품이다.
제주에서는 집집마다 제각각의 방식으로 마농지를 먹는다. 그렇게 마농지는 제주 밥상의 한 켠을 묵묵히 지키고 있다.
일 년 내내 제주의 밥상에 빠지지 않고 올라오는 반찬은 단연코 김치가 아닌 마농지이다. 김치 없어도 밥을 먹을 순 있지만 마농지 없으면 밥상 한 켠이 허전한 느낌이 드는 것은 비단 나 뿐일까?
우리가 생각하기에 마늘은 입을 맵게 하고 텁텁하게 한다고 생각한다. 마늘을 먹은 뒤 입에서 풍기는 특유의 마늘향이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을까 걱정하기도 한다. 그런데 정말 신기하게도 마농지는 느끼하고 텁텁했던 입을 시원하게 갈무리해주고 상쾌하게 한다. 우리가 김치를 먹었을 때 받는 느낌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이렇게 다양하게 활용되는 제주의 마농지 활용법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객주리(쥐치)조림에 들어 간 마농지이다. 객주리에 양파정도만 넣고 심심하게 양념해서 넣어 졸이다가 마농지를 듬뿍 올려놓고 마저 졸인다. 마농지의 아삭아삭함이 그대로 살아 있으면서 생선조림 양념이 스며든 객주리마농지조림은 최고의 밥도둑이다.
그렇다면 다른 지역에서는 마농지, 즉 풋마늘장아찌가 생소한 음식일까?
물론 그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제주사람들처럼 항상 옆에 두고 다양하게 활용하여 먹는 정도까지는 아닌 것 같다. 주로 장아찌 반찬으로 먹거나 고기의 기름진 맛을 잡아주고 깔끔하게 마무리를 할 수 있기 때문에 고기를 구워 먹을 때 함께 곁들여 먹는 정도인 것 같다.
제주 사람들의 마농지 사랑을 가만히 관찰해보니 제주에서는 김치 담그는 것 보다 마농지 담그는 것이 더 중요한 의식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제주의 집 냉장고를 열어보면 김치는 떨어져 없어도 마농지가 없는 집은 거의 없다. “밥에 마농지만 있어도 밥 먹어진다”는 어른들의 이야기가 괜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집집마다 김치를 담그는 레시피가 조금씩 다르듯이 마농지 역시 집집마다 담그는 방법이 조금씩 다르다. 예전에는 집에서 담근 간장에 원당과 사이다를 조금 넣어 만들기도, 혹은 그 간장에 멜젓을 조금 넣어 담그는 집도 있었다. 지금은 방법이 더 다양해졌지만, 기본적으로 마농지는 간장물을 만들어 풋마늘대에 부어 숙성시키기만 하면 완성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물론 가장 기본적인 부분이기도 하지만) 장아찌 간장은 완전히 식힌 후에 마농지에 부어야 한다는 점이다. 친정엄마는 비법은 소금물이었는데, 마늘 특유의 알싸한 맛을 빼기 위해 소금을 조금 넣은 물에 풋마늘대를 담근 후에 장아찌를 만들면 좀 덜 매운 마농지를 만들 수 있다고 했다.
제주에서는 저장성을 좋게 하기 위해 절이거나 수분을 적게 하여 만든 반찬을 촐레라고 한다. 제주사람들은 부엌에서 시간을 들여 음식을 만들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저장성이 좋은 음식을 만들어 두고 먹는다. 젓갈이나 장아찌류를 주로 촐레라고 부른다. 마농지는 제주의 촐레를 대표하는 음식이라고 할 수 있다.
제주에서는 벼가 잘 자라지 않았기 때문에 쌀밥이 귀했다. 거친 잡곡밥을 주식으로 먹기 때문에 잘 넘어가지 않는 잡곡밥을 목으로 잘 넘기기 위하여 국 문화가 발달했다고 한다. 촐레 역시 잡곡밥을 잘 먹기 위한 촉진제 역할을 어느 정도 해낸 것 같다.
마농지는 마늘농사가 본격적으로 제주에 정착이 되고, 집집마다 간장을 어느 정도 소비 할 수 있을때 부터 만든 음식이라 생각된다. 그러면 지금과 같은 간장 마농지는 그렇게 긴 역사를 가진 제주전통음식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제주의 마늘 농업의 규모는 그 비중이 꽤 크다. 매년 생산된 마늘에 대한 이슈들이 제주사회의 현안으로 대두될 때, 나 또한 제주의 마늘이 보다 어떻게 상품성과 가격경쟁력을 가져야 할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된다.
어쩌면 제주에서 배추보다 마늘이 더 쉽게 구할 수 있었던 식재료였기 때문에 마늘대로도, 마늘알로도 마농지를 만들어 일 년 내내 만들어 먹었던 것은 아닐까 싶다. 물론, 제주 사람들은 알마늘로도 장아찌를 담가 먹는다. 하지만 알마농 장아찌보다는 풋마늘대로 만든 장아찌가 제주를 대표하는 ‘진짜 마농지’일 것이다.
제주의 봄, 제주의 여성들이 유난히 바빠 보인다. 일 년 치 제사와 차례상에 올릴 고사리 꺾으러도 가야 하고, 일 년 내내 우리 가족들이 먹을 마농지도 만들어야 하며, 이제 곧 수확할 보리, 콩 등도 일 년 치를 지혜롭게 계획하여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시장에 가 보니 풋마늘대는 이제 거의 끝물이라고 한다. 아직 늦지 않았다. 지금이 제주 촐레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마농지를 만들 수 있는 올해의 마지막 기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