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사람들이 4월의 비를 유난히 기다리는 이유
지난 목요일 오후부터 제주 전역에서 부슬부슬 비가 내렸다. 저녁때 즈음되니 나도 모르게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아이고, 내일 새벽에 고사리 꺾으러 가야 하는데!”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비단 나뿐이랴. 창밖으로 내리는 4월의 비를 바라보며 봄을 알리는 비에 대한 낭만보다는 이튿날 새벽 일찍 누구보다 먼저 가장 좋은 “고사리 꺾으래”가야 할 것만 같은 초조함과 긴장에 조마조마하다면, 그 사람들은 분명 제주의 고사리꾼이다.
4월, 비가 오는 날이면 친정엄마는 내리는 비를 쳐다보며 “아이고, 고사리 장마 왐쪄”라고 하셨다. 나는 20대까지도 4월의 비를 왜 고사리 장마라고 부르는지 몰랐다. 다만 추측하건대 내리는 비의 모양이 마치 고사리 줄기 같이 보여 고사리 장마라고 부르는가 보다 정도로 생각했었을 뿐이다. 고사리 장마와 고사리 꺾으러 가는 작업이 연결고리가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은 채, 친정엄마가 고사리 꺾으러 가자고 물어보면 어떻게든 핑계를 대서 도망치며 밖으로 친구들과 놀러 다녔다.
그런데 그 도망 다녔던 딸은 이제야 고사리 꺾기의 재미를 톡톡히 보고 있는 3년 차 새싹 고사리꾼이 되었다.
사람들이 3월 말부터 4월까지 내리는 이 비를 고사리 장마 혹은 고사리 비라고 부르는 이유는 따로 있다. 이 시기는 제주의 산과 들에서 고사리가 본격적으로 얼굴을 내밀기 시작하는 시기이다. 그런데 고사리를 채취하는 시기와 비는 무슨 관계일까? 고사리 채취 시기와 비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한다. 고사리꾼들의 제보에 의하면 고사리를 따기 가장 좋을 때는 비가 내리고 그친 어스름한 새벽이라고 것이 정설이다. 이때 비를 흠뻑 맞은 고사리는 하루 만에 키가 쑥 크고 통통해진다. 햇빛을 받으면 줄기가 억세 지면서 아기 주먹처럼 웅크린 잎이 펴지기 때문에 식용으로 먹기 애매하다. 그래서 비를 흠뻑 맞고 수분을 가득 머금어 통통하고 쑥 올라온 여린 고사리가 소위 말하는 “제라진 고사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제주의 어른들은 봄에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하던 일과 작업을 잠시나마 멈추고 “이 비 그치면 고사리 따러 가야 하는데...”라고 중얼거리시나 보다.
실제로 3월 말부터 제주를 다니다 보면 재미있는 몇 가지 현상들을 발견할 수 있다. 먼저 아무리 봐도 주변에 건물도, 관광지도, 오름도 없는 도로 갓길에 차들이 몇 대씩 세워져 있는 모습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모습들을 찾았다면 제주사람들은 암묵적으로 그 차가 세워진 곳과 멀지 않은 곳에 고사리밭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고사리 채집은 주로 오전에 이루어진다. 고사리가 햇빛을 받으면서 줄기가 억세고 잎이 펼쳐지는 것도 그렇거니와, 해가 아주 밝은 날이나 해가 중천에 올라오면 쨍한 햇빛에 고사리가 반사되어 고사리는 시야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그래서 소위 말하는 전문 고사리 채집인들은 동이 트기 직전부터 작업을 시작해 오전이 지나기 전에 끝낸다. 만일 오후에 고사리를 꺾으러 간다면 이미 고사리꾼들이 그날의 좋은 고사리는 이미 꺾고 남은 파치(?)들만 건지게 될 확률이 매우 높다.
그리고 등산객과 고사리꾼들의 모습은 전혀 다르다. 5년 전 즈음 고사리 채취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몰랐을 때 정말 호기심으로 고사리를 따러 무작정 산으로 올라간 적이 있었다. 고사리를 채집하는 분들을 발견하고 함께 고사리를 따려고 들로 본격적으로 들어가니 어른 한 분이 근심 걱정 가득한 얼굴로 나에게 말을 걸었다.
“아니 그렇게 발목 양말에 스니커즈 신고 고사리 꺾으러 오면 어떡하니? 큰일 나.”
알고 보니 고사리는 가시덤불 사이를 들어가야 하는 경우가 많기도 하고, 날이 좀 더 따뜻해지면 뱀들이 동면에서 깨나 다리 사이를 지나갈 수 있기 때문에 등산화와 종아리까지 올라오는 두꺼운 양말을 신어야 한단다. 아니면 아예 장화를 신고 와야 한다고 했다. 여기에 백반을 손수건에 감싸 옷 주머니에 넣거나 손목에 달아맨다거나, 방울을 가방이나 허리춤에 달아 뱀을 쫓는 옵션은 보다 더 안전하게 고사리를 꺾을 수 있다.
고사리를 충분히 담을 수 있는 가벼운 배낭과 고사리 앞치마는 필수이다. 고사리를 꺾고 어느 정도 고사리 다발이 한 손에 만들어졌다면 고사리 앞치마나 가방에 담는다. 고사리 앞치마 하단 부분에는 지퍼가 달려있어 아래 지퍼를 열어 한 번에 쉽게 가방으로 옮길 수 있다(물론 이 고사리 앞치마는 고사리를 꺾기 위한 용도로만 쓰이지는 않는다. 곧 다가올 매실철에도 두고두고 유용한 앞치마가 된다.).
고사리를 뿌리 가장 가까운 부분부터 만져 위로 쓸어 올라가다 보면 줄기가 연해지는 부분이 있다. 그 부분에서 손목의 스냅을 이용하여 꺾으면 경쾌한 “톡”소리와 고사리가 내 손안에 들어온다. 이 경쾌한 “톡”소리는 이상하리만치 쾌감과 즐거움을 준다. 그래서 사람들이 고사리를 따러 간다고 하기보다 “꺾으래 간다”라는 표현을 더 잘 사용하는 것 같다.
그런데 고사리꾼들 사이에서 절대 꺾어서는 안 되는 고사리가 있다. 바로 산담에 있는 고사리, 즉 무덤가에 있는 고사리는 꺾지 않는다. 그 이유에 대해서 몇몇 어르신들에게 여쭈었는데 고사리가 9번 정도 줄기를 꺾어도 올라오는 양치식물이기 때문에 무덤가에 있는 고사리는 그 무덤 주인의 자손 번창과 관련이 있다고 믿었다. 즉 산담의 고사리를 꺾으면 이 집안의 대가 끊어질 수 있다는 이유였고 두 번째는 죽은 자 근처에 있는 고사리에는 귀신의 기운이 쉽게 묻어날 수 있다고 이유에서 꺾지 않았다는 분도 계셨다.
그런데 앞에서 언급했던 것과 같이 고사리는 아홉 번 정도 올라온다. 처음 고사리 줄기를 꺾었다면 앞으로 8번 정도 고사리 줄기가 올라올 수 있다는 말이다. 물론 첫 번째 고사리가 가장 연하고 맛있다. 꺾으면 꺾을수록 다음 올라오는 고사리 줄기는 단단해지고 씁쓸함도 더 해진다. 그리고 브라켄톡신이라는 발암성 물질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고사리꾼들은 처음 꺾은 고사리가 가장 값을 잘 쳐준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고사리 시작철이고, 가장 먼저 고사리 꺾기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진정한 “고사리꾼”이라는 이야기다.
고사리의 맛이나 식감, 영양에 대해서는 논의할 이유도 없다 치더라도 고사리에는 브라켄톡신이라고 알려진 발암성 물질과 비타민 B1을 파괴하는 아노이리나아제가 들어있다. 그리고 특유의 쓴맛과 떫음도 있다. 그래서인지 소와 말들은 절대 생고사리는 먹지 않는단다.
이런 고사리는 단점들은 다행히 수용성 성분들인 데다가 열에 약해 물에 충분한 시간 동안 불려주고 삶아주면 그 문제가 해결된다. 고사리를 손으로 비벼 잎 부분은 떨어뜨리고 줄기만 사용한다. 말릴 용도의 고사리는 오랜 시간 동안 삶아 줄기 조직을 부드럽게 만든다. 말리지 않고 바로 냉동시킬 고사리는 너무 오래 삶으면 줄기가 다 해체되며 미끄덩거리기 때문에 적당히 삶아 냉동실로 들어간다. 이렇게 손질한 고사리는 일 년 동안 제주의 제사나 명절상에 쓰인다.
유독 고사리만큼은 마트나 시장의 고사리를 사서 사용하지 않고 내 손으로 직접 꺾어 장만한 고사리를 쓰려는 제주의 어른들이 많은 이유를 고사리의 쓰임새를 보면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아마 고사리가 조상을 맞이하는 의례에서 중요한 의미였기 때문에 고사리에 정성을 들여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 식게(제사)나 차례에서 고사리 탕쉬는 없어서는 안 될 제물 중 하나이다. 그런데 뭐, 고사리 탕쉬는 꼭 제주만 올리는 제물은 아니다. 다른 지역에서도 고사리나물을 올리니까 제주만의 음식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런데 제주의 많은 집에서 제사나 명절 제의를 시작할 때 상 앞에 고사리 가닥을 올려놓는 것으로 시작하는 경우가 있다. 고사리가 조상을 맞이하는 제의의 시작을 알리는 셈이다. 또 보따리전 혹은 느르미전이라고 불리는 재미있는 음식이 있다. 고사리와 쪽파를 가지런히 넣고 그 위로 계란물을 부어 네모나게 지져내기도, 쪽파를 넣지 않고 고사리 한 줄기만 똬리 모양으로 만들어 계란물을 넣어 동그랗게 지지기도 한다. 제주 사람들은 이 보따리전에 조상님들이 제물을 싸서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제주의 모든 제사나 명절상에 이 전이 등장한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제주 사람들에게 고사리는 산 자와 돌아가신 자를 이어주는 하나의 매개체로 생각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제주의 고사리가 좋은 값을 쳐주기도 해서 이제는 고사리철만 되면 제물로 사용할 고사리를 꺾는 분 외에도 잘 말려 쏠쏠하게 꽤 짭짤한 용돈벌이를 하는 분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굳이 마트에서 사도 되는데 고사리철만 되면 꼭 고사리를 꺾어 장만하여 육지의 자식들한테 매년 보내는 어머님들은 이미 수도 없이 만났었다. 아예 고사리철에 맞춰 육지에서 제주로 내려오는 고사리꾼들도 있다. 이 시기를 위해 만들어진 “고사리계”도 있다. 동네를 걷다 보면 너도나도 고사리를 말리는 풍경 모두 제주의 봄에 만나볼 수 있는 제주의 모습이다.
제사나 명절에 돼지고기 적을 장만하면서 재단하여 남는 자투리 고기로는 고사리 또는 고사리탕쉬와 함께 볶아 고사리돼지고기지짐이라는 별미로 탄생한다. 돼지고기와 연하고 부드러운 고사리는 그 맛과 궁합이 훌륭하다. 지금처럼 식재료가 풍부한 시절이 아니었던 나의 윗세대 제주 어른들에게는 특별한 날에나 맛볼 수 있었던 음식이다.
작년 봄, 만난 노신사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제사 때 만든 탕쉬와 고기를 상애떡을 갈라 그 안에 끼워서 먹었다는 이야기를 해 주셨는데 마치 제주식 상애떡 샌드위치의 시초가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고향이 어디신지 여쭈었더니 조천읍 신촌사람이라 했다. 물론 제주의 모든 지역에서 이렇게 먹은 것은 아닐 수도 있다. 혹은 그 노신사댁에서만 그렇게 먹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음식을 먹는 방법과 방식의 다양성이 모여 제주의 문화를 설명해 주는 것이라 나는 믿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는 나에게는 보물 같은 제주 어른들의 이야기다. 실제로 내가 그 노신사를 만나기 훨씬 전부터 상애떡 메뉴를 개발할 때 속 재료로 고사리돼지고기 지짐을 넣은 샌드위치를 자주 만들었는데, 신기하게 전혀 함께 먹었을 때 이질감이 없고 오히려 드셔 보신 분들이 모두 의외로 맛있다고 칭찬을 많이 해 주는 메뉴기도 하다. 이 노신사의 맛의 기억이 “고사리돼지고기지짐 상애떡샌드위치”의 맛의 흔적과 비슷해서일까? 요즘 내가 가장 좋아하는 내 레시피 중 하나이다.
나와 함께 제주 음식을 공부하고 있는 서른 살의 젊은이는 고사리 꺾기의 추억이 나보다 더 강렬하다. 나는 엄마가 고사리 꺾으러 가자고 하면 도망 다니느라 바빴는데 이 친구는 엄마 손에 이끌려 고사리밭에 자주 갔었다. 고사리를 꺾게 되면 고개를 숙여 땅만 보게 다니는데 갑자기 얼굴을 들어 보니 말 엉덩이가 바로 코앞에 있어 말 뒷발에 날아갈 뻔했었다는 아찔한 추억을 이야기하며 웃었던 적이 있었다.
제주 사람들 누구에게나 고사리에 대한 이야기가 심어져 있는 듯하다.
올해 좀 더 일찍 좋은 고사리를 꺾어 보겠노라고 이미 고사리밭에 한번 다녀왔었다. 3년 차 새내기 고사리꾼 뒤로 일흔 정도 되어 보이는 한 어르신께서 내 뒤를 계속 밟으시며 줄기가 실한 고사리를 꺾고 계셨다. 재야의 고수임이 분명하다고 판단한 나는 뒤를 돌아 어르신께 여쭤보았다.
“어르신, 고사리 꺾은 경력이 몇 년이나 되셨어요?”
“나?? 평생!!”
어르신이 단단하게 뱉어내 주신 “평생”이라는 단어에는 얼마나 많은 삶의 이야기와 의미가 담겨있을지 이제 마흔이 된 나는 전혀 상상할 수 없다. 그저 이런 어르신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고 같은 의미의 음식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 고마울 뿐이다.
무릇 지금 제주의 산과 들에는 고사리만 펼쳐져 있는 것은 아니다. 꿩마농 혹은 드릇마농이라 불리는 달래, 봄을 알리는 쑥, 두릅도 제주의 봄향기를 가득 채워주고 있다. 이 봄 향기들을 내 손 가득 올려보며 제주의 봄을 맞이해 보는 것은 어떨까? 이번 장에 고사리앞치마 하나 장만하여 제주의 산과 들로 나가 제주의 봄이 선사한 자연의 선물을 맞이해야겠다.
이 글은 <제주의 소리> "제주댁, 정지에書" 에 연재되는 글과 일러스트입니다.
@jeju_cookinglife
오늘도 제주댁 : 제주 음식을 공부하는 제주토박이 워킹맘
@iroiro.one
이로이로 : 제주도 작은 마을 작은 공방에서 그리고 쓰는 일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