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부엉씨 Mar 03. 2022

漆, 아시아를 칠하다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옻칠'이라는 공예 기법을 주제로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다. 평소 특별히 관심을 두고 있는 분야는 아니었지만 요즘 국중박을 자주 가는 김에 한 번 들러봤다.

사진=국립중앙박물관 페이스북

전시는 3월 20일까지 진행된다. 2주 남짓 남았다.


포스터에서 유독 이번 전시의 영문명이 눈길을 끌었는데, 바로 'Laequerware(s)'라는 단어를 태어나서 진짜 처음 봤기 때문이다. 뭐 내가 태어나서 처음 보는 게 한두 개이겠느냐마는... 아무튼 어떻게 읽어야 할지 감도 안 잡히는 이 단어는 '칠기'라는 뜻이라고.

티켓은 바깥에 있는 매표소에서 사가지고 들어와야 한다. 가격은 3000원으로 저렴한 편. 상설전시관 내부에 있는 특별전시실에서 진행된다.

전시실 내부에서 사진 촬영은 가능하지만 전시에 사용된 영상들의 저작권 문제 때문에 동영상은 못 찍는다고 한다.


아니나 다를까 티켓 확인하고 들어가면 가장 먼저 영상이 나온다. 요즘 전시는 웬만하면 다 영상으로 시작하나 보다.


영상은 옻나무와 옻나무 숲의 이미지를 보여주는데 왼쪽 사진에서 보이는 것처럼 직물에다가 영상을 쏴주는 모습이 있어 꽤 멋있고 신비로웠다. 한걸음 더 들어가면 같은 영상을 벽에다가도 틀어준다. 영상 자체를 감상하기엔 아무래도 후자 쪽이 더 편하다.

본격적으로 전시가 시작된다.


칠기라는 제작법은 상당히 생소한 것이 사실이다. 그 유명한 '나전칠기'가 대표적인 칠기의 한 종류라지만 그 화려한 장식과 아름다움은 익히 알고 있었음에도 그것을 '칠기'라는 분류로 바라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나전칠기는 이름부터 대놓고 '칠기'인데 좀 민망스럽긴 하네...;;


그러니까 1부에선 현대인들에게는 다소 낯선 칠기가 언제부터 어떻게 만들었는지 소개하면서 과거부터 칠기가 도자기, 금속과 함께 공예 문화의 중요한 축이었음을 보여준다.

생각한 것보다 칠기 사용의 역사가 오래되었다는 점이 놀라웠다. 왼쪽부터 광주 신창동 유적(삼한시대), 창원 다호리 유적(삼한시대, 붓이 나왔다는 그...?), 서울 석촌동 고분군(삼국시대 백제)에서 나온 칠기들이다.


중국의 경우엔 신석기 시대 유물 중에 옻칠이 사용된 것이 있을 정도라고 하니... 영 까다로운 것이 아닌 칠기 제작법을 그 옛날에 누가 어떻게 찾았나 싶다.

이후 점차 화려해지고 개성이 강해지는 칠기의 모습들이 보이고 중국, 일본 칠기와의 비교도 이어진다. 다양한 칠기 제작 기법들이 소개되니 설명문과 칠기의 실제 모습을 비교해가면서 감상을 이어가면 된다.


이 전시는 중간중간에 저렇게 별도의 방을 만들어 놓은 부분이 있다. 얼핏 보면 멋있어 보이기도 하지만 이게 돌아보다 보면 뭔가 좀 휑한 느낌이 든다. 전시된 칠기가 적은 것도 아닌데 뭔가 공간 활용이 비효율적인 느낌...

아시아 각국의 대표적인 칠기 제작 기법과 각각의 특징을 보여주는 칠기 제품 전시가 이어진다. 한국은 고려 시대부터 발달한 나전칠기들이 소개됨.


가짓수가 가장 많은 것은 아무래도 조선 시대에 만들어진 것들이고 고려 시대 작품은 별도 공간에 따로 전시되어 있다.

왼쪽 사진 가운데에 놓인 자그마한 '나전 대모 칠 국화 넝쿨무늬 합'은 이러한 형태의 칠기가 현재 전 세계에 단 세 점만 전해질 정도로 귀한 것이다. 생김새도 아주 오밀조밀 아름다웠다.


고려청자의 '비색'에 대한 찬사로 유명한 송나라 사신 서긍의 '고려도경'에서 고려의 나전 기법에 대해 '세밀하여 귀하다'(세밀가귀 細密可貴)고 평가했다는데 딱 맞는 말이구나 싶었다.*


다만 여기서도 좀 저걸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게 해줬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체적으로 기물이랑 관람객들이랑 거리가 좀 멀다 ;;


*“세밀가귀!”…0.3㎜ 극초정밀 예술에 중국이 열광했다 [이기환의 Hi-story], 경향신문, 이기환 역사스토리텔러 기자(링크)

이어서 중국의 조칠(옻칠 층을 겹겹이 쌓아 무늬를 조각하는 기법) 기법과 일본의 마키에(옻칠 위에 금은 가루를 뿌려 무늬를 표현하는 기법) 기법을 살펴볼 수 있는 칠기들이 다양하게 전시되어 있다. 중국제 칠기는 종류와 가짓수가 꽤 넉넉해서 보는 맛이 있었다.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칠기. 동남아시아 쪽은 한중일 삼국에 비해 칠기의 역사가 짧은 편이라고 한다.

동남아에서 칠기가 가장 활발하게 제작된다는 미얀마의 칠기 병풍이다. 요즘은 관광상품으로도 많이 제작 및 판매된다고 하네.


마야부인 옆구리에서 석가모니가 태어나는 모습인데 얼마 전에 '조선의 승려 장인' 전시에서 봤던 통도사 팔상도가 생각났다. 

마지막으로는 현대미술 작품들이 있다. 현대미술은 잘 모르지만 나름 느낌 있는 작품들이었다. 중간에 보이는 알록달록한 작품은 삼베에 옻칠한 작품이라고 해서 신기했다.


나쁘지 않은 전시였는데 더 좋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남았다. 대부분의 칠기 자체가 한쪽 벽에 쭉 진열된채로 관람객과 거리도 멀게 되어 있어서 입체적으로 세세하게 들여다보며 몰입하기가 힘들었다는 점이 가장 아쉬웠다. 공예품이 회화작품처럼 전시되어 있는 느낌이랄까.


딱 전시 초반에 '오 칠기라는 게 이런 거구나'하는 마음으로 두근두근하다가, 오히려 엄청 특이하고 화려한 칠기 작품들이 나올 때쯤엔 빵 터지는 맛 없이 미적지근하게 식어가는 느낌...? 그래도 뭐 그냥 다양한 나라의 칠기를 비교하면서 '이런 게 있습니다'하는 식으로 볼 만했었던 것 같다.


표현이나 연출면에서 최근 본 다른 전시만큼의 감동은 없었지만 화려하고 아름다운 칠기 공예품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직접 가서 보면 좋긴 하다. 시간이 되면 한 번 들러보길 권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화폐로 만나는 우크라이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