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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부엉씨 Mar 21. 2022

이내말삼 드러보소, 내방가사

국립한글박물관 기획전시

이쪽 오면 늘 국립중앙박물관 가기 바빠서 바로 옆에 있음에도 왠지 발걸음이 잘 안 가는 국립한글박물관. [이내말삼 드러보소, 내방가사]라는 기획전시가 진행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찾았다. 전시가 4월 10일까지 이뤄지니 대략 20일 정도 남은 셈... 더 일찍 왔어야 하는데 ㅠㅠ

아무튼 국립한글박물관은 올해 초 상설전시실을 다시 꾸며 여는 등 변화가 있었다. SNS 등을 살펴보면 재개관 한 상설전시실이 상당히 괜찮은 것 같아서 현재 코로나19 확산으로 중단된 야간개관(매주 토요일 및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만 재개되면 그 때 보러 와야지 했다.


그래도 관람을 위해 따로 예약이 필요하진 않아서 다행이었다.

전시는 3층 기획전시실에서 진행된다. 계단이 높은 정문(?)으로 들어오면 한 층만 올라와도 된다. 전시해설이 진행되는가 본데 평일 3시라서 나는 사실상 듣기 힘들 것 같다.


내방가사란 4음보의 운율로 시조와 다르게 무한히 길어질 수 있다. 4음보 이외에는 별다른 형식적 규칙이 없기 때문에, 한글을 아는 여성들은 쉽게 가사 창작을 할 수 있었다. 여성들이 창작한 가사를 내방가사 또는 규방가사라고 부른다.


내방가사의 장르적 특징. '4음절'은 그냥 네 글자라고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이걸 직접 부르는 걸 들어보면 감이 더 잘 오는데 전시 보는 중에 직접 들을 수 있으니 참고하자.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무한히 길어질 수 있다'는 것. 실제로 길이가 어마어마한 작품들을 볼 수 있다.

전시 첫머리에 남성이 쓴 상춘곡과 여성이 쓴 화전가가 전시되어 있다. 전시 일정이 12월 말~4월 초라서 봄을 다룬 가사를 내놓은 것 아닌가 싶다.


책자 형태로 생산된 상춘곡과 저렇게 기다란 종이 한 장에 적힌 화전가의 차이도 눈에 띄었던 부분이다. 모든 내방가사가 다 그런 것은 아닌 듯하지만 보통은 저렇게 생산되어 두루마리 형태로 보관된 것으로 보인다. 길이나 내방가사라는 장르를 둘러싼 경제, 사회적 여건 때문일 수도 있을 것 같다.

한 발자국 더 들어가면 본격적으로 전시가 시작된다. 전시 1부 제목은 "내방 안에서."


내방이라고 하면 요즘 말론 그냥 '안방'일 텐데, 과거 안방처럼 전시실을 꾸며놨다. 흰색 창호지의 색감도 신선했고 내방가사의 의미와 상당히 잘 어울리는 모습이라 시각적으로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전시실 가운데에 기다랗게 놓인 작품은 연안 이씨의 "쌍벽가"로 아들과 조카가 동시에 과거에 급제하자, 집안이 어려웠던 시절을 잘 이겨내고 자식을 훌륭하게 길러내기까지의 과정과 소회를 풀어놓았다.


작품 위에 현대 한글로 풀어놓은 해석이 있다. 비전공자라면 원문을 읽기가 너무나 어렵기 때문에 괜한 노력하지 말고 원본 작품의 서체나 모양새를 감상하되 애써 해석하려 하지 않는 편이 정신건강에 좋다. 사실 내방가사는 대개 흘림체로 작성되고 방언이 섞인 경우가 많아서 전공자들도 해석하기 쉽지 않다고 하더라.

이어 착한 행실과 부지런한 노력으로 부자가 된 여성의 이야기를 담은 "복선화음록"과, 혼인을 앞둔 딸에게 여러 훈계와 아쉬움, 결혼생활에 대한 축복 등 못다 한 이야기를 남기는 내방가사의 일종인 계녀가(戒女歌)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여기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전시품은 광복, 한국전쟁기에 쓴 딸아이 육아일기였다. 정서법이 현대와 가까워져 어느 정도 읽고 이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생활상이라든지 사회 환경에 대한 인식을 생생하게 볼 수 있고 아이에 대한 사랑도 듬뿍 느낄 수 있었다. 게다가 일기와 함께 그려 놓은 그림이 너무 귀엽고 예뻐서 하나하나 살펴보는 재미도 있다.


다만 이 육아일기도 내방가사로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이번 전시를 보다 보면 이런 부분이 종종 있긴 한데 그냥 딱 '내방가사'에 대한 전시라고 한정해서 보기보다는 내방가사를 중심으로 그 작가들(당시 여성)의 삶과 정서를 알아보는 전시라고 생각하면 크게 신경이 쓰이진 않을 것 같다.


이 외에도 1부에는 여성들의 다양한 상황과 감정을 살펴볼 수 있는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2부 "세상 밖으로"로 넘어가면 개화기 이후 사회 변화와 함께 여성들의 인식도 변화하는 모습이 전시된다. 여성들의 교육과 사회 참여가 늘어나고 그에 따라 문화적, 사회적으로 이전과는 다른 '신여성'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아직 전통적 사고를 고수하는 구여성의 비판적인 목소리도 눈여겨볼만했다.

이어서는 독립운동과 관련된 내방가사가 나온다. 고국을 떠나 만주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과정에서의 고달픔과 어려움, 고향에 대한 그리움 등이 담겨있다. 독립운동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더할 수 있는 부분이라는 생각이다.

이어 작은 별도 전시실에 최초의 여성 의병장 윤희순 의사의 이야기가 전시되어 있다. 내가 학교 다닐 때 국어/근현대사 시간에 못 배웠던 분인 것 같은데 검색을 해보니 요즘 친구들은 교과서에서 배우는가 보다. 아무튼 의병 모집이나 활동 독려를 위해 이 분이 지은 가사 등을 보면 나라를 빼앗긴 울분과 외세에 대한 강렬한 저항의지를 살펴볼 수 있어 가슴이 좀 벅차오르는 면이 있었다.


전시실 가운데에 배우 이성경 씨가 출연한 짤막한 영상이 나온다. 앉아서 관람하는 것도 가능하고 영상은 유튜브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마지막 3부 "소망을 담아"로 넘어간다.

3부는 앞부분과 비교했을 때 볼륨이 그리 크진 않다. 전시되어 있는 내용은 화전가, 헌수가, 그리고 지금도 내방가사를 짓고 있는 작가님들의 인터뷰 등이다. 한 주제로 쉽게 묶기 힘든 작품들이긴 하지만, 고민을 해보니 이 파트의 주제 의식은 '공감과 연대'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


특히 고달픈 일상에서 벗어나 일 년에 한 번 다른 여성들과 함께 봄꽃놀이를 나가는 '화전가' 관련해서는 화전놀이를 하는 여성을 비웃는 남성, 그리고 거기에 멋지게 받아치는 여성의 가사도 각각 전시되어 있어 생생한 모습을 보여준다. 화전놀이를 비웃었던 남성은 훗날 자신의 행동에 대해 '여성들이 부러웠기 때문에 그랬는데 되로 주고 말로 받았다'면서 그랬던 옛 시절이 그립다는 노래를 또 남긴다. 나름 시사점이 있는 훈훈하고 솔직한 마무리인 것 같다.

마지막은 지금도 활동 중이신 내방가사 작가님들의 인터뷰. 내방가사를 어떻게 접했고, 왜 쓰고 있으며, 내방가사가 이분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내방가사라는 낯선 장르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던 전시였으나 그보다 그것을 쓴 작가들의 삶과 희로애락에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참 좋은 전시라는 생각이 남았다. 과거, 그리고 어쩌면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는 여성들의 고통과 고민의 일부나마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멋진 조형이나 회화 없이 기다란 종이와 흘리듯 써 내려간 글씨에 매료되어 긴 시간을 집중할 수 있었던  이유도 그 때문인 것 같다.


한글로 적히고 또 빡빡하게 지켜야 할 양식이 없어서인지 작가의 진솔한 감정을 절절하게 느낄 수 있다는 점도 특징이었다. 체면 차리지 않고 사랑, 외로움, 그리움, 한과 같은 감정에 대한 솔직한 표현이 적힌 작품을 보자 나도 그 감정에 깊이 빠져들어서 뭉클하거나 슬퍼지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남성이긴 하지만, 내 삶과 그 속에서 느낀 점을 기록한다는 점에서 어쩌면 내방가사는 내가 쓰는 블로그 포스팅과도 비슷하다고도 생각했다. 실생활에선 누군가 붙들고 늘어놓기 힘든 내 솔직한 이야기를 '내 말 좀 들어봐'하며 구구절절 브런치에 풀어놓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전시는 내방가사 작가들과 시대를 초월한 공감과 소통의 장이 되지 않았나 싶다. 


앞서 이야기 한 것처럼 전시 종료가 얼마 남지 않았다. 무료이고 1시간~1시간 30분 정도 시간을 보낼 수 있을 만큼 알찬 전시이니 끝나기 전에 꼭 한 번 가서 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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