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 특별전
서울역과 충정로역 사이 정도에 위치한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존재 자체를 모르던 곳이지만 문화생활에 소양이 깊은 회사 선배님의 SNS를 통해 이런 곳이 있고, 또 여기서 재밌는 전시를 진행 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거리 상으론 충정로역 쪽이 조금 더 가까운 듯하나 4호선을 타고 다니는 터라 서울역에서 내려 그냥 걸어왔다. 다행스럽게도 방문했던 날이 춥지 않았기 때문에 슬슬 걸어 올라오기에도 좋았다.
박물관은 지하로 내려가야 하며 지상에는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일단 여기에 이런 공간이 생긴 배경부터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 일대는 조선시대 한양의 4소문(남대문, 동대문 등 4대문 사이에 나 있던 작은 성문)* 중 하나인 서소문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장소다.
그리고 당시 그 서소문 바깥쪽에 처형장이 있었고, 조선 후기 천주교에 대한 대규모 탄압이 이뤄지며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여기서 순교한 것으로 전해진다.
*네이버 검색 두산백과 설명을 참고할 것. 링크.
공원 한 편에 유명한 '노숙자 예수' 조각상이 전시되어 있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찾기가 힘들진 않지만 눈에 잘 띄지 않는 구석에 있기 때문에 무심코 지나가는 수가 많을 것 같다.
티머시 슈멀츠라는 캐나다 출신 조각가가 2013년 만든 작품이다. 천으로 온몸을 가리고 있지만 발등의 성흔(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 난 상처)을 통해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마태복음 25장 일부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하여 그 부분을 읽어보니 (내가 이해하기론) 초라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곧 예수님 당신이나 마찬가지고 그 사람들에게 잘 하면 당신에게 잘 한 거나 다름없으니 착하게 살라는 가르침인 것 같다.
예수님을 노숙자로 묘사했다는 점에서 '어그로' 끄는 문제작 취급을 받았지만 프란치스코 교황이 축성을 하는 등 나름 그 의미를 인정받기도 했다.* 그 이후 세계 곳곳에 전시되고 있다고. 천주교 관련 시설이라 성경을 모티브로 한 작품이 놓인 모습이 당연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서소문 공원 근처에 서울역이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뭔가 더 의미 있게 다가온다.
미국 도시 순회하는 '노숙자 예수' 조각상. 2015-04-06. 연합뉴스. 링크.
지하로 내려간다. 건축에 문외한인 나도 건물이 되게 멋있다는 생각을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은 건축적으로 상당히 호평을 받은 케이스라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안팎으로 나 있는 긴 통로(공영주차장 부지를 활용한 건물이라 원래는 차량 통로였던 것을 그대로 살린 듯하다), 벽돌, 그리고 지하-지상-하늘 사이의 연결성이 감명 깊게 느껴졌다. 특히 내부를 둘러보다 보면 하늘이랑 직접적으로 연결된 공간이나 실내에서 부분적으로 자연광이 비치게끔 한곳이 있는데 이런 건 엄청 신성한 체험이었다.
1층과 지하에 상설전시실 개념의 공간도 있었으나... 늘 그렇듯 시간과 체력의 한계에 쫓겨 이번 방문에서는 특별전시만 관람했다. 지하로 한 층 내려가면 기획전시실이 나온다.
전시실 초입에 이번 전시 관련 해설이 담긴 책자가 있으니 꼭 받아 가자. 나는 그냥 홍보 책자 정도로만 생각했지만 거의 도록에 가깝게 상세한 설명이 담겨 있었다. 괜히 기부함 옆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었어. 기부하고 올걸... 다음에 가면 꼭 할게요...
이번 전시의 소재인 이콘(Icon)은 "동방 정교회"에서 주로 제작된 성화의 한 형식을 말한다. 동방 정교회란 가톨릭과 친척 관계에 있는 종교다. 1000년 전인 11세기 정도에 둘이 뭐 사이가 안 좋아서 분가했다가 요즘엔 잘 지내려고 노력하는 것 같다.
동유럽 국가와 러시아를 중심으로 신자가 많은데 이번 전시에는 '러시아 이콘 박물관'에서 러시아 이콘 문화를 살펴볼 수 있는 작품들을 다량 전시하고 있다.
가장 처음 만나는 이콘은 "손으로 만들지 않은 구세주"라는 작품이다. 작품 이름부터 난해하다. 이런 종교화에 사용되는 표현이나 상징에는 늘 그렇듯이 스토리가 있다. 다만, 이번 전시에서 그런 배경 설명이 상당히 부족하다고 느껴졌다.
사실 이콘이라는 분류 자체도 전시 전반부에 발전 과정이라든지 이런 걸 좀 더 개념을 잡아주고 들어가야 하는데 그런 거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러시아 이콘' 얘기만 해서 좀 아쉽기도 했다.
아마 전시 관련 연계 강연을 4번이나 진행하는 이유가 있는 듯... 전문가나 아주아주 신실한 하드코어 가톨릭 신자가 아니고서야 이번 전시를 이해하려면 강연 수강이 필수였던 것 같다. 나는 강연은 고사하고 이번 전시 자체를 너무 늦게 알아 버렸으니 자연스레 수강신청 실패... 선착순 40명까지 끊더라.
아무튼 저 "손으로 만들지 않은 구세주"라는 작품의 배경은... 찾아봤는데 자료가 많지도 않고 내가 직접 설명하기도 힘든 영역이라 좋은 블로그를 골라 하단에 링크 남긴다.
이콘, 신비의 미 2. '손으로 만들지 않은' 구세주. 다음 블로그 [그리며,그리워하며], 링크.
그리고 위 사진은 "손으로 만들지 않은 구세주" 이야기를 담은 이콘으로 이번 전시에 함께 온 작품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첨부의 블로그에 소개된 이야기 중 '에데사의 아브가르' 이야기를 바탕으로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이후에도 비슷한 느낌.
시대별, 지역별 대표 양식에 대한 설명이 제시되어 있기는 하지만 가톨릭 문화나 종교화에 대한 이해가 깊지 않으면 깊이 있는 감상이 쉽지 않다. 그래도 뭔가 '어떤 느낌인지'는 알 거 같음. 색감이나 인물의 표정 구도 등이 좋아 보이는 것 위주로 감상했다.
전시의 기본적인 흐름은 15세기 러시아 이콘에서 시작해 시대순으로 진행되니 설명문을 읽어가며 차근차근 따라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멋지고 아름다워서 찍은 두 점의 이콘. 각각 대천사 미카엘(왼쪽)과 성녀 카타리나(오른쪽)다.
접이식 이콘은 불교 문화재 중 불감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마침 이날 진행됐던 전시 연계 강연이 동양 종교화와 이콘을 비교하는 주제였기 때문에 못 들은 것이 정말 아쉬웠다. 뭔가 최근에 불교 문화재를 많이 접하다 보니 그런 생각이 더 들었던 것 같다.
그렇게 직선형의 복도를 따라 진행되는 동선을 따라가다 보면 맞은편에 막다른 벽이 보인다. '전시가 이쯤 끝나는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주 대단한 규모는 아니라도 전시된 이콘의 수가 결코 적다고는 할 수 없기 때문에 '이만하면 볼 만큼 봤다...'하는 찰나에 옆쪽 벽에 뚫린 문으로 사람들이 들락날락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기획전시실에 붙은 '기획 소강당'이었다. 여기에 성화벽을 설치해 놓았다. 중앙 통로 양쪽 벽에도 이콘을 가져다 놓았는데 작은 전시실이자 성전처럼 꾸며진 소강당은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전시 막판에 아주 좋은 구경을 했다는 느낌.
성화벽 뒤편에는 미사 때 사용하는 도구들도 비치되어 있...지만 성화벽에 가려서 거진 보이질 않는다;;; 까치발을 들고 목을 빼고 봐야만 하는데 뭘 보라고 둔 건지 의문인 부분... 약간 의아했지만 전체적인 분위기가 워낙 좋아서 다 괜찮았다.
위에서 얘기한 대로 전시에 아쉬운 점도 있었고 내가 가진 배경지식이 이 전시를 완전히 즐기기엔 부족한 점이 많았다는 것 또한 문제였지만 이콘, 그중에서도 러시아 이콘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대략적으로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쉽게 보기 힘든 귀한 작품들을 서울 한복판에서 감상할 수 있다는 점 또한 좋았다.
특히 기독교 신앙을 갖고 계신 분들이라면 다른 나라, 다른 문화권 사람들의 종교 예술을 경험하고 공감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귀한 기회가 될 것이다. 전시는 2월 27일까지 진행된다. 2주도 안 남았으니 못 봤다면 얼른 가서 보시라. 이번 전시뿐만 아니라 지상의 공원과 박물관 건물 자체도 볼만하기 때문에 겸사겸사 다녀올만 할 것이다.
아무튼, 점점 봄이 다가오는 느껴지는 시기에 어울리는 즐거운 경험이었다. 올겨울은 나 개인적으로 보나 우리 사회로 보나 전 세계적으로 보나 정말 '겨울'이라는 말과 어울리는 추운 나날들이 이어지는 것 같다. 평소 더위를 너무 많이 타서 매일매일 추웠으면 좋겠다고 노래를 부르는 나지만, 올겨울만큼은 하루빨리 봄이 와서 따뜻한 온기와 함께 사랑과 평화가 확산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