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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부엉씨 Feb 25. 2022

무령왕릉 발굴 50년 특별전 上

국립공주박물관 기획전시실

공주종합버스터미널에 도착한 이후 국립공주박물관으로 이동하기 위한 교통 편을 찾았다. 터미널 인근에서 탈 수 있는 버스로는 101번이나 108번이 있는데 네이버 지도로 도착 예정 정보도 뜨질 않아서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 요원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냥 과감하게 택시를 이용했다. 택시비는 6,300원 나왔다.


입구. 주변엔 아무것도 없었다. 보도를 따라 쭉 올라간다.

박물관까지 다 올라가면 이상하게 생긴 게 있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진묘수다. 내 기억으론 교과서에서 발굴 당시 모습을 찍은 사진을 본 적이 있는 거 같은데... 맞나?


아무튼 나중에 실물을 보면서 자세히 얘기하겠지만 무덤을 지키는 짐승이라는 설정에 맞지 않게 어딘가 귀엽고 정감 가는 모습이라 무령왕릉 관련 관광지에서 마스코트처럼 활용되고 있다.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돌면 무령왕릉 발굴 50년 특별전이 열리고 있는 기획 전시실로 갈 수 있다. 전시 포스터부터 내외부에 파란색과 흰색 위주의 구성의 눈에 띈다. 무슨 의미에서 사용된 색상인지는 잘 모르겠다.

1971년 발견된 무령왕릉은 우리나라 고고학 역사상 손에 꼽히는 중요 발굴 사례 중 하나다. 오랜 세월 도굴이 되지 않고 백제의 문화와 풍속을 알 수 있는 수준 높은 부장품들이 그대로 발견되었다는 점이 가장 감사한 일일 것이다.


역사학적으로는 여기서 발굴된 지석을 통해 무덤 주인을 알 수 있다는 점이 가장 중요하다. 그 덕에 무령왕릉은 원삼국시대 무덤 중 유일하게 피장자가 밝혀진 무덤이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다.


그렇게 중요한 발굴이 이뤄진 지 50년을 기념하기 위해 이번 전시에서는 당시 발굴된 무려 5,232점의 유물들을 처음으로 모두 선보인다고 한다. 무령왕릉을 둘러싼 역사를 한눈에 보고 느낄 수 있는 귀한 전시이고 언제 다시 찾아올지 모르는 기회인 만큼 기대에 부푼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처음 보게 되는 것은 아까 박물관 입구에서도 봤던 진묘수다. 진묘수란 사악한 기운으로부터 무덤을 지키고 망자의 영혼을 하늘로 인도하는 상상의 동물을 말한다. 국보로 지정되어 있으며 정식 명칭은 '무령왕릉 석수'다.


진묘수의 기원은 중국에서 찾을 수 있다. 무령왕릉 자체가 중국 남조의 영향을 크게 받은 벽돌무덤(전축분)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중국적인 요소가 많이 나오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다. 2018년께 진묘수를 주제로 한 전시도 열렸었다고. 놓쳐서 너무 아쉽다.


우리나라에서 진묘수가 발굴된 사례는 무령왕릉이 유일한데다 생김새도 뭔가 친근한 모습이라 주목을 많이 받는 유물이다. 근데 아무리 귀엽게 생겼어도 무덤 딱 열자마자 저런 게 보이면 심장 떨어질 것 같긴 하네.


무령왕릉 진묘수의 경우 오른쪽 다리가 부러졌었다고 한다. 발굴 현장이 개판이었기 때문에 당시 누군가의 부주의로 깨졌다는 말도 있고, 진묘수가 달아나지 못하도록 무덤을 조성할 때부터 의도적으로 부러뜨려 놓은 것이라는 설도 있다.


무엇이 사실인지 확실하진 않지만 중국에서 비슷한 사례가 발견되며 후자일 가능성에 더 무게가 실리는 듯하다. 다만, 그렇다면 지금은 왜 다리를 붙여놨나 싶다. 이제 도망칠 테면 어디 한번 도망 쳐보라 그건가?

통로 양쪽 벽면에는 무령왕릉 및 무령왕릉 발굴과 얽힌 설명이 적혀 있다. 위 사진은 무령왕릉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졸속 발굴'과 관련된 내용이다. 얼마나 심각했던지 발굴에 참여했던 학자조차 '도굴이나 다름없었다'*고 술회할 만큼 한국 고고학 최악의 흑역사로 남았다.


뭐 여러 비난과 비판이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고 내가 거기에 무슨 말을 얹을 위치에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역사를 연구하는 역사학자가 역사의 죄인으로 남아버렸으니 인간적으로 참 안타깝고 불행한 일이라는 생각은 든다.


*“도굴이나 다름없었다” 아수라장 같았던 무령왕릉 발굴 어떻게 이루어졌나. 중앙일보(유튜브). 2021.2.24.

무령왕릉의 막음벽돌을 비롯해 무령왕릉 축조에 사용된 다양한 무늬의 벽돌도 볼 수 있다. 이렇게 벽돌로 만든 무덤을 벽돌무덤이라고 한다. 한국사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는 무덤 양식(묘제)은 아니고 중국 육조시대 남조의 지배계층 무덤에서 주로 확인되는 양식이다*


고고학자들이 특정 집단의 계통이나 분포를 확인할 때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삼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무덤 양식이다. 그런 의미에서 무령왕릉이 이전에 백제 지배계층이 사용한 양식과 달리 벽돌무덤으로 지어졌다는 것은 그만큼 무령왕대 백제가 중국 남조와 밀접한 교류를 이어갔다는 증거일 것이다.


*'육조시대'는 중국 삼국시대 이후 수나라 이전까지의 시기를 말하는 일종의 시대구분이다. 대중적으로는 '위진남북조시대'가 더 익숙한 표현일 것 같은데 '육조시대'의 경우 같은 시기를 중국 장강(양쯔강)을 중심으로 존재한 여섯 개 왕조(이를 남조라고 한다)를 중심으로 바라보는 구분법이다.

막음돌이 있는 곳을 지나면 넓은 전시실이 나온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전시해설을 들으면서 보고 있었다. 나는 좀 건방진 스타일인데다 게을러서 전시 해설 스케쥴을 확인 안 하는 편이지만 저런 걸 같이 들으면 확실히 더 많은 것을 얻어 갈 수 있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꼭 미리 알아보길 권한다.

전시실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유물은 '무령왕릉 지석'이다. 지석은 기록할 지(誌) 자에 돌 석(石) 자를 쓰며, 말 그대로 무언가를 기록해 놓은 돌이다. 무령왕릉 지석은 총 두 장으로 이뤄져 있고 여기에는 이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 그 사람은 언제, 몇 살 때 죽었고 죽은 이후 얼마 만에 릉에 모셨는지 등이 기록되어 있다. 무령왕릉은 왕과 왕비의 합장묘이기 때문에 왕비와 관련된 내용도 있다. 아울러 토지신에게 무덤으로 사용할 땅을 산다는 '매지권'의 내용도 아주 흥미롭다.


이 무덤을 열자마자 그 주인을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이 지석 덕분이다. 사실 어떤 무덤이든 부장품이나 조성 연대 등을 바탕으로 피장자를 추정하는 것이 가능하긴 한데, 현실적으로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이를 100% 확신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 지석의 존재는 의의가 크다.


또, 고대사라는 것이 워낙 오래전 일이다 보니 기록이 부족하거나 부정확한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금석문의 출토나 발견은 정말 반가운 일이다. 게다가 출토유물에서 나오는 텍스트들은 후대에 기록된 것이 아니라 당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직접 기록한 1차 사료이기 때문에 그 중요성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특히 한국 고대사, 그중에서도 백제사 관련 문헌자료가 너무나 부족한 가운데 사료로서의 가치를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시 백제인들의 생각과 세계관을 엿볼 수 있는 유물로, 다른 화려한 금제 출토품만큼이나 소중하고 멋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반부에 내가 너무 보고 싶었던 중요 유물들이 몰려있는 느낌이었다. 지석을 지나면 오수전(당시 중국 동전), 제사용기로 추정되는 도자기를 비롯해서 못이나 각종 장식 등 크고 작은 출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왼쪽이 무령왕비 베개와 발 받침, 오른쪽이 무령왕 베개와 발 받침이다. 무령왕비 베개와 무령왕 발 받침이 각각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왕비 쪽 세트는 둘 다 진품이 전시되어 있고 왕 쪽은 둘 다 재현품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참고로 무령왕 베개의 경우 발견 당시 이미 부식이 너무 많이 진행되어서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고 한다.


아름다운 유물이긴 한데 저기에다가 돌아가신 분들을 뉘었다는 생각을 하니 뭔가 약간 좀 무섭기도 하고 좀 그래가지고 ㅎㅎ;;

전시실 중앙에는 무령왕과 무령왕비의 목관을 재현해 놓았다. 실제 목관은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부식되어 일부만 남아있는데 남은 부분은 상설전시실에서 볼 수 있다.


무령왕릉의 목관 같은 경우 일본에서만 자라는 금송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는 백제가 왜와도 상당히 활발히 교류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인데 무령왕릉에서 나타난 남조 문화와 더불어 백제의 국제성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왕과 왕비의 목관에 사용된 널못들이다. 꽃 모양을 하고 있는 모습이 예쁘고 귀엽고 해서 시선을 사로잡았다.


아닌 게 아니라 무령왕릉 곳곳에는 꽃 모양 장식이 상당히 많이 사용되었다. 이와 관련해서는 이번 전시를 다룬 이기환 기자의 글을 꼭 한 번 읽기를 권한다. 무령왕릉을 둘러싼 이야깃거리와 의문점들을 잘 정리한 글이다. 이기환 기자님 글은 문화재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좋아할 만한 명문이라 늘 챙겨 보고 있다.

무덤 조성에 사용된 벽돌을 비롯해 무덤을 가득 채우고 있는 크고 작은 꽃 모양 장식들은 불교의 상징과 연관지어 해석된다.


다만 나 개인적으로는 뭔가 뭉클한 기분을 느낀다. 보통 고대의 고분 등에는 위세품이 많이 부장되어 있기 때문에 아주 화려하고 웅장하다는 느낌을 받거나 혹은 참 인생이 무상하구나 이런 느낌을 받곤 하는데, 꽃 장식이 가득한 무령왕릉의 경우에는 참 낭만적이라는 느낌을 받으면서 죽어서 이렇게 아름다운 무덤에 함께 묻힌 무령왕 부부가 생전에도 금슬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하게 된다.


아마 '꽃무늬'를 가득 채우면서도 조잡하거나 과하게 느껴지지 않도록 하는 백제인들의 세련된 문화 수준도 이런 느낌에 한몫하지 않나 싶다.

그 외 눈길이 갔던 유물들. 왕의 금동신발은 발굴 당시 형태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망가지고 부서진 상태였으나 부서진 조각들을 집요하게 찾아 붙이는 연구자들의 노력을 통해 완전한 모습으로 전시될 수 있었다. 이번 전시를 통해 소개되는 그간의 연구성과 중 하나.


오른쪽 사진에는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은어뼈가 있다. 제사상 개념으로 넣었다거나 생선이 가지는 상징성을 고려해 넣었다는 설 등이 있는데 그것보다는 사람 뼈도 없어졌는데 생선 뼈가 남았다는 사실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무령왕릉에서 인골이 나오긴 했지만 앞에서 이야기한 졸속 발굴 때문에 출토품 정리가 잘되지 않아 그 존재는 2009년에야 드러났다. 출토된 지 시간이 너무 지나기도 했고 그 뼈가 발굴 당시 어떤 상태였는지도 확실치 않은 데다 과학적으로 시료 측정이 불가하다는 판정을 받아 그 정체는 알 수 없는 상태다.

각종 구슬을 비롯한 장식품들. 설명을 보면 이런 자잘한 장식품들은 주로 왕비 쪽에서 발견되었다고 적혀 있더라. 의도적으로 그렇게 묻은 것인지 아니면 부장 이후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것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으로 묻혔을지, 각각의 용도는 무엇이었을지 완전히 밝혀지는 날 또한 기대해 본다.


무령왕릉 발굴 50년을 맞아 열린 특별전시는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모든 유물과 그간의 연구성과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전시된 주요 유물 같은 경우에는 주로 '무령왕릉을 무령왕릉으로 만드는', 다시 말해 무령왕릉이라는 무덤 자체가 한국사에서 가지는 의미와 특징을 보여주는 유물 위주로 전시가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상설전시의 경우 관 꾸미개처럼 화려하고 세련된 백제문화의 정수를 볼 수 있는 최상급 유물이 전시되고 있으니 특별전을 먼저 보든 상설전시를 먼저 보든 꼭 함께 둘러보는 것이 좋다. 나는 특별전을 본 후에 상설전시를 봤고, 상설전시 관련 내용도 이후 포스팅으로 다룰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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