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어두운 가운데 차창 밖에는 바람이 불고 있었다. 해가 뜨기를 기다리며 차에 앉아 잠깐 눈을 붙였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구름사이로 강렬하게 쏟아지는 햇빛이 이내 잠을 깨웠다. 옷을 껴입고 나섰다. 차갑지만 상쾌한 바람이 얼굴에 와 닿았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놀랍게도 용담호에 삼분의 일쯤 잠긴 나무들이었다. 이십여 그루 남짓한 나무들은 붉은 빛으로 또는 노랗게 물들고 있었다. 인공호수인 탓에 수위를 조정하느라 나무가 물속에 잠기기도 하고 드러나기도 하는 곳이다. 완전히 잠긴 것은 아니지만 그 나무들의 모습에서 수장(水葬)의 느낌이 들었다. 집에서 키우는 화초들은 과습이 되면 금방 죽고 마는데 이곳의 나무들은 괜찮은 것일까.
내게도 젊은 날 물속에 잠긴 나무처럼 살았던 날들이 있었다. 십 여 년이 훌쩍 넘게 병원을 집처럼 드나들었던 그 때는 온통 세상이 회색빛으로 잠겨 있었다. 내가 왜 불행해야 하는지 이유를 알고 싶다고 신께 외쳐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밤에 잠이 들어야만 몸과 마음이 쉴 수 있었던 괴로운 나날들이었다.
문득, 뉴칼레도니아의 "포레 누아예"가 떠올랐다. 야떼 호수에 댐이 생기면서 물속에 잠긴 숲이 되었다는 곳이다. 드넓은 호수의 푸른 물속에 삐죽삐죽 하얗게 서있는 니아울리 나무들은 기괴하고 음산한 느낌을 주었다. 높은 산꼭대기에 고사목은 가끔 보았지만 물 가운데 잠긴 숲이라니. 그야말로 수장(水葬)된 나무들이 하늘을 향해 뻗어있는 가지와 몸체로 슬프게 우는 것 같았다.
푸르던 숲에 어느 날 파도치듯 물이 밀려올 때 속절없이 서 있을 수밖에 없던 나무들은 어땠을까. 우리의 인생사에도 예고치 않게 밀려오는 고통들이 있지 않던가. 오랜 시간 적응해 보려고 잔뿌리를 뻗으며 몸부림도 쳤을 것이다. 사람의 의지와 노력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어려움은 복병처럼 나타나듯이 나무들도 그저 멈출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가지에 달린 수많은 나뭇잎들을 떨어뜨리고 서서히 한 그루, 한 그루 외로운 섬이 되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난 것일까.
나무에게도 영혼이 있다고 믿고 싶다. 생물학적으로 죽음을 맞이했다고 해도 빗물과 바람과 햇빛의 시간이 그들의 서사처럼 하얀 몸체에 계속 새겨지고 있을 테니 말이다. 하여 물밑으로 가라앉지 않고 의연히 영원토록 서 있을 것만 같다.
다행히 용담호는 일 년 내 잠겨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니까 이곳의 나무들은 주어진 환경에 적응해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내게 밀려왔던 파도는 언제 썰물로 빠져 나갈까 한 치 앞을 알 수 없었으나 어느 결에 서서히 물러갔고 강건하게 버티고 서 있을 수 있었다. 나무들에게 밀물이 있으면 썰물 때도 있다고, 서로 갈마들기에 잘 견딜 수 있을 것이라고 위로의 말을 건네 보았다. 회색빛에서 나답게 물들어 가고 있는 나 역시 순응의 시간을 보냈고 물속에 잠긴 채 단풍 드는 나무들처럼 절정을 향해 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나무라면 어떤 색으로 물들고 있을까. 겉모습이 아닌 내안에 내재되었던 또 다른 색깔은 정열적인 빨강일까, 명랑한 노랑일까, 성실한 의미의 갈색일까. 나무의 단풍 색을 그린다면 한두 가지 물감으로 표현할 수 없듯이 나의 물듦도 어떤 색이라고 규정지을 수는 없으리라. 다만 붉다 못해 자줏빛을 띈 가지 하나쯤 휘늘어져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