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속 주인공을 찾습니다

유럽에서 우연히 딸려 온 필름

by 해은

딸깍. 필름실 덮개를 열자 그 안에 필름이 들어 있었다. 처음에는 쓰지 않은 새 필름인 줄로만 알았다. 필름을 꺼내 자세히 살펴본 남편은 현상된 것이라고 했다. 왜 현상된 필름을 카메라에 다시 끼워 놓았던 것일까. 그 이유를 짐작할 수는 없지만 어떤 사진일지 매우 궁금했다.


남편이 수집하고 있는 것은 오래된 클래식 카메라이다. 처음에는 디지털 카메라로 꾸준히 사진을 찍더니 몇 년 전부터 필름 카메라가 매력 있다고 마음을 바꿨다. 그는 찍는 것에 그치지 않고 외국에서 직구를 통해 하나 둘씩 사 모으기 시작했다. 일본, 독일, 미국, 영국 등등 다양한 나라에서 온 빈티지 카메라는 오래된 것은 백 년 된 것도 있고 대체로 육칠십 년 된 것들이다. 내가 보기에도 예쁜 가지각색 디자인의 카메라가 장식장 안을 가득 채워 그는 요즘 커다란 장식장을 사고 싶다고 노래를 부른다.


어느 날, 오스트리아에서 구입한 카메라 열 두대가 도착했다. 남편은 하나 씩 꺼내서 상태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중에서 현상된 필름이 끼워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필름을 잘라 스캔 기에 올려놓는 남편을 지켜 보았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 호기심에 가득 차 컴퓨터 화면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KakaoTalk_20241125_082123635.jpg


드디어 사진이 화면에 차례로 나타났다. 모두 열여섯 장의 흑백 사진에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손자로 보이는 대 여섯 살가량의 귀여운 금발 소년이 등장했다. 반팔 옷을 입은 것으로 보아 계절의 배경은 여름이다. 동물원에서 낙타와 기린을 구경하고 연못의 오리와 새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둥근 의자에 앉아 찍은 사진이 있었는데 할머니가 손자를 사랑스럽고 흐무지게 바라보는 표정이 눈길을 끌었다. 그녀의 체구는 아담하고 온화해 보이는 인상이다. 컷트 머리를 뽀글거리게 퍼머한 차림은 수더분한 얼굴이 동네에서 마주칠 수 있는 평범한 이웃의 할머니 같아 보였다.


다른 장소에서는 손자가 등장하지 않고 눈 덮인 산이 보이는 멋진 마을 풍경을 찍었다. 그곳은 유럽의 어느 나라일까. 할머니 옆에 세워진 클래식 자동차가 오래된 시대적 배경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사진도 있었다.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커다란 나무 아래 앉아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할머니, 머리가 좀 벗겨지고 안경을 쓴 할아버지의 독사진은 흔들려서 얼굴을 선명하게 볼 수가 없었다. 모든 인물은 특이하게 정면의 카메라를 응시하지 않고 옆모습이나 뒷모습이다. 인물의 움직임을 자연스럽게 포착해서 찍은 스냅사진으로 부부끼리 여행을 떠나서 서로를 찍어 준 것으로 보인다.


이 카메라의 주인은 아마도 할아버지가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사진에 담긴 시절이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짐작하건대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현재 이 세상 사람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카메라를 판 사람은 어른이 된 사진 속의 손자 일까. 아마도 현상된 필름이 들어있는지 모르고 판매한 것 같았다. 가족에게는 소중할지도 모를 추억의 사진 필름을 돌려주고 싶어도 돌려 줄 수가 없다. 일 대 일로 구입한 것이 아니라 오스트리아의 카메라 중개상이 수집한 것들을 모아서 판 것이기 때문이다.


눈 뜨고 일어나면 새로운 것이 쏟아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 자꾸만 밀려나기도 하지만 오래되고 낡은 것에는 새로운 것이 흉내 내지 못하는 면이 있다. 레트로는 ‘retrospect(회상)’의 줄임말이다. 과거의 새로운 재발견인 것이다. 그 시대만의 멋이라고나 할까. 옛것은 바래진 만큼 우리에게서 옅어졌다. 그리고 우리는 한동안 그것을 찾지 않았다. 어느 날 불현 듯 그리움이란 것이 손을 내밀기 전까지 말이다. 옆에 있을 때는 알지 못했던 것이다. 과거 우리와 함께 했으나 멀어져 간 것들을 다시금 마주하게 되니 그리움이 해소되는 듯 했다.


우연히 딸려 온 필름으로 인해 머나먼 곳에 살았던 누군가의 추억을 감상할 수 있었다. 장식장 안에 진열되어 있는 카메라들 각각의 서사도 궁금해진다. 세계 각지에서 온 것으로 저마다 색다른 배경과 다양한 인종의 인물들과 삶을 렌즈 안에 담았을 것이다. 먼 훗날 만일 누군가에게 내 모습이 담긴 사진 필름을 보여 준다면 과연 어떤 모습을 담을까 상상해 본다. 아마도 여행을 좋아하고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우리 부부의 모습은 유럽에서 온 사진 속의 노부부와 닮은꼴이지 않을까.


어쩌면 과거의 일상을 상상 속에서나마 잠시 복원시키는 힘, 빈티지 사물이 가진 매력에 푹 빠져 본 시간이었다.

keyword
이전 04화분갈이가 필요할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