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세이프헤이븐' 리뷰
짧지만 가을 여행을 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과 코발트색으로 물든 바다를 보기도 했고, 빨강과 노랑으로 물들어가는 나무들을 보며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도 했다. 그러나 가을의 속삭임은 없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을 여러 가지로 표현할 수 있겠지만 감수성의 죽음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눈에 보이는 가을은 분명 아름다움을 갖고 있지만 느끼지 못하는 것을 보면 성적장애를 겪고 있는 중년남자처럼 싸한 아픔이 있다. 더군다나 짧은 단풍의 아름다움이 사라진 나무는 앙상한 가지만 남긴 채 사람들의 이목에서 사라진다. 자연의 가을과 인생의 가을을 동시에 만나기에 중년에 만난 가을은 감수성보다 쓸쓸함이나 외로움으로 다가온다.
그 부정적인 감정을 이기고 싶어서일까?
가을은 로맨스 영화를 통해서 마음의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계절이다. 절절하게 다가오는 아픈 사랑도 좋고, 아니면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고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영화도 좋다. 예쁘게 생긴 여배우, 아름다운 배경, 그리고 가슴을 촉촉이 적시는 서정적인 멜로디의 OST. 내가 원하는 멜로 영화의 3대 조건이다. 영화 ‘세이프 헤이븐’은 이 3대 조건에 딱 들어맞는 영화다.
원작은 ‘노트북’으로 유명한 니콜라스 스파크스의 동명소설이기에 영화 속에 나타난 사랑도 과장되지 않는 절실함이 있다. 노트북이 자신의 여자를 죽을 때까지 사랑한 한 남자의 순애보라면 ‘세이프 헤이븐’은 상처를 가지고 있는 남녀가 어떻게 장애물을 제거하고 사랑을 만들어 가는가? 에 대한 과정을 담은 영화다. 그러기에 로맨스 영화는 주인공을 통해 감정이입을 할 수 있다. 그런 거 있지 않은가? 마치 자신이 이 영화 속의 남자 주인공 같은 착각과 운명적인 사랑이 찾아올 것 같은 환상 때문에 며칠을 마음 설레며 혼자 웃는 나만의 즐거움^^
감독은 ‘개 같은 내 인생’과 ‘디어 존’등으로 알려진 라세 할스트롬인데 주연배우는 영 모르겠다. 검색했더니 남자 주인공인 조쉬 더하멜은 트랜스포머에 출연한 모양인데 한편도 보지 않았기에 생소한데 여자들이 좋아할 얼굴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한없이 부드럽고 예의바르고 헌신할 것 같은 느낌을 주는데 실제적으로 영화 속에서도 그렇다. 너무 예쁘기에 설레기까지 했던 여주인공 줄리안 허프(케이티 펠드만)는 '맥 라이언'과 '제니퍼 애니스톤'의 장점만 가지고 있다. 이 영화를 본다면 누구나 줄리안 허프의 매력에 빠질 것이라고 확신한다. 여기에 배경은 영화 노트북으로 유명해진 ‘사우스포트’의 아름다운 호수다. 노트북에서 노아와 앨리가 이 호수에서 작은 보트를 타고 사랑을 키워 가는 것처럼 알렉스와 케이티도 똑같은 장면을 연출한다. 자신이 아내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담백하게 고백하는 알렉스 앞에서 환하게 웃는 모습으로 노를 젓는 두 사람은 마치 노트북의 감독인 닉 카사베츠에게 바치는 오마주 같다. 그리고 작은 항구를 배경으로 한 노스캐롤라이나의 바닷가와 호수, 케이티가 살고 있는 숲속의 오두막집, 오크 나뭇길 등은 기회만 된다면 꼭 가보고 싶은 충동을 일으킬 정도로 매력이 있다. 여기에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배경 음악은 그들의 사랑을 덧칠하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렇게 ‘세이프 헤이븐’은 전형적인 로맨스 영화의 모습을 가지고 있지만 첫 화면은 긴장감으로 시작된다. 비가 세차게 내리는 밤. 얼굴에는 핏자국이 묻어있고 신발도 신지 못한 채 케이티(줄리언 허프)가 극도의 두려운 표정으로 집을 빠져 나오며 도망친다. 그때 그녀의 뒤를 쫓는 형사들을 피해 케이티는 노스캐롤라이나행 버스에 자신을 숨기며 도주에 성공한다. 긴박하게 화면이 바뀌며 그녀는 형사들의 수사망을 뚫고 시외버스에 몸을 숨기고 마침내 도주에 성공한다. 이튿날 그녀는 노스캐롤라이나에 위치한 작은 해안마을 사우스포트에 도착한다. 어두웠던 화면은 바뀌고 카메라는 롱테이크로 사우스포트의 아름다운 모습을 잡아준다.
그 경치에 반해서일까?
케이티는 이곳의 한 마켓에서 커피를 사고 물끄러미 바닷가를 바라본다. 갈매기가 날고 배들이 정박되어 있는 모습을 보며 그녀는 이곳에 머물기로 결심한다. 웨이트리스 일을 하며 이곳에 적응하고 있는 케이트는 낡은 오두막집을 얻으며 작은 행복을 만들어 간다. 생필품을 구입하기 위하여 마켓에 들리곤 하던 그녀는 자연스럽게 이 마켓의 주인인 알렉스((조시 더하멜)를 만난다. 그는 아내를 잃고 홀로 어린 남매를 키우고 있는 홀아비다. 로맨스 영화의 공식은 언제나 운명적인 만남이 전제가 되는데 알렉스와 케이티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알렉스의 아이들을 통해 두 사람은 점점 가까워지고 봄날에 피어나는 아지랑이처럼 두 사랑의 사랑도 천천히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녀에겐 어두운 과거가 있다. 영화의 서두에서 형사의 눈길을 피해 이곳까지 도망쳤지만 가슴은 언제 닥칠지 모르는 일 때문에 불안한 하루를 보낸다. 점점 더 케이티의 어두운 과거를 들추어내며 그녀 옆으로 다가오는 형사 케빈(데이빗 라이온스)은 케이티의 남편이다. 두 사람의 사랑이 깊어질수록 케이티를 향한 케빈의 집착은 깊어지고 이로 인해 위기가 다가온다. 로맨스 영화 치고는 드물게 스릴러와 서스펜스가 가미 되어 있기에 ‘세이프 헤이븐’은 끝까지 긴장감이 있다. 가슴 편하게 두 사람의 사랑을 넉 놓고 바라볼 수만 없는 것이 다른 로맨스 영화와의 차이점이다.
또 하나의 등장인물은 케이티의 옆에 살고 있는 조(코비 스멀더스)는 좋은 친구다. 케이티를 많이 이해하고 기꺼이 친구가 되어주는 그녀는 이 영화의 반전을 제공한다. 그 반전이 너무 작위적이지 않은가? 라는 반론도 있겠지만 또 하나의 아름다운 사랑으로 다가온다.
과연 알렉스와 케이티의 사랑은 노랑과 빨강으로 예쁘게 물든 단풍처럼 보는 이의 가슴에 울림을 주는 사랑으로 남을까?
집착이 강요된 사랑이라면 양보는 희생이라는 가치를 통해 완성된 고귀한 사랑이다. 조가 보여준 사랑으로 인해 앤딩크레딧이 끝날 때까지 가슴이 먹먹해진다. 인간의 추함이나 악함을 들어내는 영화도 필요하겠지만 나에게 좋은 영화는 언제나 선함과 희생, 사랑의 완성 등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을 표현함으로 자신의 감성도 예쁘게 물들게 해주는 역할을 하는 영화다. 상상으로 끝나겠지만 아직도 영화 속에 등장한 여배우를 보며 예쁘다, 저런 아가씨와 차 한잔하면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인생은 그만큼 풍요롭지 않을까?
'세이프 헤이븐’ 은 모처럼 마음에 설렘과 평화를 주는 영화다. 마음을 순수로 물들이는 사랑은 인간이 꿈꾸는 영원한 가치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20대 시절 책받침에 그려진 왕조현이나 벽에 걸어 두었던 올리비아 핫세의 얼굴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는 것은 때로는 한 장의 사진이 인생을 풍요롭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않기 때문이다. 가을의 절정에 와 있는 지금 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마음이 있으면 좋겠다. 아직도 누군가에게 곱게 말린 단풍잎을 편지지에 붙이고 정성을 다한 글씨로 마음의 고백을 담아 우체국으로 달려가고 싶은 감수성은 잃어버리고 싶지 않다. 아직도 사랑을 꿈꾸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