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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세일 Apr 06. 2023

비 내리는 날, 누리는 마음의 사치

창덕궁 후원을 걸으며


비 내리는 후원을 걸었어요.
그 넓은 공간에 사람을 만나기 어려울 정도로 인파가 없었기에 마치 자신이 왕이 된 것처럼 무게를 잡고 천천히 느린 걸음으로 산책을 했습니다. 우산을 받쳐줄 누군가 있으면 좋겠지만 혼자였답니다. ㅠ ㅠ

혼자가 좋은 것이 있어요. 우선은 오롯이 자신에게만 집중할 수 있잖아요. 자신에게 한 마디 툭 던지고 스스로 대답하고, 제일 좋은 것은 자연의 소리를 들을 수 있고 아름다운 풍광을 즐길 수 있죠. 창덕궁에서 5,000원을 내면 후원으로 입장할 수 있는데 언덕진 길 옆으로 오래된 나무들이 푸르름으로 하늘을 덮었어요. 되도록 천천히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길을 걷습니다.



우산 위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는 “툭툭” 소리를 내기에 둔탁함이 있고,
푸르른 나무 위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는 마치 산사의 풍경소리처럼 경쾌함을 느낄 수 있고요.

“툭툭”
“잘랑 잘랑”

마치 베이스와 소프라노의 2 중창처럼 둘은 조화된 소리를 내고 있기에 걸음을 멈춰 서서 귀를 기울였어요. 이때는 자신이 관음증 환자가 되어도 좋답니다. 여기에 리듬감이 있는 이름 모를 새소리들이 순간순간 피처링(featuring)을 해준답니다.



행복해진 가슴으로 조금 비탈진 길을 오르면 두근거림이 있답니다. 마치 영화가 시작될 때의 긴장감과 같은 떨림이 있는데 이유는 후원의 풍경들은 계절의 변화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 행복은 언덕을 넘으면 펼쳐지는 부용지((芙蓉池)를 보면서 감탄사로 바뀐답니다. 내리는 비 때문에 신비한 모습으로 다가오는군요. 평상시 같으면 사람들로 인해 사진 한 장 제대로 찍기 어렵지만, 오늘은 저 혼자만의 정원이기에 급 부자가 된 마음으로 부용정을 바라봅니다.

특히 네모난 연못 가운데 있는 섬 위에 세워진 소나무는 모든 사람의 시선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애련정의 연꽃에 자리를 양보해야 할 것 같군요. 아직 활짝 개화하지 않았지만 하얀 연꽃들이 순결한 자태를 보이며 비를 맞고 있습니다. 완전히 개방된 여인의 가슴보다 옷 사이로 살짝 드러난 젖무덤이 남자의 마음을 더 긴장시키는 것처럼 비에 젖은 연꽃의 아름다움은 쉽게 볼 수 있는 풍경이 아니기에 가슴에 소중히 담았습니다.
(부용지의 연꽃을 보고 싶었는데 아직 피지 않아 아쉬움이 있었답니다)



부용지의 아름다움도 좋지만 제 마음이 간 곳은 규장각 주합루입니다.
아쉽게도 출입이 금지되어 있어 사진 한 장으로 만족해야 하지만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통해 아는 만큼 보게 되었습니다. 규장각은 임금의 어제(임금이 몸소 짓거나 만든 글이나 물건), 어필(임금이 손수 쓴 글씨) 등을 보관하는 서재를 말하는데 정조가 규장각을 건립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세종대왕만큼 어질고 선한 왕으로 규정된 정조는 ‘학자들에게 학문과 경세를 연구케 하고 그것을 국정에 반영하여 정치 개혁과 문화 창달을 이뤘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서울편 1 244쪽)

바늘과 실처럼 정조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정약용이죠?
정약용은 부용정에서 놀던 이야기를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때는 온갖 꽃이 활짝 피어 있었고 봄빛이 매우 화창했다. 임금께서는 여러 신하에게 말씀하시기를 ’ 내가 이곳에 온 것은 유희 삼아 즐겁게 놀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경들과 함께 즐기면서 마음을 서로 통하게 하여 천지의 조화에 응하려는 것이다 ‘라 했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서울 편 1 237쪽)

임금과 신하가 어우러져 함께 술을 마시며 나눴던 그 정겨움은 상상만으로도 입가에 미소를 짓게 합니다. 부용정에 배를 띄우고 술을 마시며 시를 짓던 우리 조상들의 풍류는 술만 마시고 떠드는 우리를 속물로 보이게 하는군요. (술만 마시지 말고 글을 써야 해....ㅠ)

여기까지는 참 좋았답니다.

나름 행복에 젖어 2시간 30분 정도를 보내고 핸드폰을 보니까 방전이 되었군요. 12시에 모임 약속이 있어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음식점에서 주인아주머니에게 충전 좀 부탁한다며 핸드폰을 맡겼습니다. 충전 후 보니까 마눌님이 전화를 11통이나 했습니다.  
“아 살 떨려. 평상시에 전화 한 통 안 하시던 분이 웬일이지?”

더 놀라운 것은 여동생이 전화해서
“오빠 요즘 만나는 여자 있어?”
“앵, 전화할 때마다 누구랑 만나고 있다며, 어제도 물의 정원 갔다며 혼자 간겨”

“그럼, 마눌님도 뭔가 의심하고 있는 겨?”

나야 결백하지만 의심하고 캐면, 단서가 생길 수도 있는데
어제 모임에서 만났던  한 여자 친구와 찍은 사진도 삭제!! ㅎㅎ

혼자 있는 시간이 좋답니다.
이틀 동안 혼자 논 시간이 좋은 글감이 되는 것 같아 글을 쓰고 싶은 의욕을 갖게 한 것이 제일 마음에 드는군요.

배경음악은 서영은의 '비오는 거리'입니다

https://youtu.be/4RVPi8TyH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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