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세일 Mar 31. 2023

그리운 얼굴이 있다.

 낮술 하자고 친구가 전화했기에 1호선을 타고 개봉역에서 내렸다. 삶이 힘들었던 시절 이곳에서 10년 정도 살았고 고등학교 동창인 친구를 만났다. 학교 다닐 때는 별로 친하지 않았지만 같은 동네에 살고 있었기에 자주 만나 가까워진 친구다. 아내는 술 먹인다고 끔찍이도 싫어했지만 내 아픔을 이해하고 걱정해 주었기에 가장 친한 벗이 되었다.


약속 시간이 많이 남아 옛 생각을 하며 걷기로 했다. 역을 벗어나 조금 걸으면 길가에 핀 목련 나무를 볼 수 있는데 세월이 흘러 나무는 자랐고 꽃은 더 크고 화려해져 행인의 눈길을 받고 있다.

   


친구와 잘 다니던 횟집, 호프집을 지나며 세월은 흘러도 술집은 여전하다는 생각에 미소를 짓는다. 개봉동의 자랑거리는 근린공원이다. 800m나 되는 트랙은 우레탄을 깔았기에 걷기에 좋고 무엇보다 내가 좋아하는 도서관이 있다. 햇살이 좋은 날은 공원 벤치에 앉아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추운 겨울에는 도서관의 열람석에 앉아 독서에 열중하던 시절이다.

약속 시간이 30분 정도 남았기에 도서관은 들어가지 못하고 트랙을 천천히 걷는데 목판으로 전시된 시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해 질 녘 그림자가 길어지는 것은

누군가를 향한 그리움 때문이다.’


박상재 시인의 ‘그리움 때문에’ 중에서


꽃이 사방에 만발하고, 햇살이 눈 부시면 사람이 그리워지는데 J가 생각이 났다.

오랜 시간이 지났고 서로의 감정을 확인한 사랑도 아니지만, 예방주사를 맞은 후 약간의 미열에 시달리는 것처럼 감정적인 동요를 가져온 친구다.

난 잘 생기고 키가 큰 멋진 외모의 남자는 아니기에 열등감도 있지만, 여성의 관심을 받았던 시절도 있었는데 책, 영화, 음악 등 내적인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친구들에게는 쬐금 관심의 대상이었다. 인생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던 친구들에게는 대화 상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내 앞에 키가 훤칠하고 눈동자가 까매서 첫인상이 강렬했던 여인이 나타났는데 J다. 30대 초반의 나이에 한 아이의 엄마고 미술을 전공했다. 교회에서 함께 예배를 드렸기에 매주 만날 수 있었는데 여러 면에서 대화하기에 편했다.  특히 우리 딸하고 J의 딸하고 동갑이기에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는데 J의 이혼 소식을 들었다. 교인들의 입방아에 올랐고 그녀는 힘들어하다가 교회를 떠났다. 나도 얼마 후 평택으로 내려왔기에 만남이 끊어지고 말았다.

          


봄비가 내리는 날 의자를 가지고 나와 처마 밑으로 떨어지는 빗소리를 듣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J에요. 잘 지내고 계시죠?”

“응, 잘 지내고 있어?”

“H도 잘 크고 있지?”

“네, 예인이는요?”


이렇게 전화가 연결된 후 J와 만남이 이루어졌다.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있는 몇 개의 에피소드가 있는데 우선 친구들은 나와 그녀와의 만남에 대해 걱정했다.

“이혼녀 하고 유부남의 만남인데 이거 이상한 관계로 빠지는 거 아니야?”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J의 집에서 식사할 때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어둠이 내리기 전 집을 나왔고, 남한강 길을 따라 드라이브할 때는  연인과 같은 느낌을 받기도 했다. 한 호텔의 커피숍에서 처음 에스프레소를 마실 때 그녀가 걱정을 했다. 빈속에 쓴 커피 마시면 속 버린다고... 세월이 지났지만, J와의 만남은 인생에서 몇 개의 컷으로 소중하게 남아있다.


다른 글에서 짧게 언급했지만, J와의 만남에서 마음이 살짝 흔들렸던 때가 있었다.

J는 만남 후 항상 평택의 내 집까지 태워주곤 했다. 고속버스 탄다고 우겨도 굳이 자신의 차에 승차시켰다. 그때도 봄으로 기억된다. 밤 고속도로는 많은 차가 달리다가 정체로 인해 막히면 비상등을 켜서 다른 차에 주의하라는 사인을 보낸다. 그때 모든 차들이 긴급등을 켜고 깜빡거리는 모습을 좋아했는데, J도 비상등을 켜고 기어를 중립에 놓는데 길고 가는 그녀의 손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여자 손이 아름다운 것을 차 안의 어두운 조명을 통해 볼 수 있었다. 밤이고 차 안이고 둘만 있다. 누구든 남자라면 설렘과 흔들림이 있지 않을까?


짧은 순간 손을 잡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잡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또 하나의 본능이 말한다.

“나쁜 짓”


이혼이 가지고 온 정신적 상처, 딸 H에 대한 헌신, 흔들리는 신앙 등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몇 권의 책이 J와의 만남을 의미 있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J와 내가 고흐를 좋아했기에 공감대가 넘치는 이야기가 오갔다. 기회가 된다면 그녀와 고흐 영화를 보고 싶다. 그녀는 고흐의 그림에 대해서, 난 고흐의 삶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눴는데 만남에 의미를 더해주는 시간이었다. 

       


그 후 그녀에 대한 소식은 딸과 함께 홍콩으로 떠났다는 것이 마지막이다. 이제 J도 60대에 들어섰을 것 같다. 다시 만난다면 인생을 함께 걷는 친구가 되었으면 좋겠다. 늙음에 대하여, 지나간 청춘에 대하여, 다가올 죽음에 대하여 등 어쩜 이야기의 소재는 더 풍성하고 웃음은 많아질 것이다.


꽃은 만발하고, 햇볕은 따뜻하고, 마음은 외롭기에 사람이 그리운 날. 낮술을 한다.

고맙게도 한 사람의 이름이 기억나고, J로 인해 얻은 기쁨을 표현할 수 있는데 봄 날꽃향기와 함께 마시는 낮술이 좋은 이유다. 


배경 음악은


Cliff Richard의 ‘Visions’입니다.


https://youtu.be/aLcK3z1wIFo

매거진의 이전글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진행 중일 뿐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