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클라라' 리뷰
이덕희는 그의 책 ‘음악가와 연인들’에서 슈만과 클라라의 사랑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했다.
'평생 독신으로 보냈던 브람스는 오직 클라라만을 사랑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클라라에게 바쳤던 브람스의 짝사랑은 터무니없이 왜곡 과장되었다. 그가 결혼하지 않은 것은 클라라와의 사랑 때문이 아니라 개인적 자유를 희생하며 한 사람에게 완전히 묶어두는 생활을 용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클라라도 언제나 자신이 슈만의 아내라는 사실을 상기시켰고 자신이 브람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모성적 우정뿐이라는 사실을 강조했다고 한다.'
‘사랑은 어떤 경우라 할지라도 순수함을 상실하지 않는 것’이라고 믿는 자신에게 이덕희의 글은 왠지 거부감이 살짝 들었다. 클라라에 대한 브람스의 사랑을 폄하시키는 것은 아닌가? 란 의심이 들기 때문이다.
영화 ‘클라라’를 보면서 가진 기대감은 슈만, 브람스의 음악이나 클라라의 피아노 연주가 아니다. “오직 슈만과 클라라. 브람스의 삼각관계를 헬마 잔더스 감독은 어떻게 풀고 있는가?” 즉 그들의 사랑에 대해서 알고 싶었다.
화부가 열심히 석탄을 집어넣자 내화실의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 장면으로부터 영화는 시작된다.
"클라라(마르티나 게덱)와 브람스(맬릭 지디)의 불타오른 사랑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란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런 사랑은 타오르다 꺼지는 아픔을 가지고 있다. 신(scene)이 바뀌며 서로 손을 꼭 잡고 쪼물락 거리는 두 사람의 모습이 클로즈업되는데 슈만 부부의 행복한 모습이다. 1850년, 로베르트 슈만(파스칼 그레고리)은 클라라와 5명의 자녀를 데리고 독일의 뒤셀도르프 상임지휘자로 초빙받는다. 경제적인 안정을 가져올 수 있었지만 슈만은 지휘보다 작곡에 재능이 있는 사람이다 그는 교향악단과 때때로 마찰을 빚고 정신적으로도 깊은 상흔을 입는다.
그러나 뛰어난 피아니스트로서 기량이 절정에 달한 클라라의 연주는 관중으로부터 찬사를 받는다. 이때 그녀의 연주를 지켜보는 두 남자가 있는데 표정이 대조적이다. 슈만은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결혼반지로 장난을 치다가 그만 떨어트리고 만다. 상기된 표정으로 그녀의 연주에 몰입해 있던 앳된 얼굴의 남자는 반지를 주워 들어 감격한 표정으로 클라라를 쳐다본다. 20살의 브람스다.
3초 만에 상대에게 반하고 인간의 힘으론 거부할 수 없는 없는 운명적인 사랑이 브람스에게 찾아왔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거부할 수 없는 그리움이기에 수많은 상흔을 갖게 되고 파국을 맞는 것이 이 사랑의 결과물이다. 그러나 브람스는 파국이 아니라 그 사랑을 지키기 위하여 자신을 산제물로 바친다. 바라봐야만 하는 사랑의 고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감독은 브람스가 짧은 순간 가지고 있던 클라라의 반지를 슈만이 빼앗는 장면을 연출한다. 이 신이 슈만과 브람스, 클라라의 삼각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생각을 했다.
결혼반지는 언제나 슈만의 손에 끼워져 있을 것이고 그 반지는 두 사람의 사랑에 대한 영원한 증표다. 어느 한순간 사랑이 브람스를 찾아왔다 할지라도 슈만이라는 큰 벽을 넘을 수 없다. 그는 클라라의 남편이고 브람스의 스승이기 때문이다.
어느 날 브람스는 자신이 작곡한 악보를 들고 슈만의 집을 방문한다.
악보를 본 순간 슈만은 브람스의 천재성을 발견하고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한다. 슈만의 가족과 함께 브람스는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이때 슈만 부부의 일기 속에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그의 작품과 연주에 관한 찬사를 적었다고 한다. 이것을 보면 슈만 부부가 얼마나 브람스를 아끼고 사랑했는지 알 수 있다. 브람스 역시 이들 부부에 대한 존경을 아끼지 않았다. 34살이었던 클라라는 여성으로서의 매력이 절정에 다다랐고 무엇보다 그녀는 청중을 감동시키는 탁월한 피아노 실력이 있었다. 젊은 브람스는 그녀의 흡인력에 빠져 헤어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슈만의 정신질환은 점점 도를 더해 환청을 듣고 머리가 쪼개지는 고통 때문에 마약을 투약하다 임종을 눈앞에 두고 있다. 클라라는 지쳐 있었고 브람스는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슈만과의 작별을 준비하라는 브람스의 말에 클라라는 “나 혼자선 못해 나를 도와줘!”라며 그의 어깨에 기댄다. 이때부터 브람스는 여섯 아이의 어머니고 임신 중에 있는 클라라를 도와 가정의 모든 일을 떠맡는다. 이것을 계기로 클라라에 대한 브람스의 사랑은 더 깊어졌을 것 같다.
사랑의 크기는 언제나 상대를 위한 희생으로 가늠된다.
헬마 잔더스 감독은 클라라의 아픔과 브람스에 대한 갈등을 두 사람의 애정신으로 표현한다. 육체적인 관계를 암시하는 장면은 관객의 상상력에 맡긴 채 두 사람의 관계는 오직 서로만이 간직한 비밀로 남겨 놓는다. 흥미본위의 뜬소문을 가지고 우리는 제삼자의 사랑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안주 삼아 이야기한다. 특히 대중에게 알려진 사람의 불륜에 대해서 비난의 화살을 멈추지 않는다. 만약 누군가 클라라와 브람스의 사랑을 난도질하고 대리만족을 얻는다면 사랑에 대한 모독이다. 그러기에 헬마 잔더스 감독은 두 사람의 사랑에 대해 판단을 유보한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 사랑의 아픔을 은연중에 보여준다.
"많은 여인을 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일생 당신만 사랑하겠습니다. 당신이 죽으면 저도 같이 가겠어요. 그 어둠의 세계로 혼자 보내지는 않겠습니다. 그래서 당신을 슈만에게 데려다 줄게요."
브람스에게는 평생 5명의 여인이 있었다고 한다. 클라라에게 한 약속 때문일까?
그는 평생을 독신으로 보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클라라는 ‘브람스의 협주곡 제1번 라단조’를 연주한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브람스는 감격하고 그의 눈에 눈물이 맺힌다. 그 눈물의 의미는 무엇일까? 자신의 곡을 저렇게 아름답게 연주하는 클라라로부터 그녀의 말처럼 모성적 본능을 느꼈기 때문일까? 아니면 비록 자신의 사랑으로 소유하지는 못했지만 이제 그 사랑을 보내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맺힌 눈물일까?
젊었을 때 김형석 교수의 에세이집을 읽고 아직도 가슴속에 묻어둔 문장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의 자유를 구속하기보다는 차라리 내가 눈물을 흘리는 편이 낮지 않을까?”
브람스의 눈물에서 그 사랑의 의미를 본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면서 클라라에 대한 브람스의 사랑이 얼마나 깊었는가?를 알기 때문이다.
'클라라와 브람스는 평생토록 가까이 지냈다.
클라라가 죽은 후 몇 달 지나지 않아 브람스는 약속대로 그녀를 따라갔다.‘
장벽이 높은 사랑이었기에 소유하지는 못했지만 브람스의 사랑은 겉으로 표현된 것보다 훨씬 깊다. 그녀를 옆에서 지켜보면서 타들어 갔을 브람스의 불규칙한 심장 박동소리를 듣는다. 한 사람을 자유롭게 하며 끝까지 지켜보며 한 걸음 뒤에서 그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육체적 소유는 없었다 할지라도 빛나는 정신적 교감이 있었기에 그 사랑은 소중하게 가슴속에 기억이 된다
영화 '클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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