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건복지부는 2020년 기준에 따르면 우리나라 65세 이상 치매 환자는 84만 명으로, 10명 중 1명이 치매로 고통받고 있다고 한다. 2012년에는 65세 이상의 치매환자가 54만 1,000명이었지만 2050년에는 271만 명으로 5배 가까이 증가할 것이란 예측을 했다. 암보다 더 무서운 질병으로 인간에게 고통을 안겨줄 치매는 경제적 부담도 문제지만 가족들이 당하는 정신적 육체적 경제적 고통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정부에서도 발 빠른 대처를 한다고 하지만 현실은 치매 간병인 중 60%가 가족이고 이들 중 30%는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것을 보면 이 질병은 천형(天刑)이라고 일컬어졌던 한센병처럼 가족 구성원의 삶을 잔인하게 파괴할 가능성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
그래서일까?
치매를 소재로 한 영화들이 늘어나고 있는데 수작들도 꽤 있다. 87회 아카데미에서 줄리언 무어에게 여우주연상을 안겨준 ‘스틸 앨리스, 성공한 음악인 부부로 행복한 노후를 보내던 안느와 조르주에게 갑작스럽게 찾아온 치매로 인해 결국은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하는 영화 아무르(Amour). 대중적으로 가장 인기를 얻었던 영화 ‘노트북’도 아름다운 영상과 함께 노아와 앨리의 영원한 사랑을 감동 있게 보여 주었다.
이렇게 치매를 소재로 다룬 영화의 공통점은 아내가 치매에 걸리고 남편은 아내를 위해 헌신적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다.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는다 할지라도 당신을 향한 사랑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는 결론 때문에 영화의 주제는 언제나 희생적인 사랑의 위대함을 찬양한다.
‘어웨이 프롬 허(Away From Her)도 이런 부류의 영화다. 44년 동안 서로를 사랑하며 행복한 삶을 살았던 그랜트(고든 핀센트)와 피오나(줄리 크리스티) 에게 찾아온 치매로 인해 “그들의 삶이 어떻게 변화하는가?”를 심리적 관점에서 그리고 있다. 제목이 의미하는 것처럼 남편 그랜트는 사랑하는 아내 피오나에게서 시간적, 공간적, 심리적으로 떨어져 그녀를 바라볼 수밖에 없다.
아내를 향한 남편의 사랑은 조금 더 변함이 없지만 아니 더 절절한 사랑으로 바뀌지만 치매로 인해 44년의 기억을 조금씩 잃어버리고 있는 아내는 병세가 깊어질수록 남편으로부터 멀어져 간다.
생떽쥐베리 였던가?
“사랑은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이 정의에 알맞게 영화는 하얀 눈으로 덮인 설원 위를 두 사람이 함께 스키를 타고 가는 장면으로부터 시작이 된다. 두 대의 스키가 지나간 설원 위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스키자국을 지나 그들이 살고 있는 작은 집이 원경(遠景)으로 잡힌다. 저녁노을이 먼 산을 황금빛으로 물들이는 시간은 그들이 살아온 시간의 길이를 보여주며 그랜트와 피오나의 남은 삶도 저 노을처럼 어둠 속으로 사라진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저녁을 함께 먹는 시간. 와인이란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 “웨인”이라고 말하는 피오나. 그녀에게 홀연히 치매가 찾아왔다. 검사를 위해 병원을 찾은 그녀에게 의사가 묻는다.
“길거리에서 주소가 적혀있는 편지를 발견했어요? 어떻게 해야 하죠?
‘우체통’이라는 단어를 기억하지 못하기에 피오나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한다. 자신의 코트를 의자에 걸쳐 놓고도 옷걸이에서 옷을 찾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그랜트는 인자한 웃음을 보낸다. 44년간 함께 살아온 아내를 보며
”이제부터 내가 당신을 지켜 줄 거야! “ 라는 의지를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젊은 날의 사랑은 격정적이고 노년의 사랑은 의지적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뜨겁고 정염(情炎)적인 사랑이 지나간 자리는 의지적이고 책임감이 따르고 희생적인 사랑으로 바뀐다. 이것이 영원한 사랑의 모습이다.
‘어웨이 프롬 허’가 감동을 주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기억을 잃어버리고 있는 피오나의 아픔도 공감대가 있지만 자신으로부터 멀어지는 아내를 바라보며 한결같은 사랑을 보여주는 남편의 순애보를 볼 수 있기에 영화는 감동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다.
“생각 하나가 사라지면 모두 사라지고 말아요.” 라며 기억을 잃어가는 아내는 “때가 되었다” 며 스스로 요양병원에 입원하겠다는 의사를 밝히지만 남편은 허락할 수 없다. 왜냐하면 자신이 끝까지 지키고 책임져야 할 사랑이기에 마지막까지 아내 옆에 있고 싶기 때문이다. 그랜트는 말없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반대 의사를 밝히다가 아내의 의견을 존중한다.
적응기간 때문에 피오나를 만날 수 없었던 그랜트는 한 달이 지난 다음날 꽃을 사들고 병원을 찾아 피오나를 봤지만 그의 가슴은 무너진다. 병세가 악화된 그녀는 남편을 알아보지 못하고 나아가 오브리(마이클 머피 분)라는 남자와 사귀고 있기 때문이다. 아내는 남편이 보는 앞에서 그 남자에 대한 절실한 사랑을 아무렇지도 않게 표현한다. 이때부터
“내가 이런 경우를 당하면 어떻게 할까?” 란 생각을 하며 영화에 몰입한다.
아내에게 찾아온 새로운 사랑에 대해 남편으로 질투를 느낀다면 아직 감정적인 사랑이 남아있는 것이리라. 그랜트가 어찌할 바를 모르며 당황해할 때 병원에 있는 간호사 크리스티는 그를 격려하며 힘이 되면서도 그의 착각이 무엇인지 알게 한다.
"여기에서 일하다 보면 깨닫는 것이 많아요. 그중 하나가 남편들은 살아오면서 아내에게 잘해주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아내의 생각은 다르다는 것이지요."
누구나 사람들은 자기중심적이기에 모든 문제의 책임을 상대방에게 돌린다. 누구보다 아내를 사랑했지만 그랜트에게도 한 순간의 과오가 있었다. 교수 시절 자신을 잘 따르던 제자에 한 순간 마음을 빼앗겼던 그랜트는 이로 인해 이혼의 위기도 있었기에 아내가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모습을 보며 자신의 죗값으로 생각한다.
아무리 사랑하며 수십 년을 함께 살아온 부부라 할지라도 왜 갈등이나 아픔이 없었을까?
간호사 크리스티의 한 마디가 마음에 남는 것은 이제 문제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는 성숙한 남편의 모습이 내안에도 있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나이 들수록 사랑 고백은 단순해지는데 “미안해, 고마워, 사랑해”는 세상의 모든 남자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남길 수 있는 가장 진솔한 사랑고백이지 않을까?.
아내가 멀어질수록 그랜트는 자신에게서 문제의 원인을 찾고 결국에는 아내를 위해 자신의 사랑을 포기하는 단계에 이른다. 가슴을 울리는 진정한 사랑의 모습이다.
“우리 시대에 이런 사랑을 가진 부부가 있을까?” 라며 현실의 모습을 부정할 수 있지만
“우리가 읽는 책이 우리 머리를 주먹으로 한 대 쳐서 우리를 잠에서 깨우지 않는다면, 도대체 왜 우리가 그 책을 읽는 거지?”라는 카프카의 말을 인용한 박웅현처럼
좋은 영화는 자신 안에 잠자고 있던 감각을 깨트리며 진정한 삶의 모습을 깨닫게 한다. 그것이 영화의 힘이다. 영화의 결론에 대해 비판적으로 말하는 관객들도 많지만 “미안해, 고마워, 사랑해”란 고백을 진정으로 아내나 남편에게 할 수 있는 부부라면 충분히 공감되는 결론이다.
한 여자를 지극히 사랑했던 사랑의 힘은 충분히 44년 동안의 사랑을 기억할 수 있다고 믿기에 젊은 여자 사라 폴리 감독의 결론을 비판적으로 보지 않는다. 또 하나 영화를 보는 내내 ‘닥터 지바고’의 영원한 연인이었던 ‘라라’가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는데 줄리 크리스티 때문이다. ‘닥터 지바고’에서 지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던 그녀는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서 예쁘게 나이 들어 더욱 매력적인 여배우의 기품 있는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부부가 함께 보면 좋은 영화다. 기지가 있는 남편이라면 아내의 손을 잡으며 “미안해, 고마워, 사랑해”란 한마디의 고백을 넌지시 흘려도 좋겠다는 생각을 갖는다. 아내는 영화를 통해 이미 진정한 사랑의 힘을 알았기 때문이기에 쉽게 마음이 무너지리라.
배경 음악은
'어 웨이 프롬 허' 의 OST는 아니지만 누군가 이 영화에 맞게 편집한 것 같군요. 근데 잘 어울리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