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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세일 May 19. 2023

다시는 신의 이름을 들먹이지 마라

영화 '더 스토닝' 리뷰

모세의 율법을 인용하며 간음한 여자를 돌로 치려는 무리들 앞에서 예수는 그 자리에 앉아 손가락으로 땅에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그리고 하는 말이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지라."라고 한 후 계속해서 예수는 땅바닥에 글을 쓰고 있었다. 그러자 유대인 지도자들부터 한 사람씩 슬그머니 빠져나갔고 그 여자 앞에는 오직 예수만 남았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며 예수는 그 여인을 용서했다. 신약성경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말씀이다.


예수가 땅바닥에 무슨 글씨를 썼기에 그렇게 흥분한 무리들이 다 물러가고 만 것일까?

그 여인과 간음한 사람들의 이름을 한 사람 한 사람씩 써 내려갔다는 것이다. 물론 유머다.


‘더 스토닝’을 보면서 문득 이 여인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 무리들은 순진하다는 생각에 미소를 지었다. 지금 같으면 “증거 있어?”라며 더 길길이 날뛰며

아마 예수를 돌로 치려하지 않았을까? 란 상상도 해본다.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시대,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타락한 사회. 이런 부정적인 생각들을 하며 화면에 집중한다. 영화는 관객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분노가 치밀도록 괴기영화를 보는 것처럼 음산하게 시작된다. 그리고 영화의 서두에서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것을 분명히 밝힌다. ‘더 스토닝(돌로 사람을 쳐서 죽이는 형벌)’은 요한복음 8장의 말씀처럼 간음한 여인을 돌로 쳐 죽이는 형벌을 소재로 만들었다. 그러나 영화는 예수의 유머도, 순진한 무리도 없는 대신 악의 중심축에 서있는 남편과 위선적인 종교지도자. 우유부단한 정치인, 어리석은 무리들이 함께 어울려 인간성을 상실한 죄악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사실적 화면으로 보여준다.


“여러분이 저 여자에게 돌을 하나씩 던질 때마다, 우리 마을의 명예가 회복될 겁니다!”

위선적인 종교 지도자의 선동의 말에 분별력을 잃은 무리들은 마치 선을 대표하는 것처럼 증오의 돌팔매질을 한다.



사이러스 노라스테 감독은 “책을 읽으며, 만약 이런 일들이 정말 일어나는 일이라면, 누군가는 이 일에 대해 불빛을 밝혀야 한다. 어떻게든 전 세계의 사람들이 반드시 알아야 한다"라고 생각했다며 자신이 이 영화를 연출한 목적을 분명히 한다. ‘스토닝’만이 아니라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 등 전 세계에 걸쳐 자행되고 있는 인권유린, 돈 때문에 벌어지는 살인사건이나 폭력, 인신매매 등의 사건들을 열거한다면 수십만 편의 영화가 만들어진다 해도 모자랄 것 같다. “저주받은 팔레비 왕조가 무너진 다음 이란에는 급속한 변화가 있었다!” 며 호메이니 정권이 자신들의 치적을 자랑하는 방송이 나오자 이란계 프랑스 기자 ‘사헤브잠’(제임스 카비젤 분)은 라디오를 끈다. 그 이유는 이 정권은 팔레비 왕조보다 더 무섭게 국민의 인권을 탄압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란정부는 공식적으로 스토닝(투석형)을 없앴지만 한적한 시골 마을인 쿠파이예는 아직도 투석형이 알라신의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었다.


자동차 고장으로 인해 사헤브잠은 어쩔 수 없이 이 마을로 들어와 자동차 수리를 맡기는데 여느 마을과 다른 느낌을 받는다. 이때 검은 머리, 검은 눈, 검은 차도르로 치장한 자흐라(쇼레 아그다쉬루)가 사헤브잠에게 접근한다. “이 마을에는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가 있어요?”라며 자흐라는 기자의 취재본능을 자극한다. 그녀의 표정은 단호하고 허스키한 목소리는 카리스마가 있다. “이것은 악마의 소행이며 절대로 묻혀서는 안 된다.”는 그녀의 말에 진실성이 있다는 것을 직감한다. 이때 이 지역의 권력자인 시장과 성직자인 하산이 다가와 “그녀는 미쳤다”며 두 사람에 끼어든다. 마을 사람들의 눈을 피해 자흐라의 집을 찾은 사헤브잠은 충격적인 소식을 듣는다. 소라야의 남편인 알리는 14살 먹은 어린아이를 새 부인으로 얻고 싶어 아내 소라야(모잔 마르노)를 외간남자와 간통했다는 음모를 씌워 죽였다는 것이다. 알리에게 약점을 잡힌 위선적인 성직자 하산과 진실보다는 자신의 자리를 더 소중히 여기는 우유부단한 시장 에브라힘을 비롯해 어린아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마을 주민 모두는 알라신의 이름으로 소라야를 돌로 쳐 죽인다.



난 범죄 중에 가장 더럽고 추악한 것은 신의 이름을 빌려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욕하고 싶다) 신의 대리자처럼 행동하는 그들의 행위는 신의 속성과는 가장 먼 모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의 절정에 보이는 처형장면은 끔찍할 정도로 사실적이기에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한 분노로 치를 떤다.  


아무것도 모른 채 소라야를 처형하기 위한 돌을 줍는 아이들,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한 마을 주민으로 함께 살았던 이웃들이 소라야를 처형하기 위해 마을의 공터에 모인다. 시장은 그녀의 간통혐의를 인정하며 사형을 선고하고 마을주민들도 한 목소리로 사형을 외친다. 시장은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할 말이 없냐?”라고 묻는다. 소라야의 최후 진술이 시작된다.
"어떻게 이럴 수 있죠? 날 모르는 사람들 같군요. 난 소라야입니다. 여러분 집에도 갔었고, 음식도 나눠먹었고 우린 친구였죠.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나요? 어떻게 사람한테 이럴 수 있나요?" 그러자 마을 사람들이 외친다. "이건 신의 법이고, 신은 위대하다. “ 


이란의 법은 ‘남편이 아내를 고발하면 아내는 자신의 무죄를 증명해야 된다. 반면에 아내가 남편을 고발하면 아내는 남편의 죄를 증명해야 된다.’ 이것이 알라신의 뜻이란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악이다. 기독교나 그 밖의 모든 종교는 신의 이름으로 그들의 죄를 정당화했다. 그런데 아직도 이런 일들이 자행된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자흐라의 표현대로 이 영화 속에는 자신들의 탐욕을 위해 마을 주민들을 선동하는 거짓성직자와 우유부단한 시장과 그들의 말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마을 주민들은 모두 늑대와 같다.
특히 정의와 불의를 구별 못하는 마을 주민들의 어리석음이 마음속에 아픔으로 다가온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깨어있어야 정의가 강물처럼 흐를 텐데…….”란 생각 때문이다.



영화 ‘도가니’를 보고 나오면서 “지랄들을 한다!”는 대사 하나가 가슴속에 깊이 박혔는데 세상은 ‘지랄’이라는 단어로는 수위가 너무 낮은 삶을 누리는 저열한 인간들로 가득 차 있기에 가슴에 증오를 품는다. 문제는 증오만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데 있다. 알고 있지만 해결방법이 요원하기에 우리 시대는 악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슴앓이만 한다.


그러나 세상에는 악과 싸우는 사람들도 있다.

이 영화의 원작자인 이란계 프랑스 저널리스트 “프리든 사헤브잠”, 참혹한 투석형을 당하는 소라야, 마을사람들의 탐욕, 위선, 거짓, 음모를 프리든 사헤드람에게 전해주는 자흐라 같은 용기 있는 사람들이 있기에 우리의 미래에 대해 희망을 걸기도 한다. 아무리 어둠이 깊다 할지라도 한줄기 빛만 있다면 어둠을 물리칠 수 있는 것처럼 우리 시대에 필요한 것은 의식이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이다. 가면 갈수록 정치나 종교보다 시민사회에 더 많은 기대를 거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도 그 대열에 꼭 들어야 한다는 교훈도 얻는다. 소라야가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땅에 떨어졌기에 관객들은 그 열매를 보며 감동하고 애도의 눈물을 흘리는 것이 이 영화의 가치다.


영화 '더 스토닝' 예고편

영상입니다.




https://youtu.be/QzieuuZ7cY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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