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한 영혼의 아름다움을 만나다

영화 '천국의 아이들' 리뷰

by 이세일

불완전한 느낌을 주는 김동율과 이적의 노래 ‘그땐 그랬었지’

‘어렸기에, 뭘 몰랐기에’로 표현되는 어설펐던 시절을 잘 표현하고 있다. 참 어렸던 시절 지금은 초등학교라고 부르지만 그때는 국민학교였다. 아이들의 얼굴은 마른버짐으로 인해 피부는 하얗게 일어났고 흘러내리는 누런 콧물을 닦았기에 옷소매는 항상 더럽혀져 있었다. 바보 영구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땜통 머리는 그 시대의 자화상이라고 할만하다. 그러나 비록 가난에 찌들었지만 아이들의 얼굴 표정은 맑았고 누런 이빨 사이로 보이는 미소도 그리 흉하지 않았다.


이때는 초등학교도 멀리 있었기에 대부분의 아이들이 학교까지 걸어 다녔다. 자신도 청량리에서 종암동까지 걸어서 등교를 했는데 두 살 터울인 여동생과 함께 집을 나설 때 엄마는 항상 “입이 심심하다”며 땅콩과 오징어를 간식으로 싸주셨다. 여동생과 함께 그 먼 거리를 걸어 다녔지만 힘든 줄 몰랐다. 왜냐하면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 정도의 거리는 산보하는 것처럼 걸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5학년때부터 만화에 빠지기 시작했다.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언제나 만화방에 들렸는데 지금도 웃음이 나는 것은 본인은 만화를 봐도 괜찮지만 동생은 교육적으로 안 좋다는 기특한 생각 때문에 여동생은 만화방 밖에서 오빠를 기다렸다. 얘도 참 바보지, 화를 내며 자신도 보게 해 달라고 큰소리를 치던지, 아니면 먼저 집으로 가던지 할 수 도 있었지만 동생은 언제나 오빠를 기다렸다. 집으로 가는 길에 신이 나서 만화의 줄거리를 이야기해 주면 누이동생도 웃으며 좋아했던 기억이 있다. ‘천국의 아이들’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우리나라의 60년대의 모습이라고 할까?


처음 접하는 이란 영화이기에 호기심도 있었고 몬트리올 영화제에서 3개 부문(그랑프리, 관객상, 기독교협회상)을 석권했고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에 노미네이트 되는 영광을 얻었다는 사전 지식이 있었기에 인터넷에서 이 영화의 감독인 마지드 마지디(Majid Majidi)를 검색했더니 1990년대 이란 영화계를 이끌어가는 3세대 대표 감독이라고 나온다. 메인 영화제는 아니지만 해외 영화제에서 잇달아 수상의 영광을 누렸기에 전 세계 영화인들에게 그 이름을 각인시켰다고 한다.


영화는 가난했던 우리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는 친근한 장면부터 시작이 된다.

기름때로 가득한 할아버지는 부지런히 손을 움직여 옆구리가 터진 자라의 분홍색 구두를 수선하는데 마법사의 손길을 거친 것처럼 화려한 모습으로 태어난다. 초등학생인 알리는 여동생 자라의 구두를 받아 들고 신나게 야채가게로 향한다. 엄마의 심부름을 하기 위하여 동생의 구두를 문 앞에 있는 틈에 놓고 감자를 구입하고 있는데 쓰레기를 수거하던 아저씨는 검은 봉지 속에 담겨있는 자라의 신발을 폐기물로 알고 가져가 버린다. 여동생에게 하나밖에 없는 구두를 오빠가 잃어버린 것이다. 고개를 푹 숙인 알리가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자 자라의 큰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학교에 신고 갈 신발이 없기 때문이다. 가난한 알리의 부모는 딸에게 신발 한 켤레를 사줄 능력이 없다는 것을 오빠는 알기에


"울지 마. 오빠가 찾아줄게. 그때까지 오빠 운동화를 함께 신자……."


며 동생을 안심시킨다.


이렇게 가난한 아이들을 소재로 한 영화의 특징은 주인공 어린이들이 무척 잘 생겼다는 것이다. 아마 관객들은 아이들의 얼굴을 보면서 동정심을 느끼고 혀를 차며 눈물을 흘린 것이다. 아이들은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어디 하나 나무랄 데 없는 외모를 가지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것은 눈이다. 쌍꺼풀진 큰 눈은 자신들이 얼마나 선한지 보여준다. 또 하나 가난하지만 그들의 피부는 내 어렸을 때의 모습과는 달리 매우 깨끗하다. 환경은 가난하고 불결했지만 주인공은 옷만 좀 남루할 뿐이지 얼굴만 본다면 어느 귀공자 부럽지 않을 정도로 잘 생겼다. 인도의 가난한 아이들이 주인공인 ‘스탠리의 도시락’에서도 쌍꺼풀진 아이의 큰 눈동자가 영화를 이끌어 간다고 할 정로로 매력이 있었다. 가난한 현실에 맞지 않는 주인공의 모습이지만 그것을 가지고 관객들이 시비를 걸진 않는다.


오빠의 운동화를 같이 신게 된 오누이는 오전반인 자라가 수업이 끝나자마자 달려오면 알리는 그 운동화를 신고 학교까지 달리기 시작한다. 그래도 번번이 지각을 하다가 어느 날 교장 선생님에게 걸리고 만다. 자신의 사정을 말할 수 없기에 알리는 변변한 거짓말도 못하고 땀만 흘리고 있다. 반복된 지각으로 분노한 교장선생님은 두 아이를 퇴학시키려 한다. 영화 속의 현실은 슬프지만 아이들은 가난 속에서도 순수하고 아름답게 커가는데 이 영화의 감동이 여기에 있다. 경제 성장을 이룬 우리의 아이들은 가난 없이 자랐기에 라떼 시절 이야기는 모르고 있다.


수돗물을 받기 위하여 한나절을 온 가족이 양동이 하나 가지고 줄을 서던 시절, 공동변소를 이용하기 위하여 한 손으로는 신문지를 들고 또 한 손으로는 똥꼬를 쥐고 달리던 시절을 알지 못한다. 어린 시절 아이들은 가난에 찌들었지만 돈으로 편을 가르지 않았고 힘없는 아이를 못 살게 굴지 않았다. 그 누구도 나이키나 노스페이스를 입지 않아도 불행하지 않았다. 똑같이 가난했기에 그 누구도 부를 가지고 자신을 뽐낼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의 아이들은 돈으로 큰다. 일 년에 수천만 원이 드는 유치원에 입학하기 위하여 가진 자들은 법을 어기는 편법을 사용하고, 없는 자들은 분노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들을 부러워하는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


“나도 돈만 있다면 우리 아이를 그 학교에 입학시키는 것인데…….”


대부분의 부모가 가지고 있는 소망이다. 과거에 비해 풍요로워진 물질은 우리의 정신을 좀 먹고 말았다. 아이들의 동심은 사라지고 웃자란 아이들은 어른과 똑같은 문화를 누리기 시작했다. 과학자가 되는 꿈보다는 연예인이 되는 것에 더욱 익숙해진 아이들. 외모는 그 아이가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무기가 되었기에 오늘도 겉모습을 꾸미는 치장에 익숙하다. 가볍고 육체적이고 즉물적인 삶에 익숙한 아이들에게 정신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그러나 가끔 영화는 이런 삶의 모순을 잔잔히 보여준다.


'천국의 아이들'이 가치 있는 것은 무엇보다 순수한 영혼의 아름다음을 만나기 때문이다. 때로는 티격태격하지만 서로를 아껴주는 오누이의 모습 속에서 베어나는 진한 사랑에 가슴이 촉촉이 젖는다.


어느 날 어린이 전국 마라톤 대회가 자신의 마을에서 열린다는 것을 선생님이 알려주신다. 참가할 학생은 신청하라는 말에 알리는 지원 한다. 그 이유는 3등의 상품이 운동화이기 때문이다, 3등만 할 수 있다면 동생은 새 운동화를 신고 좋아할 것이다.


“그래! 동생 자라를 위해 뛰겠어.”


오빠 알리의 기특한 생각이다.


여기에 감독의 메시지가 있다. 우리는 누구나 1등을 목표로 달리고 세상은 1등만 기억한다. 그것이 욕망이다. 야욕을 이룬 사람은 찬사의 대상이지만 반대의 부류는 낙오자로 몰리는 세상 속에서 살고 있기에 생존경쟁은 무서운 것이다. 그러나 감독 마지드 마지디는 악착같이 일등을 하려고 애쓰는 삶보다 자신에게 꼭 필요한 만큼만 원하고 누리는 삶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자신만이 가질 수 있는 삶의 가치를 꿈꾸며 살아가는 삶,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일등도 기꺼이 양보하며 조금 느리게 천천히 걷는 삶의 고귀함을 이 영화는 보여준다.


드디어 마라톤 대회날 알리는 3등을 목표로 달린다.

다른 아이의 욕망 때문에 넘어지는 위기도 있지만 알리의 눈에는 3등 상품으로 받은 운동화를 보며 즐거워할 동생을 생각하며 최선을 다한다. 이윽고 결승점을 4명의 아이가 동시에 들어선다. 1등인지 3등인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인데 알리가 반문한다.


"3등 아닌가요?"


아쉽게도 알리가 일등이다. 조금도 기쁘지 않은 아이의 표정은 시무룩하다. 그에게 1등은 의미가 없다. 힘없이 고개를 숙이고 집으로 돌아온 알리 앞에 자라가 예쁜 미소를 지으며 맞이하지만 알리의 발에 신겨진 낡은 운동화를 보며 아무 말도 건네지 않는다. 영화는 슬프다. 알리는 빈속을 수돗물로 허기를 메꾼다. 마라톤을 하느라 더 낡아버린 운동화를 벗자 알리의 물집 잡힌 발이 보인다. 그 발을 마당의 작은 연못에 담그자 금붕어들이 달려와 입맞춤을 하면서 유영을 즐긴다. 금붕어들이 알리를 격려하는 것 같다. 아무것도 변화되지 않았고 이룬 것도 없는 것처럼 영화는 슬프게 끝나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 마음이 푸근한 것은 힘든 현실 속에서 조금 더 변하지 않은 알리와 자라의 미소를 보기 때문이다. 그 미소가 사라지지 않는 한 아이들은 행복하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알리와 자라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지만 우리는 미소를 잃어버렸고 욕망을 이룬 환한 웃음에 매료당하고 있다. 우리의 영혼이 병들어 있다는 증거다. 나의 증세를 알았다면 이 영화는 가치가 있다. 욕망의 포로가 되는 삶이 아니라 영혼이 안식하는 삶이야말로 우리가 꿈꾸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배운다.



영상은

방구석 1열에서 소개한

'천국의 아이들'입니다.


https://youtu.be/5fSJI2kqj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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