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여울 '마음의 서재' 리뷰
‘마음의 성욕, 또는 ’ 마음의 돈’
이런 단어의 조합이 어울릴까?
마음은 아침 햇살을 머금은 이슬처럼 영롱하기에 순수가 핵심이다. 그러기에 성욕이나, 돈과 같은 육체적인 것으로 물들일 수 없다. 마음은 영혼이나 정신과 어울리기에 정기적으로 청소를 해야 한다. 정여울의 ‘마음의 서재’는 책을 읽기에 앞서 자신의 마음을 성찰해야 할 필요성을 깨닫게 하기에 영혼을 맑게 해 주는 책이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만의 서재를 꿈꾼다.
김포로 이사 왔을 때 딸아이는 아빠를 위해 고급스러운 책장을 만들어 주었다. 예전에 비해 규모는 줄었지만 지금도 내 시선이 머무는 곳이다. 어쩔 수 없는 현실의 장벽 때문에 애지중지하던 대부분의 책을 버렸지만 지금은 인문학과 예술, 글쓰기, 독서법 등에 관한 책으로 서재가 꾸며져 있다. 이북으로는 아직도 수천 권의 책을 가지고 있지만 장서가로서의 기쁨은 사라진 지 오래다. 메이커 옷을 사고 싶은 유혹을 떨쳐 버리고, 아내의 눈치를 보면서 구입했기에 책장에는 자신이 지나온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조금 더 섬세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면 책의 첫 장마다 이런 구절도 적었으리라.
“동대문표 의류 구입하고 차액으로 산 책이기에 육체보다 정신이 황홀했다.”
멋지지 않은가?
이런 사연들 때문에 어떤 경우라 할지라도 책은 자신과 생사고락을 함께한다. 젊었을 때 읽었던 윤흥길의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의 권 씨처럼 책은 자신에게 남아있는 마지막 자존심일지 모른다.
세월이 흐르면서 책은 자신의 마음을 추억으로 물들이며 켜켜이 쌓여있다. 예쁘고 길쭉한 손가락으로 반주를 하던 소녀의 마음을 빼앗으려고 글자만 읽었던 ‘고도를 기다리며’ 나 카프카의 ‘성’을 그 아이 앞에 툭 던지며
“읽어봐”
라며 부렸던 만용은 지금도 얼굴을 붉게 한다. 그렇다 몇 권의 책은 고전이고 명작이라는 이유보다 자신이 살아온 지난 시절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기에 소중하다.
붉은색이 강렬한 이 책의 표지를 유심히 들여다보며 빈 나무의자에 눈길이 머무는 것은 이제는 저 의자에 앉아 지난 시절들을 그리워해도 괜찮은 나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내 마음의 서재에는 그렇게 많은 책이 필요 없다. 나의 정신을 살찌우게 했고 영향을 주었던 몇 권의 책이 가지런히 놓여 있으면 좋겠다. 저자 정여울은 그래서 부제를 ‘나만의 도서관을 향한 인문학 프로젝트’라고 붙이지 않았을까?
그런데 난 인문학 프로젝트란 말이 싫다. 작위적인 냄새도 나고 요즘 트렌드이기에 억지로 붙인 것이 아닌가?라는 의심이 들기 때문이다.
‘마음의 도서관, 이나 ’ 마음의 서재‘가 오히려 감성적이기에 저자가 분류한 7가지의 목차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한다. 이유는 많은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인간의 근본적인 가치에 대해 말하기 때문이다.
’ 사랑, 삶, 현재, 아픔, 세상, 생각, 마음‘ 등이라는 7개의 단어는 우리 삶의 근간을 이루는 키워드다. 그러기에 저자는 스스로 이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 작품이 어떤가 ‘를 쓰면서 사실은 그 작품을 그렇게 보는 나 자신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비평은 ’이 글은 온전히 내 것이다 ‘라는 명제에서 오는 심리적 부담을 줄이면서 ’ 사실은 내 것‘을 털어놓는 글쓰기, 그러니까 감추면서 드러내는 글쓰기다’ (에필로그에서)
정여울의 책을 선택할 때는 이유가 분명하다.
“평론가는 어떻게 책을 읽을까?, 어떻게 그 내용을 글로 쓸까?”
그녀만이 가지고 있는 책 읽기와 글쓰기를 배울 수 있는 있다는 기대감이 정여울을 좋아하는 이유다. 그녀는 이 책의 서문에서
‘나는 잠시 새로운 책에 대한 조바심을 내려놓고 오직 내가 읽은 책으로만 이루어진 작고 아름다운 마음의 도서관을 가꾸기로 했다'.
중요한 것은 ‘읽어가지는 것’이 아니라 ‘퍼트려 나누는 것’이 아닐까.
이 책은 ‘책에 대한 책’이 아니라, 책과 함께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는 이들을 위한, ‘세상에서 가장 작은 내 마음의 도서관’이다.‘라고 말한다.
본인의 말처럼 이 책은 내가 원하던 책 읽기나 글쓰기의 방법론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꿈꾸는 아름다운 세상에 공감하고 자신도 그 세상의 주민이 되어 누리는 기쁨만 있으면 된다. 감성적인 책에 굳이 인문학이라는 용어가 들어갈 필요가 없는 까닭도 된다. 이 단어만 제거된다면 ’ 마음의 서재‘는 정여울 특유의 감성과 지성이 잘 어우러져 있다. 그녀가 소개한 ’ 이반 일리히의 유언‘ 은 저자의 표현처럼 책이 나를 골랐기에 선택의 기쁨과 무거운 압박감으로 읽어야 할 책이다.
가톨릭 진보 신학자인 일리히는 암에 걸렸지만 10년 동안 병원 치료를 거부하고 ’ 스스로 고귀해지는 길‘을 선택한 이 시대의 현자라고 불린다.
그는 세속화된 교회권력에 대항하는 운동을 전개했기에 로마 교황청에게는 눈엣가시였다. 마침내 파문을 당했는데 신부로서의 삶이 아니라 예수의 모습으로 세상을 보았기에 그는 고결하다. 저자는 그를 통해 ’ 나를 파괴하는 사랑이야말로 내가 한 번도 끝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사랑임을 알게 되었다 ‘라고 고백한다. 저자를 통해 처음 ’ 일리히‘라는 이름을 알았지만 쉽게 마음을 빼앗기는 것은 완전히 타인인 사람들을 예수의 사랑으로 돌봐야 하는 것이 아가페적 사랑의 완성이라는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이렇게 ‘마음의 서재’는 모든 책이 가지런히 꽂혀있는 곳이 아니라 자신이 특별히 선택한 책들이 있는 곳이다. 내 인생에 영향을 주었던 사람, 아픔과 그리움으로 남아있는 추억을 생각나게 하고 자신의 인생을 성숙시켜 준 계기가 된 책들에 대한 애정을 담아놓은 나만의 서재다. 보이지 않는 마음속에 있기에 개방되지는 않지만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기꺼이 마음을 열고 함께 머물고 싶은 공간이다. 방안에 진열된 서재는 은근한 자기 자랑이 될 수 있지만 마음의 서재는 부끄러움이 앞선다. 그곳은 육체의 더러운 것들을 용납하지 않고 순수한 정신과 맑은 영혼만이 머물 수 있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지식보다는 성찰을, 이론보다는 행동이 소중한 가치로 남아있는 곳. 오늘 이 서재를 다시 만들고 싶다면 정여울의 속삭임이 통한 것이다. 그래서 마음은 미소를 짓는다.
빗소리에 잠을 깨 창문을 여니
"좋다"
란 감탄사가 나온다
배경음악은 김현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