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머신건 프리처' 리뷰
영화는 끔찍한 학살로부터 시작된다.
마을은 불타고 아이와 어른 할 것 없이 총질을 당하고 비참한 죽음을 당한다. 그것도 모자라 겁에 질린 아이를 끌고 와 “엄마를 죽이지 않으면 네가 죽는다.”라고 위협하며 아이의 뺨을 칼로 찢는다. 그 광경을 본 엄마가 절규한다. 엄마는 눈짓으로 “나를 죽이고 네가 살라!”라고 말한다. 아이의 손에 들려진 몽둥이가 엄마를 향해 내리쳐진다. 아프리카 수단에서 일어난 현실이다.
조셉 코니와 그가 이끄는 신의 저항군은 이렇게 잔인한 방법으로 북우간다와 남수단에서 학살을 잔행 했다. 40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4만 명의 아이들이 유괴되거나 죽었을 것이라고 국제 인권단체 앰네스티는 추정한다. 살아남은 아이들은 소년병으로 전쟁터로 끌려갔고 여자 아이들은 매춘을 강요받으며 참혹한 현실을 살고 있다.
석유가 나지 않는 땅이어서 그런지, 아니면 군사적으로 전략적 가치가 없기 때문인지 미국을 비롯한 그 어느 나라도 수단의 내전에 간섭하지 않았다. 한 사람이 그 비참한 현실을 보고 분연히 일어났다. 샘 칠더스 목사다.(제라드 버틀러) 그의 과거는 싸움과 마약에 익숙했고 스트립 댄서인 아내가 번 돈으로 먹고사는 버러지 같은 인간이었다. 남편이 출소했을 때 아내 린(미셀 모나한)은 스트립 댄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일이기에 그만두었다며 교회에 나간다고 말한다. 그는 불같이 화를 내며 술집으로 달려가 총을 들고 마약 판매상의 집을 급습해 마약을 강탈한다. 약에 취한 그는 우발적인 살인을 저지르고 죄책감에 시달린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샘은 아내와 딸과 함께 교회에 출석을 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건축가로 시작된 샘의 사업은 안정적이 되었고, 토네이도가 동네를 휩쓸고 지나갔을 때는 가족이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아슬아슬한 순간이 있었다. 이런 체험은 샘의 믿음을 더욱 깊게 했고 마침내 목회의 길을 간다. 이때 그는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자신의 은사를 살려 수단으로 집짓기 봉사활동을 떠난 샘은 아이들이 납치되어 팔려가거나 여자아이들은 강간을 당하고 매춘에 빠지는 현실을 보고 경악한다. 귀국한 샘은 사비를 들여 수단의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고아원을 짓는다. 그는 설교를 통해 만나는 사람마다 수단의 현실을 말하고 선교헌금을 모금하는 일에 앞장선다. 마침내 그의 꿈대로 고아원은 완성되었고 수용된 아이들은 짧은 평화를 누린다. 그러나 반군의 습격으로 인해 한순간에 고아원은 불타고 샘은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총을 든다. 반군으로부터 어린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총을 들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인정한 것이다. 목사가 정당방위를 위해 AK47 소총을 들었기에 세상은 그를 ‘머신건 프리처’라고 부른다.
샘은 마치 영화 ‘미션’의 로드리고(로버트 드 니로) 수사와 같다.
한 사람은 마약쟁이, 또 한 사람은 노예 중계상이라는 어두운 과거를 가지고 있고. 누군가 생명을 바쳐 보호해야 할 연약한 사람들을 위해 희생하고, 칼과 총의 힘을 빌려 자신의 목적을 달성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영화 ‘미션’에서 무저항과 기도라는 방법을 통해 자신의 믿음을 증명했던 가브리엘 신부는 무력을 앞세우는 로드리고 수사의 방법론에 찬성하지는 않지만 자신의 십자가 목걸이를 전해주며 무언의 지지를 보낸다. 롤랑 로페 감독은 누구의 방법이 옳다고 말하지 않는다.
아니 두 방법이 다 옳기에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를 들어낸다고 말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신앙의 회색지대에서 일어나는 문제는 교리적인 판단보다 양심이 우선하기 때문이다. 성상을 앞세우고 포탄 속으로 들어가는 가브리엘 신부나 칼을 들고 싸우다 장렬히 전사하는 로드리고 수사는 방법론은 달랐지만 자신의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길을 걸었다.
샘 칠더스 목사는 이렇게 외친다.
"만약 당신으로 인해서 누군가의 생명이 보장받는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입니까?
내가 하는 일이 전부 옳다는 것은 아니지만 만약 당신의 아이를 납치범들에게서 구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면 그때는 이야기가 달라지지 않을까요?
아이들을 위해 총을 든 내 행위가 죄악이라면 죽어서 당당히 지옥에 가겠습니다."
조심스럽지만 방법에 관한 것은 인간이 판단할 문제는 아니란 생각을 한다.
인간의 눈에 보이는 추악함과 더러움이 있다. 쉬운 예를 든다면 성경은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것을 죄라고 말하지만 지금은 은행으로부터 시작해 돈 관계에서 이자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 교리를 버리고 물질적 이익을 취하는 것을 죄라고 느끼는 사람이 있을까?
소수겠지만 교리를 안 지키면 양심의 거리낌 때문에 이자를 받지 않는 기독교인을 알고 있다. 뇌물을 주고받는 것을 당연시하던 시절에도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는 것이라고 믿는 친구는 단호히 유혹을 거절했다. 죄를 지으면 양심이 소리를 친다. 영화를 보며 부끄러움이 일어난 이유도 샘 칠더스 목사의 편에 쉽게 서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기 때문이다. 샘의 사역은 점점 더 커지고 있지만 재정적 압박은 더욱 심해진다. 샘은 물질적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지역의 유지인 빌을 찾아가 도움을 청한다. 그는 이 지역의 사람도 경제적으로 어렵다며 샘이 요청한 5천 달러의 헌금을 완곡히 거절하며 조금 기다려보라는 여운을 준다. 다음 주 빌의 집에서 있는 바비큐 파티에 초청을 받은 샘은 궁전과 같은 그의 집을 보며 놀란다. 웃는 낯으로 다가온 빌은 샘에게 하얀 봉투를 건넨다. 설레는 마음으로 봉투를 개봉한 샘은 분노한다. 그 속에는 단돈 150달러가 들어있다. 극도로 흥분한 샘은 파티 장을 빠져나온다.
다시 수단에 돌아온 샘이 가장 행복한 때는 해맑게 웃는 아이들의 모습을 볼 때다.
그러나 샘은 믿음을 잃기 시작한다. 그는 지쳤고 거칠어졌고 드디어는 하나님을 원망하는 불신앙적인 목사가 된다.
누가 샘 칠더스를 불신앙의 사람으로 만들었나?
하나님일까?
아니다.
자신의 것을 조금도 희생하지 않으며 샘의 사역에 철저히 무관심한 사람들이 샘 칠더스 목사를 절망으로 빠지게 했다. 영화를 보면서 가슴이 무거워진 이유다.
“우리 아이가 팔려간 것도 아닌데, 우리 아이가 죽은 것도 아닌데, 더군다나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일도 아니고 이름도 생소한 수단이란 나라에서 일어난 일인데…….”
이런 생각이 변명처럼 자신의 마음을 파고든다.
샘 칠더스 목사의 말처럼 내 자식이나 식구에게 이런 일이 있어났다면 누군들 총을 들지 않을까?
롱컷으로 잡은 영화의 엔딩 크래딧은 길게 이어진다. ‘크리스 코넬’의 노래와 어쿠스틱 기타 반주와 함께 들려지는 노래 'The Keeper'는 서정적이기에 마음이 차분해지는데, 화면에는 다큐멘터리처럼 수단의 끔찍한 현실과 샘 치킨스 목사의 사역을 생생한 영상으로 보여준다. 그 비참한 현실 속에서도 환하게 빛나는 수단 아이들의 웃음과 미소가 한편으론 가엽다. 또 언젠가 저들에게 다가올 학살과 만행이 두렵기 때문이다.
영화가 끝나자 창문으로 보이는 하늘을 봤다. 그리고 샘 칠더스 목사를 위해 짧게 기도했다. 누군가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 그의 사역에 동참한다면 그는 돌아올 것이다. 교리보다 무서운 것은 양심이다. 나의 양심이 죽었기에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것이 두려움의 극치다.
https://youtu.be/acPqDCZWR4s?si=8rahGO6UCLxUJBW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