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는 시와 음악이야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며

by 이세일

한때는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책과 CD를 사는 것이 삶의 즐거움이었는데
책은 명맥을 이어 오지만 어느 날부터 음악은 서서히 삶의 중심에서 멀어졌습니다.
오디오도 처분했기에 요즘은 컴퓨터에서 음원으로 음악을 듣습니다.
소장해 두었던 클래식 CD도 용돈 아끼고 아껴서 구입해 놓았지만, 세월이 흐르니까 기름때가 끼어 쓰레기통에 집어넣었습니다.
11월이 오니까 시집 몇 권과 클래식 CD 몇 장이 그리워지는군요!

책꽂이에서 이정하의 시집이 보여서 꺼냈습니다.
이정하는
가을에 가장 어울리시는 시인이고,
이별의 아픔을 노래하는 데는 천부적인 감수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너를 새긴다.
더 팔 것도 없는 가슴이지만
시퍼렇게 날이 선 조각칼로
너를 새긴다.
너를 새기며,
날마다 나는 피 흘린다. ‘

- 이정하의 ‘판화’ 전문 -

애절한 아픈 사랑도 없었지만
영화나 문학은 대리만족을 얻기 위함인지 아리고 슬픈 사랑 이야기에 감동합니다.



며칠 전 퇴근길에 가을을 느끼고 싶어 단풍이 절정을 이루고 있는 덕수궁을 지나 교보문고까지 걸었습니다.

한때 이 길을 같이 걸으며 이야기를 나눴던 교회 집사님이 생각났습니다. 전 웃기는 사람은 아닌데 한 소리하면 까르르 웃으면서 좋아했던 친구인데 아쉽게도 젊은 나이에 사고사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환하게 웃고 있는 영정 사진을 보며 눈물이 났습니다. 가장 슬픈 죽음은 남겨진 자에게 애도할 시간을 주지 않고 홀연히 떠날 때입니다. 이때는 무슨 말로 위로할 수도 없기에 눈물로 슬픔을 대신합니다.

은행나무의 단풍이 노란색으로 절정을 이룬 덕수궁을 걸으며 집사님을 생각했습니다.
그 친구가 저하고 길을 걷는다면

“이 풍경에 맞는 시 하나 소개해주세요”
라고 말했을 것 같군요.

구르몽의 ‘낙엽’을 떠 올렸습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이 시의 한 구절처럼 자신의 취향을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는 많지 않습니다. 누군가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이야기하면 활짝 웃으며 “나도 그런데”라는 맞장구가 있는 만남은 설렘이 있습니다. 가을은 일상적인 대화보다 자신이 느끼고 생각한 내면을 이야기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시집 한 권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고요.



덕수궁을 지나 11월이면 으레 들리는 교보문고를 향했습니다.
책은 YES24에서 구입하기에 지나쳤습니다. 오직 관심은 문구류 뿐이기에 핫트랙스로 향했습니다. 11월답게 문구류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이것저것 필기 종류를 고르고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브랜드인 미쓰비시, 제브라, 스테들러 진열대 앞을 기웃거리며 갈등합니다.

“살까?”
“말까?”

몇 번이나 손에 든 필기구를 놓았다, 집기를 반복하다가

“딱 하나만 사야지,
결정했어.
제트스트림 엣지3 0.28”

신제품으로 마니아들의 호평을 받는 볼펜인데 0.28은 가늘어서 인기가 많습니다. 전 볼펜은 흔히 말하는 똥 때문에 거의 쓰지 않는데 이 제품은 그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 때문에 관심이 갔습니다. 한 개를 손에 들었다가 취향이 같은 친구가 생각이나 하나를 더 샀습니다. 3만 원에 행복한 날입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제가 어디에 들렸는지 친구는 알 것입니다.
행복의 절정은 맥주에 있습니다. ㅎㅎ

배경음악은

수현의
'시간과 낙엽'입니다.

https://youtu.be/qsy-zJXLchk?si=07UVMPO1a6SW04R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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