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2시까지 술을 마셨지만, 새벽 5시에 잠이 깼다. 집 같으면 헤드폰 끼고 음악 들으며 마음의 여유를 누리겠지만 친구들이 자고 있어 눈곱도 떼지 않고 방을 나왔다. 멀리 보이는 삼호대교는 휘황찬란한 빛으로 장식되었기에 인공미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다리 밑을 흐르는 영산강물도 그 빛을 받아 강물은 오색으로 반짝이며 흐르고 있다.
가로등만 켜져 있는 데크길은 아침 운동을 즐기는 몇 사람 외에는 사방이 조용하다. 가끔은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외로움이 좋다. 강물을 바라보며 긴 호흡을 한 후 이어폰을 꺼내 음악을 듣는다. 새벽 시간은 Eva Cassidy가 좋다. 그녀의 목소리는 청량하지만, 슬픈 음색이 매력이다. ‘Acoustic’ 음반을 선곡했다. 첫 번째 트랙이 ‘Early Moring Rain’인데 가사는 모르겠지만 새벽 시간에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데크길은 걸으면 나무의 삐그덕거리는 소리가 좋다. 초등학교 시절 복도를 걸을 때 그 소리가 좋아 서너 번씩 걷던 기억이 있는데 웃음이 저절로 인다.
근데 춥다. 감기가 심해질 것 같은 걱정 때문에 산책길은 여기서 마치기로 했다. 호텔 로비에 앉아있는데 이북을 가져오지 않은 것이 후회된다. 할 수 없이 핸드폰으로 책 검색을 하고 있는데 Y에게 톡이 왔다.
“Y는 일어났어요. 일출 보러 갈 때 톡 주세요” “나갔다가 추워서 들어왔는데 로비에 있어”
몰골이 엉망일 것 같아 잠깐 들어왔더니 금자와 함께 로비에 있단다. 이렇게 해서 3명이 다시 데크길을 걷기 시작했다. 용의주도한 연희는 사과즙을 챙겨주며 마시라고 하기에 힘이 날 줄 알고 봉지에 입을 대고 마셨다. 갓바위까지만 가는 줄 알았더니 Y는 입암산 정상까지 가자며 의견을 묻는다
“Yes” 단호히 “No” 했지만 소용없다.
높이는 120m밖에 안 되기에 나지막한 언덕처럼 보이지만 쉬운 길이 아니다. 입구 초입부터 계단이 놓여있고 올라가면 둘레길과 연결되는데 정상을 가야 한다며 Y는 과감하게 “나를 따르라”라며 앞장선다.
“아! 연약한 G는 어떡하라고?”
이 이야기를 왜 하나면 지난번 정모 때 광화문을 걸을 때 그녀가 “오늘이 내 평생 가장 많이 걸은 날이야”란 것을 기억했기 때문이다. 이 낮은 산이 웃기는 것은 바위로 이루어졌기에 몇 곳에 밧줄이 설치되어 있을 정도로 악산(岳山)이다. Y는 능수능란하게 밧줄을 타고 오르며 G와 내 손을 잡아준다.
“형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해”
의외로 G가 산을 잘 타 놀랬는데 난 땀 삐질삐질 흘리며 뒤 따랐다. 역시 산은 올라야 한다. 120미터 오르고 큰 소리 ㅎㅎ
삼호대교 쪽이 붉게 물들더니 태양이 얼굴을 내밀기 시작한다. 황홀경이다.
사람들이 해돋이를 보기 위해 먼 곳을 찾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난생처음 일출과 일몰을 동시에 본 여행을 했다. 어제는 갓바위에서 일몰의 아름다움을 보았고 오늘은 입암산 정상에서 일출을 본 것이다. 태양이 대지 위로 힘차게 솟아오르는 모습을 보며 사람은 희망을 품는다. 태양처럼 내 삶도 솟아오를 것을 믿기에 우리는 자신의 삶을 위해 기도한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G와 Y의 옆얼굴이 아름답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희망도 보람도 있었으니까 ㅎ 문제는 내 엉덩이를 본 Y가 파카가 찢어져 오리털이 새고 있단다. 그녀가 옷 속에 나뭇잎을 넣고 응급조치했지만, 소용이 없다. 편의점에서 검정 테이프를 구입한 Y가 파카에 붙였지만 금방 떨어져 효과가 없었다. 점심 먹으러 가기 전 간단한 옷을 구입해 입기로 했다.
점심은 H가 살고 있는 무안에서 세발낙지를 먹기로 했기에 H의 차를 탔다. 이곳 지리를 잘 알고 있는 H이기에 롯데마트에 들러 옷을 사기로 했다. 그녀가 따라와 옆에 있었는데 내가 처음 고른 옷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형, 이 옷 입어봐” 라며 양털 지퍼형 후드 상의를 골라준다. 마음에 든다. 젊은 친구들이 입는 옷이기에 흔한 말로 10년은 젊어진 것 같다. 기분 좋은 웃음을 지으며 계산하려고 했더니 H가 선물해 주고 싶다고 하기에 “좋아 “했다. 친구들을 만나자마자 자랑했다. “H가 사줬어” 한결같이 잘 어울린다고 화답하는데 O가 하는 말 “세일은 복도 많아” 모두 웃었다.
점심은 세발낙지 요리를 먹었는데 난 세발낙지가 다리가 3개 있어서 붙여진 이름인 줄 알았는데 아니란다. 세가 숫자 3이 아니라 가늘 세(細)라며 O가 친절하게 답해준다. 다리가 3개 있거나 가늘거나 관심이 없다. 오직 맛있는 것만 기억하면 된다. H 덕분에 세발낙지도 먹고 옷도 선물로 받았기에 그 이름을 기억해 둔다.
“고마워 친구야”
하루의 일정을 다 쓰려면 글 양이 엄청 늘기에 생략하고 술 이야기로 결론을 맺자. K와 H는 죽이 잘 맞는 주당 삼총사다. 건강을 생각한다고 혼술 할 때도 언제나 24시간 법칙은 지킨다. 오늘 먹었으면 하루 건너고 다음 날 먹는 식이다. 근데 K와 H에 의해 이 법칙이 깨졌다. 술 마시며 나눌 수 있는 대화가 풍성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살아온 삶과 자녀가 중심 된 주제였다. 어제도 새벽 2시까지 먹었고 오늘도 그 시간을 향해 달려야 하는데 H의 귀가 문제로 12시에 술자리가 깨지고 말았다.
황 보름 작가는 에세이 ‘단순 생활자’에서 음주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술을 마시면 마음이 헤실헤실 풀어진다. 세상이 조금 분홍빛이 된다. 세상을 한껏 낙관하게 돼 이 세상이 점점 좋아지고 있다는 확신까지 든다. 제대로 풀어진 채 내가 원하는 속도로 술을 마시고 또 마신다.’ 헤실헤실 풀어진다는 문장을 통해 술 마신 저자의 술 취한 귀염성을 상상할 수 있다. 맞다
술 마시면 친구도 좋고 세상도 좋아 보인다. K와 H는 이번 만남을 통해 친분이 좋아진 친구다. 늦은 시간까지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이유도 우리는 평범한 사람으로 같은 시대를 살았고 지금은 부모로서의 삶을 살기에 공감대가 넓은 장점이 있다.
이틀째 밤도 지나고 있는데 오늘은 감사로 하루를 마감하자. 세월은 우리를 부모로 만들어 주었고 나름 그 역할에 충실했다. 함께 한 7명, 친구의 자녀를 대면으로 보지 못했지만, 친구를 보며 자녀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정직하고 반듯하고 예쁘다.
우리가 그 아이를 키웠다. 이것만으로도 우리는 존경받을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살아온 삶을 자랑스러워하고 기념하고 고마워해도 괜찮다. 이름부를 수 있는 좋은 친구를 가지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인생은 아름답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