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감성적인 제목 때문에 몇 번씩 속으로 읊조렸다. 누구나 한 번쯤은 바람 부는 날 데이트를 했기에, 아니 바람결에 흩날리는 그녀의 머릿결을 만지며 샴푸 냄새를 맡고 싶은 충동이 있었기에 당신 생각이 난다. 저자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면서 이 책을 손에 든 이유는 제목이 주는 아련함과 여행산문집이라는 것 때문이다.
“여행기하고 여행산문집하고 어떤 차이가 있는 거야?”
이런 호기심을 가지고 책장을 넘기는데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의도 없이 무작정 글 사이에 넣은 것처럼 보이지만, 조금만 관찰하면 짙은 외로움이 묻어있다. 이병률 작가의 글은 지극히 감성적이고 시적인 상상력이 들어있는 문장이 매력이다. 그는 사랑을 깊은 외로움으로 느낀다. 저자의 글 속에는 누구나 한 번쯤 공감했을 사랑의 외로움이 매력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글을 읽고 밑줄을 치며 누군가에게 예쁜 원색의 편지지에 정성껏 손 편지를 써 보내고 싶은 충동을 일으킨다.
‘그만두겠다고 하는 순간부터 멀어져도, 헤어져도 보이지 않아도 사랑은 여전히 사랑이질 않은가? 사랑이어서 일어난 그 많은 일을 단번에 지울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가! (47P 사랑도 여행이다. 중에서)
미련이 남아있는 사랑은 더듬이가 망가져 방향을 잃은 곤충처럼 추억을 떠나지 못하며 갈등한다. 그리고 당신도 그 추억에 아파할 것이란 예단을 하며 바람 부는 날을 기다릴지 모르겠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음을 알기에 그 사랑에 안녕을 고하려는데 당신이 말한다.
"가방을 싸면서 낡은 신발을 휴지통에 버리려 하는데 당신이 말했다. 거기 한쪽에 두고 가. 그냥 내가 바라보게….”
어쩌란 말이냐? 흔히 남자들은 여자의 알몸이 완전히 드러난 것보다 살짝 보이는 가슴이나 허벅지가 더 에로틱하다고 말한다. 사랑도 그런가 보다.
“당신을 사랑해” “당신을 사랑했어!”
라는 판에 밖은 사랑 고백보다 두 사람의 추억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낡은 신발을 바라보며 미소 지을 수 있다면 그 사랑은 영원하지 않을까?
당신이란 말이 주는 정겨움과
“그가 누굴까?”
란 호기심 때문에 이 책을 읽으면 가슴으로 전해오는 촉촉한 외로움에 함께 해줄 사람을 생각나게 한다. 혼자 떠난 여행기에는 항상 그런 사람이 있어야 한다. 자신이 읽은 모든 여행기 속에는 생의 가장 원초적 감정인 외로움이 고백된다. 이때 누군가를 향해 열려있는 마음이 사랑이다. 창밖으로 눈이나 비가 내리는 밤에 홀로 창문을 열고 하릴없이 빗소리를 듣고 있을 때면 당신이 생각난다. 아니 생각이 나지 않는다면 영화의 한 장면이라도 떠올려야 한다. 그것이 실제의 사랑이든 아니면 영화 속의 한 장면이든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외로움 자체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순수한 감정이기 때문이다. 외로움은 육체의 만족을 누리는 시간은 아니다. 그녀의 몸이 생각나서 창문을 여는 것이 아니라 그녀와 함께 누리는 영혼의 교감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야기할 사람이 없으면 술을 마시지 말라고 몸이 말을 걸어옵니다. 그럼요, 술은 정말 정말 좋은 사람이랑 같이하지 않으면 그냥 물이지요. 수돗물.‘
외로움이 몰려오는 시간인 그날 밤. 그녀는 정말 정말 좋은 사람이라고 기억되기에 나의 외로움이 당신을 부른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면 사랑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당장 내 곁에 없기에 술 한잔 같이할 수 없지만, 술잔에 어린 그 얼굴을 보면서 그리움이 깊어진다면 아픈 사랑이다. 아직도 그 사랑이 찾아올 것을 믿기에 핸드폰을 만지작거린다.
이렇게 이병률의 여행산문집은 그 나라의 아름다운 풍경을 찬양하지 않는다. 센다이의 술집에 가든, 터키를 가든 저자가 간 곳은 언제나 당신으로 채워져 있다. 물론 그 당신이 꼭 한 사람으로 지칭되는 것은 아니지만 저자의 삶을 순수하고 아름답게 만들어 주는 당신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이 책을 읽는 독자도 그 순수함 속에 들어가 행복을 느낀다. 비단 이병률의 책뿐만 아니라 모든 여행기 속에는 돈에 관한 이야기는 빠져있다. 돈 없이도 행복해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것이 여행기를 읽는 또 하나의 재미다.
과장됨이 없는 소소한 인간관계. 그 속에 진짜 만남의 의미가 있다. 이병률 작가의 장점은 과장되고 특이한 이야기가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의 만남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알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좋다고 하는 당신은 순수한 사람들이다. 가난에 찌든 것이 오히려 광채가 나는 사람들은 삶에 구차함이 없다. 우리보다 훨씬 가난한 삶을 사는 인도나 루마니아 사람의 이야기는 그래서 감동이다. 저자의 고백대로 ‘난 그들보다 훨씬 더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만족을 모르기 때문이다.’
너무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모르기에 인간의 탐욕은 끝없이 진행된다. 가끔 여행이 필요한 이유가 여러 가지 있겠지만 그중의 하나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여행기에는 언제나 풍경과 사람이 새의 양 날개처럼 조화를 이뤘는데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는 당신이 있기에 그 풍경도 의미가 있고 당신과 함께 가고 싶기에 가슴을 앓는 사랑이 있다. 이제 식어 버린 가슴에 또 하나의 사랑이 찾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바람이 있다면 이 책은 불난 집에 부채질할 것이다. 당신과 함께 산화해도 좋으니까 라며 사랑에 삶의 의미를 부여한다면 자신의 삶에 불어오는 바람을 가슴으로 맞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