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진(日辰)이 사나운 날!!

by 이세일

‘온두라스 마스카라’
처음 보는 원두 이름이기에 호기심으로 1kg을 구입했다. 맛은 부드럽고 연하다. 출근하는 아내에게

“당신이 좋아할 것 같은데 내려줄까?”
“그러면 좋지!”

하얀 텀블러에 커피를 담아주면서 “잘 다녀와”라고 인사를 했다.
여기까지는 상쾌한 아침이다. 혼자 있는 시간이기에 나름의 여유로움을 누릴 수 있다.
우선 커피 한잔!!


평상시 같으면 드립 커피 한잔인데 오늘은 카페라테를 마시고 싶었기에 모카포트를 꺼내 놓고 원두를 분쇄해 놓았다. 보일러에 물을 부으려다 아내에게 타 주고 남은 포트 안의 뜨거운 물이 생각나 보일러를 잡고 물을 부었는데 아뿔싸! 너무 뜨거워 순간적으로 보일러를 놓쳤다. 순간 100도에 가까운 물이 손등에 떨어지고 말았다. 금세 손잔등은 빨갛게 달아올랐고 통증이 오기 시작한다. 아! 짜증

순간 자신도 모르게
“오늘 일진(日辰)이 안 좋은가?”란 말이 튀어나왔다.
수돗물에 열기를 식히고 화상 치료에 필요한 약이 있는가?를 찾아보았더니 아무것도 없다. 순간 눈에 들어오는 것이 후시딘이다. 어렸을 때 빨간약이 만병통치약이었다면 지금은 이 약이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듬뿍 짜서 화상 부위에 붙였지만, 통증은 더 심해지는데도 견딜만하다고 주문을 외운다.

이럴 땐 또 인류의 스승이신 네이버가 있지 않은가?
검색해 보았더니 1.5도 정도의 화상쯤 되는 증상이다. 1도 화상이면 차가운 물에 5분 정도 2도 화상이라면 15분 정도 손을 담그면 통증 완화에 도움이 된단다. 순진한 남자 세면대에 물을 채우고 손을 집어넣었다. 정말 찬 기운 때문에 순식간에 통증이 사라진다. ㅎ
문제는 손이 시려 1분을 넘기지 못한다. “됐어”라고 간단히 정리하고 죽어도 카페라테는 먹고 싶어 가스레인지에 커피포트를 올려놓고 가열을 한다. 작은 레인지에는 우유를 넣은 우유스팀피쳐를 올려놓고 불을 켰다.
화상을 입은 손이 불편해 다시 약 바르고 찬물 찜질하는 동안 달아오른 우유가 가스레인지에 넘쳐 추상화 작품처럼 형상화되었다.

“오늘 정말 일진이 안 좋은 날이네!”라며 다시 한번 운세 타령


넘친 우유는 달라붙어 잘 지워지지도 않기에 라테를 마신 다음에 치우기로 했다.
추출된 에스프레소를 머그잔에 담고 우유를 부었다. 예전에는 나뭇잎 까지는 장식할 솜씨였지만 지금은 거품만으로 만족한다.

손등의 상처는 여전히 쓰라린 통증이 있지만 견디기로 한다. 라테 한 잔을 마시며 생각을 해본다.
“일진이라는 단어는 평생 써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내 입에서 나왔지?”

우선 ‘일진’이라는 단어의 뜻을 분명히 알기 위해 다시 네버링을 했다.
일진(日辰) - ‘그날의 운세’라고 정의되어 있다.
쉽게 말하면 일진이 사납다는 뜻은 재수가 없다는 것이다. 오늘 라테 한 잔을 만들다가 손에 화상을 입은 것은 내 부주의나 실수가 아니라 일진이 사납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의 책임은 자신이 아니라 이미 결정된 것이기에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정말일까?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내 힘으로 결정할 수 없는 것이 많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커피 한잔도 일진 탓으로 돌린다면 나는 무책임한 존재가 아닐까?

“어제 내 친구가 길거리에서 10만 원을 주운 것은 일진이 좋아서 일어난 것이고
오늘 내가 손등에 화상을 입은 것은 일진이 나빠서 일어난 일이다.”

명쾌하게 정리될 수 있지만, 문제는 삶의 주체가 자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모든 일은 이미 결정되었고 그 결정에 따를 수밖에 없다면 나의 자유의지는 사라지고 없다.

자유의지와 운명은 언제나 양립되는 갈등이지만
분명한 것은 삶의 주체가 자신이어야만 한다.

사르트르가 했던 유명한 말
“인생은 B(Birth·탄생)와 D(Death·죽음) 사이의 C(Choice·선택)이다"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수많은 선택을 통해 삶을 만들어 가는데 자유의지라는 절대 책임을 통해 선택에 따른 책임도 자신이 져야 한다.

”그래!
오늘은 일진이 사나운 날이 아니라 자신의 부주의로 화상을 입었고 덕분에 책임의 소중함도 깨닫게 되었으니까 일진이 좋은 날이야.”

근데 손등은 아프다. ㅠ

그런 말 있지 않은가?
“아픈 만큼 성숙해지고”


오늘 배경음악은 좋아하는
라벨의 ‘볼레로’입니다.

차분함으로 시작해
박력으로!!

https://youtu.be/8KsXPq3ned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