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이냐?

자존심이냐?

by 이세일

설 연휴 때 얼마나 많은 음식을 했는지 음식물 분쇄기가 막혀 물이 내려가지 않는다. 아내는 설거지를 할 수 없기에 화장실에 쭈그리고 앉아 그릇을 씻고 있다. 이 남자가 가만히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사용설명서를 읽어봤지만 별 도움이 안 된다. 다만 모터를 수동으로 돌릴 수 있는 회전수동공구가 있다면 사용해 보라는 안내 문구가 있기에

“당신 이거 설치할 때 부속품 받은 것 없어”
“당신 있을 때 했잖아”
“무슨 소리야 내가 있을 때 했으면 알지?”

라고 대꾸했더니 아니란다.

“내가 고쳐볼게”

했더니 전혀 믿지 못하는 눈치다.


내 버려둬, AS 받아야 해”

라면서 이 남편의 실력을 의심한다. 하기야 작년에도 무선 청소기 헤드를 청소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분해해 깨끗하게 했는데 조립법을 몰라 결국 모터를 태워 먹고 AS 비용으로 35만 원을 낸 아픈 경험이 있지 않은가?

아들도 트래펑을 사 와 부었지만 선전과 다르게 막힌 곳은 댐의 수문처럼 견고하게 개수대 뚜껑을 막고 있었다. 이럴 때 이 남자가 나서야 한다는 불타는 사명감을 가지고 개수대 속으로 손을 넣어 꼼지락거렸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다. 사례가 있을까 해서 인류의 스승인 네이버를 검색해 봤지만, 음식물 분쇄기에 관한 글은 없다. 할 수 없이 내 머리를 굴려보기로 했다.



고장 증세는 음식물을 분쇄한다는 신호가 울리면 모터가 회전되면서 음식물을 가는 방식인데 1초 정도 돌다가 멈추고 경고음만 계속 울린다. 그렇다면 모터가 음식물에 걸려 돌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명서에 모터를 돌릴 수 있는 회전수동공구가 있는 것을 보니까 거의 확실하다는 감이 온다.

아내가 보면 잔소리할 것 같아 없는 틈을 타 다시 개수대 안으로 손을 집어넣고 음식물을 꺼내고 손가락으로 돌렸더니 앞쪽으론 회전이 안 되고 뒤쪽으로 회전이 된다. 몇 바퀴 돌린 다음 분쇄기 뚜껑을 닫았더니 신호가 울리면서 모터가 돌기 시작한다. 이 기쁨 ㅎ
운전면허 시험 10번 만에 붙었을 때의 감격 이후 최고의 환희가 온몸으로 느껴진다.
순간 큰 소리로 아내를 부르며 “내가 고쳤어”라고 외쳤다.

아내가 나와 보더니 “정말이네!”라며 좋아한다.
난 아내나 아이들이 이 결과를 보고


“당신 대단하다”

“아빠가 이제 이런 것도 할 줄 아네”라며 좋아서 칭찬할 줄 알았다.


근데 이것들이 “뭐 그런 걸 가지고 호들갑이야”라는 정도의 반응을 보이길래 실망감이 급속도로 몰려온다.



미국의 심리학자인 마슬로우(Abraharn H. Maslow)는 인간의 욕구를 5단계로 구분 지었는데 이제는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이론이다.
1단계는.
동물과 별다름이 없는 가장 저급한 것으로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는 생리적 욕구다.
2단계는
편하고 안정된 삶을 살고 싶어 하는 안전 욕구다.
3단계는
타인과 친밀한 관계를 지니며 살고 싶은 소속감의 욕구다.
4단계는
타인으로부터 존경을 받고 싶어 하는 자존심의 욕구다.
5단계는
자신이 꿈꾸고 원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자아실현의 욕구다.

난 마슬로우의 이론에 따르면 가족으로부터 칭찬 듣고 존경받는 꽤 높은 차원의 욕구를 갈망하고 있다. 그런데 이 마음을 알아주지 못하는 무지한 가족 구성원 때문에 마음이 아린 것이다. ㅠ

그렇다고 이 좋은 날 가족을 앉혀놓고 서러운 마음을 하소연할 수도 없지 않은가?

집안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 때 맥가이버처럼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가장이라면 내 행동에 대해 “뭐 그리 유치한 생각을 하고 있어”라며 무시할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것 이상으로 대단한 일이 발생한 것이다. 난 이 놀라운 사실에 대해 메모장에 이렇게 적었다.
“뭐든지 시도해 보자. 행위가 뒷받침되면 결과물이 있고, 없다 할지라도 경험에서 배우는 것이 있다.”
라며 이 경이로운 일을 잊지 않기 위해 기록까지 해 놓았다.

꼰대의 시작은 자신이 경험한 것에 대해 그 가치를 과대평가하는 것이라고 한다. 가장 잘 알려진 말로 “내가 해 봐서 아는데”가 있다. 자신의 행위를 과대 포장해 절대화시킨다면 꼰대일 수 있겠지만 자신의 분야가 아니라고 생각한 것에서 어떤 결과물을 만들어냈다면 자랑스러움이다. 그리고 이 과시는 “오구 오구 잘했어요.”라는 칭찬 한마디로 자존심이 하늘을 날아 구름 위에 앉을 것이다. 근데 왜 이 마음을 몰라주냐? 는 형이상학적 질문을 던졌는데 아들에게 용돈을 받는 순간 형이하학적 동물이 되고 말았다.



돈을 받는 순간의 기쁨으로 서운한 감정이
바람에 날리는 민들레 꽃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ㅎ

“동물로 살 것이냐
자존심이 있는 인간으로 살 것이냐”

이것이 문제다.

배경음악은

절절한 사랑을 고백하는

Diana Krall의 'The Look Of Love' 입니다.


https://youtu.be/SQuDaIbpA1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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