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시절 미팅 등으로 만난 여학생에게 써먹기 위해 준비된 유머가 꽤 있었다. 이제는 다 잊어버렸기에 기억으로 남아있는 것들이 거의 없지만 심리테스트를 한다며 주절거렸던 것 중에 하나가 희미하게 기억된다. 7-8가지의 질문이 이어지며 마지막 하나가 “남친의 집에 놀러 갔는데 그가 자신의 서재로 안내하며 음료수를 가지러 갔어. 그때 너는 창밖으로 보이는 수영장을 바라보고 있을래? 아니면 서재의 책들을 구경할래?” "수영장을 바라본다는 것은 육체적인 사랑을 좋아하고 서재에서 책을 구경한다는 것은 정신적인 사랑을 갈구하는 거야. “라고 말하면 여학생들이 ”어머, 정말 맞아! “ 라며 놀라는 반응이 많았다.
내 성향도 서재를 구경하며 시간을 보내는 유형이기에 약간의 용돈이라도 생기면 교보나 종로서적에 가서 책을 사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으니까!... ㅎㅎ 이때부터 모은 책들이 수천 권에 이르기에 은근한 자기 자랑이고, 지금도 개폐식 천장으로 만들어진 서재를 갖고 싶은 꿈을 가지고 있다. 리모컨 스위치를 누르면 천장이 창문처럼 열려 밤하늘의 별을 볼 수 있고, 책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책을 꺼내는 것은 아직도 나만의 로망이다. 거기에 성능 좋은 오디오와 커피 머신, 영화를 볼 수 있는 프로젝터와 침대가 있다면 인생은 얼마나 풍요로울까? ^^. 이런 꿈은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지식인의 서재’도 자신의 관음증을 충족시켜 줄 제목을 가지고 있기에 매력으로 다가왔다. 이 책 속에는 자신의 분야에서 터를 잡은 꽤 이름난 지식인 15명에게 서재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 왜 독서를 하는지?, 어떻게 독서를 하는지?" 등의 질문을 통해 완성된 인터뷰집이다. 저자는 ’ 그들이 들려주는 독서와 인생에 관한 이야기가 여러분의 숨어 있는 지적 욕구를 깨워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라는 저작 의도를 말한다. 누구나 그렇듯이 서재는 자신만이 주인인 사적인 공간이지만 침실과는 다르게 상대방에 따라 열릴 수 있는 장소다. 상대방이라는 전제를 붙이는 이유는 책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군가를 만나면 밤하늘의 별처럼 수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지만, 책이라는 주제로 만난다면 훨씬 더 깊이 있고 흥미 있는 대화를 끌어낼 수 있다. 한때 독서일기로 자신의 존재를 과시했던 장정일은 사춘기 시절 300권 이상의 ‘삼중당(三中堂) 문고’를 독파했다고 하는데 그 나이쯤이면 누구나 삼중당 문고에 대한 추억이 있을 것이다. 같은 추억을 공유한 사람끼리의 대화는 얼마나 풍성하고 멋진가?
페이지를 넘길수록 다양한 저자들의 책 이야기를 읽으며 신이 나는 것은 자신도 그들의 대화에 낄 수 있고 그들과 공감대를 형성하는 즐거움 때문이다. 조국 서울대 교수는 자신의 서재에 대해서 ‘법에 대한 냉정한 이성과 감성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조화를 이루는 곳이고 서재는 영혼의 휴식처다.’라고 말한다. 육체도 휴식해야지만 건강이 유지되는 것처럼 영혼도 휴식이 필요한데 서재가 그 역할을 하기에 누구에게나 꼭 필요한 정신 건강법이다. 성경도 골방을 영혼의 안식처로 말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자신만의 공간 속에서 하나님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보면 서재의 기본은 자신만의 공간이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홀로 책을 읽고 사유할 수 있기에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서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부러워하며 경제 사정이 좋아진다면 서재를 예쁘게 꾸미고 싶은 꿈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서재라는 공간보다는 언급된 인사들의 독서에 대한 방법을 더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단순히 글자를 읽는 것이 독서가 아니기에 독서도 기술이 필요하다.
독서의 대가라면 수많은 책을 읽었다는 의미도 있을 수 있겠지만 이들은 절대로 자신의 독서량을 자랑하지 않는다. “몇 권을 읽었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제대로 읽었냐?”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이 책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유익은 독서의 방법에 대한 것이다. ‘어떤 책은 맛보고, 어떤 책은 삼키고, 어떤 책은 씹어서 소화시켜야 한다.’ 최재천 교수는 영국의 철학자 베이컨의 말을 인용하면서 ‘어떤 책을 읽느냐? 도 중요하지만, 책은 맛보고 삼키고 씹어서 소화까지 시키려면 어떻게 책을 읽느냐가 더 관건이다.’라며 독서의 기술을 역설한다. 맛보고 씹는 것이 사유의 과정이고 이것을 통해 독서의 승패도 결정된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어느 순간부터 이 사유 때문에 고민한다. “읽기는 읽었는데 남는 것이 없어,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돼?” 이렇게 자신의 독서에 대해서 회의할 때 자신의 독서법을 점검하고 새로운 독서를 위한 업그레이드를 시도한다. 그러나 많은 책을 읽어봐도 새로운 독서법은 없다. 결국은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하는데 이것의 시작은 천천히 느리게 읽는 것이다. 이 책에 언급된 지식인들은 한결같이 이 방법을 강조한다. 예술작가로 알려진 이 안수는 ‘책을 읽은 것을 소화하는 것이 사유예요. 사유는 자신이 읽은 것을 되새김하는 것인데 그 사유의 방법으로 가장 좋은 것이 글을 쓰는 겁니다. 글을 쓰는 것은 독서보다 더 중요합니다. 사유하는 방식은 글쓰기여야 하고 글쓰기야말로 완전한 독서행위의 완성인 거죠.’라며 글쓰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떤 대상 앞에서 강의까지 한다면 더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독서토론을 한다면 더 좋은 결실이 있을 것이다.
또 이들이 강조하는 독서법은 밑줄 긋기와 메모다. 책 디자이너인 정병규는 ‘책을 읽다가 처음에는 연필로 체크하거나 접어요. 그러다가 어느 순간 ‘아 이 책은 정독해야겠다고 느끼는 순간이 있어요. 그런 책을 만나면 너무나 행복한 거예요. 이런 책들을 만나기 위해 역동적인 공간 속에서 헤매는 거니까, 저한테는 그런 책이 이정표 같은 책인 거죠. 이런 책을 만나는 것은 많은 실패와 노력이 뒤따르지요.’라며 책의 선택을 강조한다. 책도 운명적인 만남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한 권의 책으로 한 사람의 인생이 바뀐 경우를 우리는 수없이 많이 알고 있다. 김정운 교수(이제 교수 아니지만)는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고 있느냐?”는 본질적인 질문과 만나게 되고 결국은 진정한 자유(Free to)를 누리기 위해 과감하게 학교에 사직서를 제출했다.정독의 중요성을 설파한 박웅현은 밀란 쿤데라의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자신의 삶에 끼친 영향을 이렇게 말한다. ‘네 번을 읽은 책이다. 한 번은 읽었다고 말하기 위해서, 한 번은 정말 궁금해서, 한 번은 놓친 게 너무 많은 것 같아서, 한 번은 강독을 하기 위해서 그렇게 읽으며 나에게 울림을 주었던 문장에 줄을 치고 그걸 타이핑해 두었다 ‘
독서가들의 자기 고백을 읽으며 자신과의 차이를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들은 한 권의 책 때문에 자신의 인생을 바꿨지만 난 아직도 꿋꿋하게 주어진 삶에서 안주하며 사는 것이 차이점이다.
책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만의 서재를 갖고 싶어 한다. 마치 초등학교 시절 책상만 있으면 공부 잘할 것이란 기대감으로 가득한 것처럼 서재는 욕망의 표현이다. 그러나 서재가 있다고 자신의 독서 능력이나 삶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서재가 생기기 전까지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깊어야 하고 그것이 사유로 정리되어야 한다. 그리고 누군가 앞에서 자신의 사유를 설명하며 설득해야 한다. 그때 누군가가 보여주는 반응이 놀라움으로 나타날 때 진정한 독서가가 될 수 있다. 이 책 속에는 서재보다 독서 실력이 뛰어난 독서가들의 노하우가 잘 드러나 있는 책이다. 자신의 독서 능력에 대하여 고민한다면 이 책이 도움을 줄 것이란 확신이 있다. 책 속에 보이는 서재의 모습은 진짜 부러움이다. 갖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