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없고 흐린 날을 좋아하지만 마음은 차분해지고 약간의 우울이 찾아오기에 감정은 가라앉고 손에 잡히는 것은 없다. 이때의 증상은 이 책, 저 책을 헤집어보기만 하고, 좋아하는 영화도 몇 군데 찔러보다가 포기하고 만다. 그렇다고 늘어져 자는 것은 용납할 수 없기에 마음은 허공을 떠돌며 방황한다. 맥주 한 잔 마시고 싶었지만, 일요일 벙개 때 많이 마셨기에 자제한다.
“그럼 뭘 하지?” 란 생각을 하다가 며칠 전 지나쳤던 동네 꽃집의 후리지아가 생각이 났다. 해마다 3월이 되면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후리지아 한 묶음을 사서 화병에 꽂는 것이 습관화되었기에 대충 옷을 입고 후리지아를 사러 갔다. 약 3평 정도밖에 되지 않는 작은 꽃집은 이름 모를 봄꽃들이 화사한 모습으로 피어 “나를 봐주세요?”라고 유혹하는 것 같다.
문득 "나에게 행복을 주는 장소가 어디인가?"를 잠깐 생각해 보았다.
첫째는 YES24 방문하기. 가끔 한가한 시간에 YES24에 들어가 장바구니에 책을 쟁여놓는데 이럴 때마다 기분 좋음과 설렘이 있다.
두 번째는 영화관 가기. 요즘은 OTT가 대세이기에 극장 갈 일이 별로 없다. 영화관에서 광고가 끝나고 짧은 순간 어둠이 시작될 때의 긴장감을 좋아한다. 학교 다닐 때는 생활지도 선생님께 걸릴까 봐 노심초사하며 빨리 불 꺼지기를 기다렸지만, 지금은 영화가 시작될 때의 짜릿함 때문에 어두움을 좋아하는데 OTT에서는 느낄 수 없는 즐거움이다.
세 번째는 도서관 순례하기 이것은 새로 생긴 버킷리스트인데 서울 시내에 있는 모든 도서관을 순례하는 것이다. 도서관의 숫자가 200곳 정도라고 하니 적은 숫자는 아니다. 1주일에 한 번만 가더라도 2년은 잡아야 하는데 거창하게 생각하지 말고 우선순위를 도서관 순례하기에 둔다면 산책과 독서가 낙위지사(樂爲之事)가 될 수 있다. * 낙위지사(樂爲之事) - 즐거워서 하는 일
네 번째는 꽃집이나 화원 탐방하기 작년 봄에 아내를 따라 화원을 갔는데 의외로 많은 남자를 만날 수 있었다. 바쁜 일상에서는 느낄 수 없는 꽃의 화려함과 향기는 삶의 질을 향상하기에 충분하다. 지금도 자신이 사 온 화분이나 꽃은 물뿌리개를 가지고 분사하며 쾌감을 느끼는데 고급스러움으로 다가오는 척사환초(慼謝歡招)의 시간이다. * 척사환초(慼謝歡招) - 심중(心中)의 슬픈 것은 없어지고 즐거움만 부른 듯이 오게 됨.
다섯 번째 교보 문고 펜시점 방문하기 책을 주로 온라인으로 구입하기에 책방 갈 일이 줄어들었지만, 가끔 교보에 들려 예쁜 문구류를 구매하는 것은 삶의 활력소가 된다. 예쁜 샤프 하나만 손에 들어도 행복하니까….
난 이 시간 네 번째 행복을 누리기 위해 꽃집에 온 것이다. 3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주인 언니는 예전의 유명한 노래였던 “꽃집의 아가씨는 예뻐요”란 제목처럼 예쁜 분이다.
“후리지아 3묶음만 주세요” “6천 원입니다”
신문지에 싸인 후리지아를 보면서 웃음이 나왔다. “나 꽃을 든 남자. 이 나이에 꽃을 든 남자가 어디에 있어? 여기에 있지. ㅎㅎ”
6,000원으로 마음이 행복해진다면 그 돈은 가치가 있다. 날씨는 흐리지만 봄을 느낄 수 있는 바람이 얼굴을 스치며 얼마 남지 않은 머리카락을 일으킨다. 집에도 아내가 사다 놓은 카랑코에가 피어있고. 향이 향기롭고 강해 만 리를 간다는 만리향이 며칠 사이에 꽃봉오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화병에 후리지아를 꽂은 다음 향기를 맡고 후리지아에 관한 글을 쓰기로 했다. 책상 앞에 앉은 지 1시간이 지났지만, 글감이 가물거리기만 할 뿐 진척이 없다. “포기할까?”란 생각을 하고 다시 한번 후리지아 향을 맡았는데 문득 꽃말이 생각났다. ‘새로운 시작, 긍정적인 마음, 당신을 응원합니다.’
사람들이 졸업식이나 기쁨이 있는 날에 후리지아 꽃을 선물하는 이유를 알겠다. “당신을 응원합니다”
삶은 누군가의 응원이 있을 때 힘이 나고 옹달샘처럼 맑은 기운으로 흘러넘칠 수 있다. 후리지아 꽃향기를 맡으니까 가라앉았던 마음이 서서히 부상하기 시작한다. 마음이 흐트러지는 날 자신에게 질문해 본다.
“내 하루의 삶에 성실했는가?”란 질문에 앞으로는 5곳의 장소를 떠올리고 싶다. 내 삶의 행복이 되는 장소에서 후리지아 향을 맡고 싶다. 그럼 답이 되지 않을까? “당신의 새로운 시작을 응원합니다.”
배경 음악은
친구가 추천해 준 마로니에의 '칵테일 사랑'입니다.
이런 예쁜 가사가 있군요
'나는 아직 순수함을 느끼고 싶어 어느 작은 우체국 앞 계단에 앉아 프리지아 꽃 향기를 내게 안겨줄 그런 연인을 만나 봤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