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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세일 Mar 20. 2023

인연의 끈을 놓지 않으면 사랑은 영원한 것일까?

영화 '냉정과 열정사이' 리뷰    

 가슴을 촉촉이 적시는 로맨스 영화 속의 소도구로 가장 좋은 것은 편지다.
모든 사람의 무관심 속에 외로이 서 있는 빨간 우체통을 보고 지금의 연인들은 무심히 지날 수 있겠지만 인생의 황혼기를 향해 가는 장년층에게는 가장 아름답게 남아있는 낭만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향해 쓴 편지를 수십 번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다가 새벽이 되면 우체통으로 달려가 편지를 넣고 집배원 아저씨 오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경험이 있는 장년들은 그 사랑의 아련함을 떠 올리며 미소 짓지 않을까? 그러나 지금처럼 카톡이나 문자를 통해 자신의 사랑을 순간적으로 가볍게 표현하는 것에 익숙한 젊은이들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르며, 그사이 많은 것들이 변하고 사라졌다. 편지와 우체통도 그중의 하나다.

영화 ‘냉정과 열정사이’는 1990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답게 소도구로 쓰인 편지나, LP 음반 등을 통해 지난 시절을 회상할 수 있기에 더 몰입된다. 개인적으로 로맨스 영화의 주인공들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는 상처가 있지만, 가슴은 따뜻하고 사랑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인물이다. 여기에 주인공의 아픔이나 사랑을 슬프게 표현하는 배경 음악과 그들의 사랑이 익어가는 아름다운 장소, 즉 인물과 음악, 장소가 삼위일체를 이루는 로맨스 영화는 아직도 내 가슴에 긴 여운을 남긴다. ‘냉정과 열정 사이’는 이 세 가지 요소를 삼위일체로 가지고 있다.



“피렌체(Firenze)에 있는 두오모(Duomo) 대성당은 연인들의 성지래?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는 곳
서른 번째 생일날, 나와 함께 가줄 거지?
그래 약속해 “

물기 머금은 것처럼 촉촉한 아오이(진혜림 분)의 목소리로부터 영화는 시작이 된다. 여기에 요시마타 료(Ryo Yoshimata)가 작곡한 주제가 깔린다. 이것도 잠깐, 그 유명한 피렌체의 두오모 성당이 롱테이크로 잡히면서 슬프고 애조 띤 ‘The Whole Nine Yards’가 흐르며 이 영화의 성격을 표현한다. 사랑은 아름답지만, 그 속에 언제나 ‘냉정’과 ‘열정’이라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기에 겉돌며 아파한다. 때로는 풍랑을 만난 배처럼 좌초하기도 하며 그 모진 시련을 이겨내고 영원한 사랑으로 승화된다. 그러기에 관객들은 로맨스 영화를 보며 자신도 저런 사랑을 해 보고 싶다는 열망과 아니면 지난 사랑을 회상하며 영화 속의 주인공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착각에 빠진다. 이것이 로맨스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가 아닐까?

온통 붉은 기와로 장식된 피렌체의 전경을 보면서 탄성이 일어나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볼 가치가 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본고장으로 건축과 예술로 유명하고 오랫동안 메디치 가문이 다스렸던 곳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보티첼리와 같은 예술가들의 흔적이 도시 곳곳에 남아있기에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고 두오모 성당은 피렌체의 상징이다. 마치 이 도시를 촬영하는 것처럼 내 눈은 부지런히 피렌체의 골목까지 사진을 찍는다. 특히 준세이(타케노우치 유타카)가 자전거를 타고 이 골목을 달릴 때 흘러나오는 Enya의 ‘Caribbean blue’는 영화의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명장면이다.



1994년 봄. 23살의 준세이는 미술 회화 복원 공부를 하기 위해 피렌체로 유학을 왔다. 어느 날 친구의 결혼식에 참석했던 아오이(진혜림)는 자전거를 고치고 있는 준세이를 보고 놀란다. 그가 없이도 일상의 행복에 젖어있던 그녀의 가슴속에 서서히 준세이와 함께 보냈던 사랑의 기억이 아지랑이처럼 피어난다. 진정한 사랑은 휴식기를 보내고 있는 활화산처럼 언제나 폭발할 것 같은 열정이 숨어있다. 이제 그 시간이 돌아온 것이다. 다음 날 준세이는 친구를 통해 아오이가 밀라노의 한 보석 가게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부리나케 밀라노로 달려간 준세이는 아오이를 만난다. 서로의 눈빛이 교차하지만 둘은 말이 없다. 와인 한 잔을 권하는 그녀는 억지로 자신의 감정을 숨긴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미국계 사업가인 마브(마이클 원 분)와 부러운 것 없는 상류 생활에 길들어 있다. 아오이의 집에 초대된 준세이는 마브로부터 받은 모피 코트를 입으며 행복한 표정을 짓는 아오이를 보며 마음이 편할 리 없다. 화가 나서 집을 나서는 그에게 그녀는 잔인하게 말한다. “너와의 일은 잊었어, 행복하게 지내고 있어” 그녀의 말은 단호하고 잔인하다. 냉정이다. 깊은 상처를 가슴에 안고 돌아서는 준세이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공방으로 돌아왔을 때 스승의 사랑을 받는 것을 질투한 동료가 순제품의 그림을 훼손해 버린다. 이 사건으로 인해 그가 일하는 공방은 문을 닫아야 할 위기에 놓이고, 준세이는 일본으로 귀국한다. 어느 날 아오이에게 긴 문장의 편지가 배달된다. 준세이가 보낸 것이다.

1990년 봄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의 설렘으로부터 편지는 시작이 된다.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고 진솔하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은 편지밖에 없다. 더군다나 다정하게 ‘아오이’란 이름을 부르며 써 내려간 준세이의 편지는 아오이의 마음에 충분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두 사람은 언제나 서로에 대해 훔쳐보기만 있었지, 마음을 열지 못했다. 비가 심하게 오는 날 아오이는 준세이에게 우산을 건네주고 수줍은 듯이 도망을 친다. 서로의 감정을 표현할 줄 몰랐던 두 사람이 드디어 함께 커피를 마시고 영화를 보며 음악과 책에 관해 이야기하며 사랑을 키운다. 편지를 읽어 나가던 아오이도 그때의 사랑을 떠올린다. 순수했고 아름다웠던 시절. 두 사람의 사랑은 영원한 줄 알았다.

편지로 준세이의 마음을 확인한 아오이는 영원한 사랑을 위해 일본에 있는 준세이에게 전화를 건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직감적으로 준세이는 아오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녀는 전화를 끊고 공중전화 부스 안에서 한없는 눈물을 흘린다. 전화박스 밖으로는 세찬 비가 내린다. 그녀가 안쓰럽다.



아오이는 겉모습은 냉정을 가지고 있지만, 속마음은 준세이에 대한 그리움이 비처럼 내린다.

갑작스러운 조반나 선생님의 자살로 인해 준세이는 이탈리아를 방문하고 그는 다시 미술 복원 일을 하기 피렌체로 떠난다. 2000년 봄 서른 살 아오이의 생일날이 되면 두오모 성당에서 만나자는 그녀와의 약속을 기억하고 준세이는 대성당을 오른다. 두 사람의 사랑에 대한 축복일까? 성당의 종소리가 울려 퍼진 후 두 사람은 만난다. 아오이는 온 것에 대해 감격한 준세이는 당황하며 그 기쁨을 어눌하게 표현하지만 아오이는 아직도 자신의 마음을 열정이 아닌 냉정으로 위장한다.

“피렌체에 친구 만나러 왔다가 갑자기 생각이 나서 둘러본 거야” 
항상 여자들은 이렇게 말하더라…….ㅎㅎ
“난 기억하고 있었어!” 
언제나 남자는 열정으로 말한다.

‘끝까지 냉정했던 너에게 난 뭐라고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가슴속의 빈 공간을 채울 수 있을까?
나는 과거를 뒤돌아보기만 할 것이 아니라
미래에 대해 기대만 할 것이 아니라
현재에 충실하지 않으면 안 돼.
아오이. 너의 고독한 눈동자에 다시 한번 나를 찾을 수 있게 된다면…….‘



준세이의 마지막 내레이션을 생각하며 아오이의 눈에 눈물이 흐른다.

10년을 한결같이 사랑하는 사람을 열정으로 대했던 준세이
준세이에 대해 냉정과 열정을 오갔지만 결국은 그의 진심을 알고 감동하는 아오이.
사랑이란 한 사람이 인연의 끈을 놓지 않으면 영원한 것일까?

세월의 흐름 앞에 사람이나 사물은 늙고 병들고 녹슬고 망가지기에 사랑도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퇴색되고 사라지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기에 준세이와 아오이가 보여준 사랑이 아름답다. 잊은 줄 알았는데 잊히지 않는 사람,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가슴속으로 들어오기에 아직도 예쁜 사랑을 꿈꾼다. 영화의 배경은 최고이기에 피렌체와 밀라노를 가보고 싶은 꿈이 생긴다. 두오모 성당보다 준세이가 자전거로 달리던 피렌체의 골목과 거리를 달리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은 아직도 꿈에 살고 있다는 증거다.

이 영화를 격조 있게 만든 것은 요시마타 료’의 음악이다. 피아노와 첼로를 통해 흐르는 선율은 봄바람처럼 가슴을 파고들어 과거의 한 시점을 떠오르게 한다. 아직도 내 삶에 냉정으로 남아있는 사람?

그저께 밤, OST를 들으며 잠을 이루지 못했는데 가끔은 잠 못 드는 밤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한 편의 영화 때문에 죽어있던 감성이 살아나고 한 방울의 눈물이 있다면 삶은 아직도 아름답다. 어제 창가에 화분 하나를 놓았다. 꽃이 피는 것처럼 내 삶도 피어날 것이란 기대를 하며... ‘기대’ 아직 쓸모 있는 단어다.

배경 음악은

냉정과 열정사이 OST 중 – 첼로입니다.

https://youtu.be/cyYHJXd8jU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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