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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요 Jul 14. 2022

부모 자식 관계, 부모와 절연해도 될까요?

그래도 어떻게 자식이 부모를 버릴 수 있어?

참 철이 없다. 돌아가시고 나면 얼마나 후회하려고?

키워준 은혜도 모르고 배은망덕하다.



사람들이 툭툭 던지는 말에 상처받지 마세요.

어차피 그들은 내 삶에 조금도 관심이 없습니다.








3년이 되었네요.

저는  완전히 인연을 끊었습니다.

그 사람의 번호를 차단한 후 매번 저를 괴롭히던 장문의 문자와 카톡,

저주에 가까운 비난을 더는 안 듣게 되었습니다.



내 삶에서 단 한 사람이 지워졌는데 삶은 굉장히 평온해졌습니다.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이요.

더는 아빠 때문에 기분을 망치는 일도, 언제 화를 낼지 몰라 불안해할 일도 없었고

그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억지로 웃고 떠드는 상냥한 딸의 역할을 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저는 제가 기억하는 순간부터 한 번도 집이 편했던 적 없습니다.

우리 집은 늘 살얼음판 같았거든요.



아빠는 비가 오면 비가 온다고,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분다고

소리 지르고 화를 내던 사람이었습니다.

잘 되면 자기 덕, 안 되면 남 탓이 기본이었고

본인 뜻대로 따르지 않으면 부모든 배우자든 자식이든 가릴 것 없이

내키는 대로 욕을 하고 물건을 집어던지고 손을 올렸죠.



친구들은 집이 휴식처라는데

저에게 집은 '공포' 그 자체였습니다.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가기 위해 계단을 천천히 올라가며

현관 넘어 집안 분위기가 어떨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불안해하던 제 모습이 여전히 상처로 남아있습니다.



아빠의 헛기침 소리에도 소스라치게 놀랐고

그의 발검음 소리, 그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

그의 온갖 짜증과 불평불만이 가득한 소리를 들을 때마다

제발 오늘 만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기도하고 또 기도할 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최대한 그를 이해해보려고 애를 썼습니다.

'가족이니까'라는 덫에 갇혀 있었죠.

가족이니까 좋아해 보려고 했고, 가족 안에서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거라고 스스로를 타이르기도 했죠.

그가 자식인 나를 사랑한다는 대전제를 부정할 수 없기도 했습니다.

단지 표현이 서툰 것뿐이고, 나를 사랑하는 것만큼은 진실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또 그것은 어쩌면 진실일지도 모릅니다.

본인이 기분 좋을 때만요.



부모가 무조건적으로 자기 자신보다 자식을 사랑한다는 건 터무니없는 말입니다.

대부분의 부모가 그럴 수는 있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내 아빠처럼요.

그는 자기 자신이 훨씬 더 소중한 사람이거든요.

본인의 사회적 위치, 본인의 자존심이 더 중요하며

자식은 본인을 반짝반짝 빛나게 하지 않으면 가치 없는 것이라 여기는 사람이죠.



"진심으로 너를 위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엄마 아빠 말곤 없어. 친구도 누구도 다 필요 없어."



30년 넘도록 그의 욕받이 었던 저는 이 말이 여전히 소름 끼치게 싫습니다.



처음 엄마에게 아빠를 더는 보고 싶지 않다고 했을 때

엄마는 저를 이해하지 못했어요.

아무리 부모가 잘못해도 어떻게 부모 자식 간에 연을 끊을 수 있냐는 거죠.

제가 우울증을 겪는다는 걸 알면서도 엄마는 용납하지 못했어요.

오히려 본인의 한 많은 인생을 보고 자랐으면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비난하고 끊임없이 설득했죠.



그렇게 설득하고 설득당하며 몇 해를 더 보냈습니다.

저의 우울은 더 깊어졌어요. 사람은 결코 변하지 않으니까요.

어느 날 또 이유도 없이 저주를 퍼붓고 욕을 하고 죽일 듯이 저를 노려보는 아빠에게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우두커니 서서 온갖 모욕을 뒤집어쓰며 생각했습니다.



 이상 이렇게 살다가는 내가 죽든 아빠를 죽이든  나겠다.



그날, 제가 부들부들 떨며 나도 살고 싶다고 우는 모습을 보고서야

엄마는 제게 더 이상 이해하라고, 참으라고 말하지 않았어요.



"네 마음이 그렇게 힘든 줄 몰랐어. 마음 편하게 살거라."





네, 저는 아빠와 절연을 한 후 태어나 가장 편안한 삶의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제 삶에 처음으로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어요.

내 몸 한 칸 누일 수 있고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작은 공간이 있다는 것이 그렇게 감사하더군요.



물론 처음부터 마냥 좋았던 건 아니었어요.

죄책감이 너무 커서 퇴근길에 울고, 눈이 퉁퉁 부어 집에 들어가는 날도 많았지요.

한 일 년 정도는 죄책감 때문에 오히려 더 깊은 우울로 빠져드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다 점차 저와 가족과의 관계를 이성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어요.

이해해보고 싶었습니다. 내가 놓친 것은 없을까.

내가 진심으로 그를 이해해보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마음을 오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객관적으로 바라볼수록 오히려 분노가 차오르더군요.



불안에 떨며 몰래 숨어서 울던 제가 너무 가여웠습니다.

불안감을 이기지 못하고 갖가지 강박증으로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상황까지 가면서도

억지로 웃음을 지어야 했던 제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어요.

눈치 보는 게 익숙해서 투정 한 번 부리지 못했던 어린 제가 너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시절 저에겐 잠들기 직전 깜깜한 어둠만이 온전한 휴식이었어요.

그 밤이 계속되기를, 차라리 내일 잠에서 깨지 않기를 몇 번이나 기도했을까요.

그 긴 밤을 혼자서 견디던 제가 너무 불쌍해서 화가 났던 거지요.  



저는 그렇게 죄책감을 버렸습니다.

죄책감 때문에 괴로워하는 시간에 여전히 울고 있는 내 안의 어린아이를 달래주는 것이 더 급했거든요.

저는 더 이상 죄책감 때문에 울지 않아요.

다만 점점 늙어가는 엄마의 모습을 보지 못한다는 게 슬프고

다른 사람들처럼 가족에게서 느낄 수 있는 따뜻함을 죽을 때까지 느낄 수 없다는 것이 슬플 뿐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고민합니다.

가족과 인연을 끊어도 될까요?

부모와 절연해도 될까요?



되고 안되고의 문제는 아닙니다.

내가 내 뜻대로 잘 살고 있는지를 먼저 생각해보길 바랍니다.

저는 아니었어요.

눈을 뜨는 순간부터 잠드는 순간까지 아빠의 통제 속에 살아야 했어요.

그의 마음에 들기 위한 삶을 살았던 거죠.



내 인생에는 내가 중심에 있어야 합니다.

누구의 마음에 들기 위한, 누구에게 인정받기 위한 삶은 진짜 내 삶이 아닌 것입니다.



저는 이제야 온전한 내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이 마흔이 되어서야 말이죠.

그게 때론 너무나 한탄스럽지만 이제라도 알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당신도 나처럼 온전히 나로서 완전한 삶을 살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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