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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요 Aug 31. 2022

할머니 장례식에 갈 수 있을까

"결혼하면 집에도 올 거 없어. 기집년이 친정 너무 들락거리면 재수없어. 알아? 아빠 장례치룰 때나 와."



결혼하겠다고 남자를 데려간 적도 없는데 아빠는  저런 식으로 밑도 끝도 이 쏘아붙였다.  말의 뜻을 굳이 부드럽게 해석해보자면 '요즘 너가 (아빠) 챙기지 않아서 서운하다'와 같은 뜻이다.

아빠는 자식들이 당신 옆에  붙어서 재잘거려주길 바랐다. 친구들은 물론이고 엄마와 둘이 얘길 나누는 조차 못마땅해 했다. 모든 이야기의 중심은 오직 본인이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다. 물론 은퇴하기  젊은 시절에 아빠 옆에서 재잘거렸다가는 시끄럽다며 여지없이 뺨다구를 맞았겠지만 말이다. 어린 시절 비염이 있어 아빠 옆에서 코를   훌쩍거렸더니 시끄럽다며 성난 호랑이같이 으르렁 대길래  이후론 아빠 옆에선  쉬는 것도 조심스러워졌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빠의 말은 씨가 되어 나는 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빠와 연락을 끊었다. 아빠 발소리만 들어도 심장이 쪼그라들것 같았던 개복치로 30년을 넘게 살아온 내가 아빠를 드디어 삶에서 밀어낸 것이다. 해방감보다 죄책감이 더 컸던 이유는 핸드폰에서 아빠 번호를 삭제함과 동시에 1+1처럼 엄마도 튕겨나갔기 때문이다. 엄마는 아빠를 위해 삼시세끼 따뜻한 밥을 차려주는 걸 본인의 숙명으로 생각했다. 어쩌면 엄마와 내가 농담으로 주고받던 아빠와 결혼한 '원죄'를 속죄하기 위한 선택인지도 모르겠지만.



얼마전 요양원에 있는 할머니가 미음도 넘기지도 못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아빠와 연락을 끊을 즈음 요양원에 들어간 할머니를 이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올해 나이 94. 나는 태어날 때부터 할머니 손에 자랐다. 다르게 말하면 엄마는 결혼 이후 시어머니를 40년이나 모셨다는 말이된다.  고단한 세월을 내가 감히 짐작이나   있을까마는 엄마의  시간만큼  역시 할머니에 대한 미움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어린자녀에게 엄마는 목숨과도 같은 존재다.  흘긴 눈으로 엄마를 보던 할머니가 나는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엄마욕을 해대는 할머니가 긋지긋했고, 10살도 안된 나에게 " 엄마는~" 으로 시작해 욕으로 끝맺는 말을 할때마다 엄마가 불쌍한 만큼 할머니가 점점  싫어졌다. 어린 나는 마음으로라도 엄마 편을 들고 싶었다. 그때의 나에게는 엄마 욕을 하는 아빠도, 할머니도 '' 뿐이었다.    



아흔이 넘도록 꼬장꼬장했던 할머니는 계단에서 넘어져 크게 다치고 나서야 엄마를 보는 눈빛에 독기가 가셨다. 그리고 요양원 신세를 진지 3 만에 급격하게 노쇠해졌고, 얼마전 오빠가 보내준 사진  할머니는 기억  모습과 너무나 다른 모습이었다.  

문득 가슴 속 어딘가 깊은 응어리 같은 것이 뜨겁게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모른척하고 있지만 미루고 미뤄둔 용암같은 슬픔이 자꾸만 울컥울컥 넘쳐흐르려고했다.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각오는 했지만 각오를 했다고 슬픔이 없어지는 건 아니다.



그토록 미웠던 할머니지만 사실 보이지 않는 곳 어딘가에는 애틋한 감정이 남아있었다.

어린  손을 붙잡고  옷을 사입히고, 철마다 이불에 풀을 먹여 빳빳하게 깔아주고,  옷을 깨끗하게 빨아 다림질을 해준건  바쁘고 힘들었던 엄마 대신 할머니였다. 한글을 읽을  모르는 할머니를 대신해 통장 정리를 해주고, 친척 집에 전화를 대신 걸어주고, 밤이면 잠들 때까지 같이 드라마를 보고, 6 내고향을 챙겨보던 할머니 옆에  붙어 있던 것도 나였다.

여름 밤이면 내가 잠들 때까지 계속해서 부채질을 해주던 할머니에게 한번은 내가 물었다.


"할머니는 팔 안 아파?"


할머니는 "아프지" 하면서도 부채질을 멈추지 않았다. 나는 그게 손녀가 덥지 않게 잠들길 바라는 마음이라는 걸 한참 후에 알았지만 모른척했다. 엄마를 힘들게 하는 할머니에게 한 톨의 마음도 주고 싶지 않았다.



나는 할머니 장례식에 갈 수 있을까.



할머니가 점점 기억이 흐릿해져 간다는 엄마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렇게 서슬퍼렇던 할머니의 눈동자는 이제 허공만을 응시하고 있다고 했다. 크게 웃는 일도, 크게 낙담하는 일도 없이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얼굴. 사진  할머니의 눈에는 아무 것도 담겨있지 않았다. 외로움을 많이 타서 틈만나면 가족들에게 관심을 갈구하던 눈빛도, 엄마를 향한 미움 가득했던 눈빛도 찾아볼  없었다. 할머니는 껍데기만 남아 휠체어에 앉아있었. 나는 사진  할머니의 눈동자가 깜깜한  겨울 바다처럼 쓸쓸하고 고독해서 한참을 쳐다봤다.



가족과 거리를 두면서 가장 마음에 걸렸던 것은 '가족의 죽음'이었다.  아무리 생각을 정리하고 정리해도 이것만은 답이 나오지 않았다. 사실은 내가 내리는 결론이라는 게 늘 극단적이고 부정적이라 그 슬픔이 감당이 안돼 늘 중간지점에서 멈춰버리고 말았다.

가끔은  번씩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려보기도 했다. 장례식장에 들어서는 순간 아빠가  쫒아내지는 않을까. 사람들 시선이 있으니 그렇게는  하겠지. 나는 절만 하고 바로 집으로 돌아오면 되는 걸까. 가족과 같이 있어야 하는 걸까. 할머니 장례식을 생각하면서 할머니를 제외한 생각들만 머릿속에 둥둥 떠다녔다.



나는 여전히 아빠가 무섭다. 끔찍하고 싫은 것보다 그의 비난과 눈빛을 마주하는 것이 두렵다. 무엇보다 다시 가족과 연결되는 것이 겁난다.

할머니 장례에 가지 않는다면 나는 후회할까. 나를 용서하지 못할까. 할머니는 나를 이해해줄까. 아니 누구라도 날 이해해줄까.






그리고 이번에도 결론을 내렸다.

가고 싶으면 갈 것이다. 아빠가 뭐라 하든, 소리를 지르든 난리를 치든 가는 것이다. 그리고 할머니의 마지막 길에 죄송한 마음을 담아 인사를 하고 올것이다.



그리고 다른 선택이 있다.

역시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면 가지 않는 것이다. 남들이 욕을 하든, 가족들이 나를 천하의 쌍년으로 치부하든 가지 않는다. 다만 마음으로 할머니를 잘 보내줄 것이다. 내가 후회하지 않을 만큼 할머니를 위해 기도하고 슬퍼하고 애도할 것이다.



완전히 다른 두 가지 결론의 핵심은 '내 감정'이다. 내 감정이 다른 누구의 생각보다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을 어떤 순간에도 잊어서는 안된다.

그게 내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후회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다. 그리고 내 삶을 온전히 사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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