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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요 Aug 19. 2022

시어머니 생신 선물을 고르다 눈물이 나왔다



시어머니 생신을 앞두고 있던 날이었다. 백화점 지날 일이 있어 선물을 고를겸 둘러보다가 중년 여성들을 위한 모자 샵이 눈에 들어왔다.

알록달록 귀여운 것부터 얌전하고 고급스러운 디자인까지 종류가 꽤 많아 어떤 게 좋을까 고민이 되었다.



이건 너무 영해보이고, 이건 너무 칙칙한가 싶고 어머니 취향을 더듬더듬 생각하며 고심해보지만 선뜻 고르기가 어려웠다.



이럴땐 엄마 생각이 난다. 우리 엄마라면 이런 색을 좋아하지, 너무 얌전한 것보단 약간 화려한 걸 좋아하고, 거추장스러운건 딱 질색하고 실용적인 것으로..

엄마 취향을 눈감고 줄줄 읊어댈 정도인데 정작 엄마 모자는 한번도 골라본 적 없다는 생각에 다다르자 문득 슬퍼졌다. 나쁜년.



매년 아빠 생일엔 온 가족이 출근 전 새벽부터 식탁에 둘러앉아 생일축하 노래를 불러야했다. 아빠 기분을 띄우려는 엄마의 눈물겨운 노력 1,000가지 중 한 개 정도랄까. 눈꼽도 못 떼고 식탁에 앉아 박수를 치며 노래를 부르면서 나는 좌절감을 느꼈다.



선물은 줘도 욕을 먹었고 안줘도 욕을 먹었다. 기껏 선물을 사오면 마음에 들지않는걸 사왔다고 욕을 하고 현금을 주면 성의 없다고 도로 가져가라며 휙 던졌다.

그리고는 이때를 가다렸다는 듯 그동안 우리들에게 서운했던 것들을 윽박지르며 늘어놓았다.

아빠와 관련된 모든 시간은 누군가 무거운 돌덩이로 내 심장을 지그시 누르는 것 같은 기분을 들게했다.


 

보상 심리가 있어 그랬던 건 아니었는데 결과적으로 엄마 생일은 항상 뒷전이었다. 미역국도 엄마가 끓였고, 그 흔한 케이크도 잡채도 식탁에 오르지 않았다. 당연히 생일축하 노래같은 건 불러본 적 없었다.

선물도 건너 뛰거나 아빠에 비해 약소했다. 엄마는 늘 선물 같은 거 사올 필요없다고 손사래를 쳤고, 줄 거면 현금을 달라기에 알량한 5만원짜리 두 장을 봉투에 넣어 내밀었다. 그리곤 할 도리 다한 것처럼 평소와 다름없이 엄마 생일을 지나쳐버리곤 했다.



시어머니 생신 선물을 사다가 울컥 눈물이 난 건, 내가 그동안 엄마에게 참 무심한 딸이었다는 자기반성의 감정도 컸지만 가족과 연락을 끊은 후에 엄마 생일에 얼굴 조차 제대로 볼 수 없는 내 처지가 너무 통탄스러웠기 때문이다. 얼굴은 커녕 통화를 하는 것도 어려웠다. 아빠와 연락을 아예 차단해버린 딸과 버젓이 통화할만큼 엄마는 무신경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카톡을 주고받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아빠는 엄마 핸드폰이 울리면 자기 것마냥 들여다보곤 했고 엄마는 그게 싫어서 몇 년 전부터 핸드폰을 무음으로 돌려버렸다. 엄마에게 메시지를 보내면 엄마는 몇 시간이 훌쩍 지난 후에야 답을 했다. 주로 밤늦게 혼자 잠자리에 들 때쯤 엄마는 내 안부에 짧은 답을 남겼다.

그렇게 지구 반대편에서 펜팔을 하듯 띄엄띄엄 연락을 이어갔다.



엄마는 자식인 나보다 늘 아빠가 상처받을까봐 전전긍긍했고, 끝끝내 날 먼저 선택하는 일은 없었다. 어쩌면 엄마는 내가 지금도 엄마와의 연락에 허기를 느끼고 있다는 것조차 모를 지도 모르겠다.



결국 이날 시어머니 선물을 고르지 못했다. 엄마 선물도 제대로 못하는 년이 시어머니 선물을 고심하는 것이 어불성설처럼 느껴졌고, 자꾸만 엄마 생각이 나는 바람에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후로 명절이든 생신이든 시댁에는 무조건 현찰로만 드리고 있다. 현금으로 본인이 원하는 걸 사는 것이 더 효율적이고, 시부모님들도 그걸 더 좋아하실거라고 남편에게 애둘러 말했지만 사실 속마음은 선물을 고르는 그 시간을 엄마가 아닌 시어머니에게 먼저 쓰고 싶지 않았다.



얼마 전 엄마와 1년 여만에 만났다. 엄마도 나도 서로를 기억하는 모습이 달라서 눈이 마주치고나서 1, 2초 정도 서로를 탐색했다.

예전에는 100m밖에서도 엄마를 알아봤는데 이젠 1m 거리에서도 집중하지 않으면 엄마를 그냥 스쳐지나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금새 눈물이 고였다.



백발이 성성해진 엄마는 이제 염색을 하지 않는다며 하얗게 샌 머리를 쓸어넘기며 웃었다. 점점 늙어가는 엄마를 바라보며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가 회의감이 몰려왔다. 엄마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죽을 수도 있지만 아빠를 용서하는 건 도저히 못 하겠다니 나는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걸까.



그럼에도 그 또한 나의 선택이고 엄마의 선택이므로 우리는 서로의 슬픔에 각자 책임을 지며 살아가면 된다고 애써 생각을 고쳐먹는다. 그리우면 그리운대로 나는 내 삶을, 엄마는 엄마의 삶을 잘 살아내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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