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엔 연예인들의 가족사가 공개되며 사회적 분위기가 조금 바꾸기도 했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식이 부모와 인연을 끊고 사는 것에 대해 불편한 시선을 던집니다.
그중에서도 제가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이기적이라는 말입니다.
- 이기적인 모습 외엔 어떤 것도 보이지 않네요.
- 본인만 편하게 살고 싶다는 건데, 너무 이기적이다.
- 본인이 이기적인걸 그럴싸한 변명으로 늘어놓네.
비난하는 사람들은 그들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만 저는 그들의 비난을 한 걸음 떨어져 바라보며 문득 '저들 또한 삶이 행복하지는 않는구나'라고 느꼈습니다.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명제에 옳고 그름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을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사람들이죠. 아마 본인 역시 저 명제에 갇혀 가족을 위해 살며 그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믿을 것입니다. 그 삶이 행복하다면 저는 그분의 삶을 존중합니다. 다만 그 삶이 본인도 버거우면서 다른 선택을 한 사람을 맹목적으로 비난한다면, 그것은 같이 불행하자고 구렁텅이로 끌어내리려는 걸로 밖엔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댓글과 비난에는 답을 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최초의 전제가 저와 다른 분들이니까요.
그런데 사실 비난보다 더 힘든 것은 나의 '희생'을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강요하는 말들입니다.
부모는 바뀌지 않으니 자식이 참아야 하지 않겠냐거나, 원래 네 부모가 센 성격이니 자식인 네가 져주라거나,
부모 이겨먹어서 뭐 하겠냐, 부모가 살면 얼마나 살겠냐, 그냥 네 팔자려니 해라 등 이런 말들을 정말 아무렇지 않게 하는 사람들 말이죠. 이런 말들은 보통 가족, 친척들이 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때론 나에게 소중한 이들일 수도 있겠죠. 그래서 그런 말들에 흔들립니다. 마음에 큰 돌을 올려놓은 것처럼 답답합니다. 나만 참으면.. 나만 넘어가면.. 모두가 편하다는데 내가 분란을 만드는 사람이 된 것 같아 마음이 영 불편합니다.
이런 말들은 언뜻 나를 공감하고 내 마음을 쓰다듬어주는 말 같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 희생을 너무 당연하게 요구하는 말들입니다. 내 희생으로 가족의 평화를 유지하려는 것이지요. 물론 그들도 인식하지 못한 채 하는 말일 가능성이 높으니 비난할 생각은 없습니다.
문제는 아무 잘못도 없이 비난과 모욕, 멸시를 당해도 가족이니까, 가족이라서 우리가 그것을 감내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인식입니다. 사실 저도 그래야 하는 줄 알았습니다.
가족이니까 그런 말도 하는 거지
가족인데 네가 이해해야지
가족인데 그런 것도 못 해줘?
가족인데 뭐 어떻게 할 건데?
폭언을 퍼붓고, 나를 쓰레기 취급하고, 정신적 학대를 당해도 '가족이니까 네가 이해야지'라는 말 한마디면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가족이니까'라는 말은 무슨 짓을 해도 용서해야 하는 면죄부로 쓰기에 부족함이 없었고, 마치 성역처럼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말이 되었으니까요.
지금까지도 저를 괴롭히고, 끊임없이 따라다니는 '가족이니까'라는 이 말의 의미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결국 내 편이라는 믿음
어렸을 때부터 그런 말을 참 많이 듣고 자랐습니다. "결국 너를 위하는 사람은 가족밖에 없어."
아빠는 저 말을 강조하고 또 강조했어요. 이유 없이 혼날 때도, 분풀이를 당할 때도, 갑자기 TV를 보다가도 가족 이외의 다른 사람들은 언제든 배신할 수 있지만 가족은 어떤 상황에서도 결국 네 손을 잡는다고 말이죠. 아주 어린 나이일 때부터 가족 외 사람들은 모두 '악인'으로 간주되고, 가족은 '절대 내편'이라는 프레임이 씌워지는 것입니다. 그런 '절대적인' 가족을 비난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 되어버리는 거죠.
무조건 사랑한다는 믿음
아빠는 나에게 온갖 욕을 퍼부은 다음에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와서 '다 널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말'이라고 본인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했습니다. 때로는 며칠이고 투명인간 취급을 하다가 내가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고 나서야 비로소 눈길을 주며 '부모의 사랑'에 대해 일장연설을 하는 식이었죠.
한 번도 본 적도 느낀 적도 없는 부모의 사랑을 TV 속 주인공에 본인을 투영해 말하며 자신의 모든 행동은 '사랑'에서 비롯되었음을 결코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저 역시 그 말을 결코 의심할 수 없었죠. 부모가 자식을 사랑한다는 것은 세 살짜리도 의심하지 않는 명제이니까요.
절대로 끊어질 수 없다는 믿음
아빠는 아마 단 한순간도 생각해 본 적 없을 겁니다. 본인의 자식이 가족과 인연을 끊고 연락이 두절되는 지금의 상황을 말이죠. 아빠는 항상 말했어요. "부모 자식 관계는 천륜이야."
하늘이 정해준 인연, 절대로 끊어질 수 없는 사이인 가족이기 때문에 무슨 짓을 해도 된다는 잘못된 생각이 가족 간에 자리 잡고 있는 건 아닐까요. 예전에 저는 이 말이 너무 절망스러웠습니다. 정말 이 말처럼 가족으로부터 절대로 벗어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어쩌면 '가족이니까'라는 말의 가설 자체가 틀렸을 수도 있습니다. 혹은 일부는 맞지만 때로는 틀렸고, 무엇보다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이렇게 무책임한 말도 없습니다. 누구도 책임지지 못하는 그 말 때문에 우리는 얼마나 많은 상처를 덮고 또 덮으며 살아왔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