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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요 Dec 04. 2022

엄마의 생일에 내 자리는 없었다

밤 12시, 엄마의 생일 알람이 울렸다. 음력 생일을 치르는 엄마 생일을 잊을까 봐 매년 달력이 바뀔 때마다 표시를 해놓는다. 엄마 생일에 엄마를 보지 못한 것이 벌써 3년이 되었다. 알람을 끄고 엄마에게 오랜만에 카톡을 보냈다.


-엄마, 생일 축하해. 엄마 밥하기 힘드니까 새벽 배송으로 미역국이랑 갈비탕이랑 이것저것 보내려고 하는데...


구구절절 말이 길어진다. 늘 이런 식이다. 별 것 아닌 선물 하나 보내면서도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진다.

혹시나 아빠가 택배 박스에 적힌 내 이름을 보면 괜히 엄마에게 불똥이 튀지는 않을지, 계단을 오르내려야 하는 상가건물이다 보니 무거운 걸 보내면 괜히 다칠까 봐 걱정이 되기도 하고, 내 마음대로 골라 보내면 이건 아빠가 안 먹는다느니, 맛이 어떻다느니 이런 말들을 듣는 것도 부담이다. 그래서 늘 뭘 보내기 전에는 엄마에게 미리 물어보고 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아무리 좋은 마음으로 행동해도 늘 비난받던 그 시절의 기억이 여전히 나를 괴롭히고 있다.

휴대폰을 잘 보지 않는 엄마는 다음 날인 엄마 생일 아침에 답장을 보내왔다. 늘 그렇듯이 ‘됐다’는 짧은 메시지가 끝이었다. 예상했던 말이지만 그럼에도 서운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가족에게 무심한 오빠가 엄마의 생일을 까먹었을까 봐 메시지를 보냈다. 준비를 못했으면 생일 케이크 쿠폰이라도 보내줄 심산이었다. 오빠는 나보다 두 살 위였지만 항상 동생 같은 감정이 들곤 했다. 3대 독자라며 아빠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지만 그만큼 부담감도 컸고, 조금만 아빠의 기대에 못 미쳐도 나보다 더 많이, 더 크게 혼이 났다. 성인이 되면서 오빠는 점점 가족과 멀어졌고 아빠는 밤늦게 들어오는 오빠를 늘 한심한 눈빛으로 쳐다보거나 투명인간 취급하거나 욕을 해댔다.

그럴수록 오빠는 가족들과 멀어졌고 나는 더욱 아빠와 엄마의 비위를 맞추는데 열중했다. 사업을 하는 오빠가 늘 걱정이었던 엄마에게 나까지 걱정을 보태고 싶지 않았고, 그나마 내가 말 잘 듣는 딸이어야 아빠가 소리 지르는 빈도가 한 번이라도 줄어드니까. 나는 그저 하루하루 우리 집이 제발 조용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스스로 엄마 아빠에게 집착했던 것 같기도 하다. 나도 오빠처럼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았다면, 부모 눈치를 보는 대신 나에게 더 집중했다면 지금과는 조금 달랐을까. 결국 나는 제 풀에 지쳐 나가떨어진 거다. 그런 생각을 하는 중에 오빠에게 답이 왔다.

오빠는 호텔을 예약했다고 했다. 늘 으스대는 걸 좋아하는 아빠를 겨냥한 선택이다. 대견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한데 한편으로는 서운한 것 같기도 한 이상한 감정이 들었다. 내가 이젠 정말 가족이 아닌 것 같은 기분. 이제 저 가족에 내 자리는 남아있지 않은 기분.


그러니까 그들은 잘 지내고 있었다. 오히려 평온해 보였다.

나는 내가 빠지면 남은 가족들이 불행할 거라고 단단히 착각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빠는 내가 괘씸해서 잠도 못 자고 화병이 나거나 증오하면서 내내 나와 있었던 일을 곱씹을 거라고 생각했다.

엄마는 괜히 자식 때문에 아빠에게 죄인이 되고,

오빠는 내 역할까지 도맡아 해야 하니 부담스러울 거라고.. 그래서 나는 늘 엄마에게도 오빠에게도 미안했다. 죄인이 된 심정이었다. 아무리 버리고 버려도 죄책감 찌꺼기가 남아있는 기분이었다.


내 존재감이 왜 그렇게 클 거라고 착각했을까. 아빠는 늘 자기 눈 밖에 나면 자식이고 뭐고 다신 안 본다고 으름장을 놓았던 사람인데. 아무 죄책감도 없이 뺨을 때리고 그러고도 분이 안 풀려 죽이겠다고 달려들던 인간인데.

그래도 가족이니까. 자식이니까. 그리고 부모니까. 자식이 등을 돌리면 작은 생채기라도 날 줄 알았던 걸까.

지난 3년 동안 나는 그들이 조금이라도 바뀌기를 기대했을까.


그 집에 살던 시절, 너무 가슴이 답답해서 벽에 머리를 찧으며 울었다. 아빠의 폭언이 칼날처럼 꽂혀서 울음이 멈추지 않았던 그날, 나는 가족을 버리기로 결심했다. 그들에게 상처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도 남들처럼 행복을 느끼며 살고 싶어서 그랬다. 3년이 흘렀고 마음의 안정을 어느 정도 찾았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그 시간 동안 가장 아팠고, 지금도 가장 큰 상처를 안고 있는 사람은 나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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