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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요 Dec 10. 2022

'가족'에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

가족과 더는 연락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을 한 그날, 저는 남편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목놓아 울었습니다. 아빠는 현관을 나서는 내 뒷모습이 안 보일 때까지 소리를 질러댔죠. 도망치듯 집을 나서는 나를 놓칠 새라 엄마가 뒤따라 나왔습니다. 엄마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눈물을 쏟는 나를 보며 한동안 아무 말도 없이 등만 쓰다듬어 주셨어요. 남편은 어떨 줄 몰라하며 안절부절 나를 쳐다볼 뿐이었죠. 결국 저는 엄마에게 “엄마, 나 이제 다시는 안 와.”라고 모질게 말하며 차에 올랐습니다. 엄마는 그런 저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봤겠죠. 

이런 일이 하루 이틀도 아니었는데 그날따라 울음은 쉽게 멈추지 않았고 저는 결국 눈물이 범벅된 채로 엄마에게 인사도 제대로 않고 돌아섰습니다.


화가 났습니다. 왜 아직도 내가 이런 소릴 들어야 하는지, 왜 이 지긋지긋한 관계를 끊어내지 못하는지, 이게 다 엄마 때문이라고 원망을 했던 것 같습니다. 

엄마가 이혼을 했으면,

아니 엄마가 나를 낳지 않았으면,

아니 엄마가 애초에 이런 결혼을 안 했으면,

이런 불행 따윈 내가 느끼지 않아도 될 텐데. 


최근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관계에서 가장 이기적인 사람은 나일지도 모른다.

명분은 '엄마도 불행하니까'였지만 사실은 '더는 아빠 때문에 내가 불행하고 싶지 않았던 것'뿐이었죠. 엄마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관심조차 없었어요. 엄마에게 아빠가 어떤 존재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엄마는 엄마가 선택한 인생을 살았던 것이죠. 그건 그대로 받아들였어야 했어요. 그건 원망의 이유가 될 수 없는 건데 말이에요. 

오히려 저는 자식이라는 걸 무기 삼아 엄마에게 왜 이혼을 하지 않느냐고 닦달을 해왔던 거나 다름없었습니다. 왜 자식이 원하는 대로 해주지 않느냐고 떼를 썼던 거죠. 살면서 난 한 번도 어리광을 피워보지 못했다고 생각했지만 가장 최악의 어리광을 부리고 있었습니다. 


살면서 늘 가족의 사랑을 갈구했고, 그것이 손에 잡히지 않자 그들을 원망하며 살았던 것 같아요. 나를 피해자로 스스로 포지셔닝하고 살았던 거죠.  

아빠는 왜 가족에게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을까.

엄마는 왜 저런 아빠 곁을 떠나지 못하고 스스로 불행을 자초하는 걸까.

할머니는 왜 어린 나에게 그렇게 엄마 욕을 했을까.

오빠는, 왜 돈이 필요할 때만 연락을 하는 걸까. 


끈끈함까진 아니더라도 피를 나눈 가족에게 단 한 번도 위로를 받지 못했던 내가 너무 비참하고 불쌍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땐 몰랐어요. 나는 이미 그런 것들과는 상관없을 정도로 훌쩍 커버렸다는 것을요. 스스로를 충분히 보살필 수 있는 어른이고, 누구도 원망할 필요 없이 그냥 내 인생을 살면 된다는 걸요. 스무 살이 지나고 서른이 지나고 나서도 저는 내내 가족에게 집착하면서 이 관계가 비정상이란 것을 계속 증명하려고 해왔던 것 같아요. 

마흔이 되어서야 저는 깨달았네요. 그런 것들은 이제 아무 의미 없다는 걸요. 아빠는 어차피 그대로 살 거고, 엄마는 엄마대로, 오빠는 또 오빠의 인생을 살아갈 거예요. 나도 그렇게 살면 되는 거예요. 내 인생을 내가 원하는 대로 말이죠. 


'가족'이라는 단어에 거창하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어차피 모두 각자의 인생을 살아내는 것이니까요. 엄마니까, 아빠니까, 오빠니까 그런 건 다 내 입장, 내 기준일 뿐이고 그들이 내가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는다고 원망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반대로 나 역시도 그들이 원하는 대로 살아야 할 의무는 없습니다. 우리 가족의 비극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부모니까, 자식이니까 당연히 그들은 내 말을 따라 줘야 한다는 완벽한 착각에서 말이지요. 


그걸 깨닫고 나자 저는 조금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더 이상 내가 왜 가족과 인연을 끊었는지 설명할 필요가 없어졌어요. 스스로를 설득할 필요가 없어진 거죠. 그들이 나에게 이렇게 행동했기 때문에 나는 이렇게밖에 할 수 없었다가 아니라, 그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나와는 맞지 않는 그들과 조금 거리를 두고 내 인생을 살고 있을 뿐인 거죠. 그래서 그들이 나에게 서운함을 느끼는 것도, 내가 그들에게 느끼는 또 다른 감정들도 인정하고 받아들일 뿐입니다. 이것이 지금 내가 내 삶을 온전히 사는 방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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