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리오-
※ 본 각본집에 수록된 대사와 장면 묘사는 제작 전 단계의 최종 각본을 기준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실제 영화 제작 및 후반 작업 과정에서 연출적 판단, 배우의 즉흥 연기, 편집 방향 등에 따라
완성된 영화의 대사와 장면 구성은 본 각본집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점을 양지해 주시기 바랍니다.
#1 운동장 (아침)
나지막한 아침, 운동장을 비추는 화면에 세영이 등장한다. 세영은 열정적인 제스처를 취하며 달리다가 운동장 중간쯤에서 자세를 유지한 채로 뒤를 돌아본다.
세영
야 빨리 와. 그 정도 속도면 소화 정도밖에 더 돼?
(리안을 재촉하는 말투)
리안
아, 몰라. 너 먼저 가. 힘들어
(발걸음을 늦추는 리안)
세영은 고개를 저으며 다시 앞으로 돌아 트랙의 끝을 향해 달린다. 먼저 간다는 세영의 말에 리안이 손짓하고, 어깨 너머로는 세영의 뛰는 모습이 비친다. 잠시 후, 트랙 속에서 리안이 한숨을 쉬며 등장한다. 리안의 힘든 표정을 올려 하늘을 바라본다. 자연스럽게 하늘 사이에 극의 제목인 “스프린터”가 새겨진다.
#2 편의점(오후)
삑― 삑― 삑― 삑― 검은 화면 속에서 바코드 소리가 들려온다.
귀찮은 표정으로 계산 중인 리안.
리안
(삐익― 삐익)
사천오백 원입니다.
(삶에 활기가 없으며 영혼이 없고, 정적인 음성)
···
안녀히 가세어···
모든 게 귀찮은 태도로 손님을 배웅한 리안이 포스기의 스위치 하나를 툭 내려치며, 뒷짐을 진다.
이 시간이 지루한 듯 시간이 정시로 변하기를 기다리며 손목시계를 뚫어지게 쳐다본다.
리안은 시계를 바라보며 누군가 오기를 기다린다.
(짤랑!) 소리와 함께 누가 봐도 외국인 같은 손님이 등장한다.
외국 손님
밁꾸 있어요? 밁꾸?
리안
네, 밀크 있어요. 저쪽에···
외국 손님이 진열대를 바라본다.
외국 손님
오케이, 땡큐. (고개를 끄덕거리며)
핸드폰을 하는 리안. 그녀에게로 다시 외국 손님이 찾아온다.
외국 손님
아뉘잉. 밀꾹이여. 밀꾹 (허리에 손을 짚고)
리안
뭐 어떤 밀크? 쪼코밀끄? 수투러베리 밀끄? 보네노? (우유를 들면서)
외국 손님이 인상을 쓰며 리안을 쳐다본다.
외국 손님
아니, 밁국 몰라? 미여구
(리안에게 미역국 사진을 보여주며)
리안
아··· 미역국. 예···저기···.
외국 손님
거 참 돱돱하네.
(리안을 째려보며 돌아선 채)
어룝다. 어려워 코리아
(고개를 양쪽으로 저으며)
리안
안녕히 가세요···.
(머리를 긁적거리며)
외국 손님이 나가고 동시에 세모가 들어온다. 세모를 본 리안은 곧바로 갈 준비를 하며 근무복을 벗는다.
세모
안녕하세요!
(활짝 웃으며, 천진난만한 말투로 걸어들어오면서)
리안
네, 안녕하세요.
(영혼없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근무복을 전달한다.)
세모
전달 사항은 있나요~?
(흥얼거리듯이 근무복을 입으며)
리안
없어요. (세모를 쳐다보지도 않고 무심하게)
세모
네~ 고생하셨어요~ (밝은 미소를 지으며)
리안
수고하세요.
리안은 황급히 근무지를 빠져나온다.
#3 서울의 한 번화가(오후)
저녁을 먹기에는 이른 시간, 홍등 불빛들이 번지고, 자동차 시동 소리가 들린다.
리안은 핸드폰만 바라보며 걷고 있다.
그러다 조금 늦는다는 세영의 문자를 보고 카페를 들어가려다가 망설이더니 공원으로 향한다.
그곳에 앉아 핸드폰을 하는 사이, 시간이 많이 흐른다.
#4 공원(오후)
졸음과 사투하는 리안을 향해 뛰어가는 세영.
세영
미안, 늦었지~
리안
빨빨리 안 튀어올래~? (자리에서 일어나며)
세영
갑자기 오늘 안에 결재 서류 보내고 퇴근하고 해서···.
아 왜 하필 불금에 초과근무를 하는 거야.
어느새 리안에게 가까워진 세영. 그녀의 앞에 선다.
리안
아~ 배고파 죽는 줄
세영
아무래도 총무과는 바쁜 시즌이니까. 미안해~
뭐 먹을까? 내가 쏠게 (능글맞게 팔짱을 끼며)
세영이 점심부터 굶었다며 리안의 팔을 잡아끌고 이들은 식당으로 향한다.
시간이 지나, 가게를 나오는 두 사람.
세영
아~ 짱 배불러~ 너무 빵빵해졌다.
다이어트 시작했는데···. (자신의 배를 움켜잡으며)
리안
어쩐지 많이 먹더라~
둘의 눈앞에 가챠샵 보인다.
세영
어··· 저거 뭐야?!
리안
응?
세영
재밌겠다~ 가보자. (미소를 품은 채로)
세영이 리안의 손목을 잡고, 유독 빛을 뿜고 있는 가챠샵으로 향한다.
#5 가챠샵(저녁)
가챠샵의 기계 속 캐릭터들을 구경하며 귀여워하는 세영. 리안이 그저 신기한 표정을 짓는다.
그때, 세영이 캐릭터들이 전시된 중앙으로 달려간다.
세영
우와~! 짱 귀엽다!
정신이 팔린 세영의 곁으로 천천히 다가가는 리안.
모든 것이 신기한 사람처럼 주위를 둘러본다.
한편, 세영은 중앙에서 안쪽으로 움직이며 캐릭터를 구경한다. 그러다 어딘가를 가리킨다.
세영
어! 저거 우리 오빠 최애 캐릭턴데!
그녀의 목소리에 리안이 적극적으로 반응한다.
리안
아~ 저거 좋아하셔? 하나 뽑아드려~
세영
그를까? (리안을 올려다보며)
세영이 가챠를 돌리고 재빠르게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린다.
세영
어! 저건 내 최애인데! (손으로 가리키며)
돈을 탕진하는 세영의 곁으로 리안은 어이없다는 듯이 미소를 짓는다.
그녀의 손에는 이미 많은 플라스틱 공들이 있다.
리안은 정신이 팔린 그녀의 지출을 막기 위해서 어깨를 다독이며 밖으로 안내한다.
#6 가챠샵 밖의 골목
리안이 세영이 들고 있는 플라스틱 공들을 대신 몇 개 들어준다.
손에 담긴 공을 흔들어도 보고, 제자리에서 위로 던져도 보고, 돌려가며 유심히도 관찰한다.
리안
해준 씨가 정말 이걸 좋아해? 완전 에겐남인데?
(피식 웃으며)
세영
말도 마~ 완전 애야. 애.
얼마나 순수하면 드레스 피팅한 나를 보더니 막 울었다니까?
남편이 될 생각에 행복하다나 머라나~
리안
머야~ 찐사랑이네. 결혼이 언제라고 했지?
세영
내년 4월!
리안
날씨도 그렇고, 딱 좋겠다~
세영
그지? 너는 지택이랑 어떻게 돼가? 꽤 오래 만났잖아. 너희.
리안
글쎄, 생각 안 해봤는데…. 부모님이라도 뵈어야 하나…?
세영
취업부터 해. 이것아~
부모님 뵙는데 알바한다고 하면 안 내켜 하시지 않을까?
(어물쩍거리는 그녀를 보다가 장난을 치는 듯 그녀의 팔꿈치를 툭 친다.)
리안
누군 뭐 알바하고 싶어서 하냐···.
(쉬고)
인생은 가챠같아. 외모도, 능력도, 재산도.
(쉬고)
심지어 가족마저… 뽑는 순간, 정해져 있다랄까?
(길게 쉬고)
이 작은 캡슐 안에 답이 정해지고, 삶을 살아가는 거지.
누구는 꽝.
누구는 레어.
누구는 500분의 1 같은 인생.
플라스틱 공을 이리저리 휘저으며 인생을 설명하는 리안.
정적이 흐르다가 리안이 에코백에 공들을 넣는다.
세영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본다.
그녀의 감정에는 안쓰러움과 왠지 모를 미안한 감정이 있다.
그리고 자신을 들고 있는 플라스틱 공을 리안에게 건넨다.
세영
자. 선물! (망설이다가 미소를 지으며)
리안
치···. 고맙다~
(당황하다가 함께 미소를 지으며 선물을 받는다.)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그녀들의 뒷모습을 비추며 장면이 전환된다.
#7 길거리(낮)
길거리에서 지택의 모습이 보이고 리안이 그를 향해 손을 치켜세우며 맞이한다.
그러나 지택은 느긋하게 걸어온다.
리안
택아. 택아. (반갑게 부르며)
리안을 발견한 지택이 밝게 웃으며 걷는다.
리안
야 빨리 안 와?!
(정색하며 큰 목소리로)
지택이 피식 웃으며 뛰기 시작한다.
#8 데이트(낮)
리안과 지택이 밥도 먹고, 쇼핑도 하며 데이트를 즐긴다.
농구 게임을 하는 리안이 너무 못해서 지택은 그녀를 바라보며 헉 소리와 함께 주먹을 입에 문다.
두 연인의 시간은 빠르게 흐르는 기분이 든다.
#9 길거리(오후)
리안과 지택, 길거리를 걷는다. 거리의 끝에는 운동장으로 향하는 골목이 보인다.
지택
여기 매일 와도 좋다. 도심 끝자락에 숲속을 걷는 기분.
리안
맞아. 나 저번에도 세영이랑 여기 왔어.
작은 정적이 흐르고 무언가 망설이는 리안. 조심스레 입을 연다.
리안
택아, 우리 사귄 지 얼마나 되었더라?
지택
글쎄, 한 8년? 9년? 나 대학생 때부터 사귄 거니까.
무튼, 꽤 오래됐겠지.
리안
그러게. 하도 오래 전이라 나도 기억이 잘 안 나.
그래도 여전히 생생한 건 있어.
(살며시 웃으며)
지택
그게 뭔데?
리안
너 20살 때, 나 졸졸 따라다니면서.
한 번만 만나달라고 빌었잖아.
(놀리는 말투로)
지택
내가 또 언제 빌었어~.
그리고 우연히 집 가는 방향이 같았을 뿐이지.
내가 애완견이니? 졸졸 따라다니게?
(걷다가 잠시 멈추며)
자기는 커피숍에서 맨날 와주길 기다려놓고.
리안
야, 말은 바로 하자. 네가 찾아온 거지.
굳이 일하는 곳까지 와서 기다렸잖아.
너, 나 땜에 커피값 많이 나갔었겠다?
내가 그렇게 좋았니? (새침한 말투)
지택
그러게. 그때는 많이 썼지.
(쉬고)
안 되겠다. 보상이라도 받아야겠다.
오늘 네가 치킨 쏴.
리안
뭐래, 웬 치킨. (동시에 발걸음을 멈추며)
지택
떼인 돈 받아야지~ 빨리 치킨 사줘. 아님, 피자? 피자 어때?
리안
와, 치사하게 진짜!
티격태격하며 길거리를 걷는 리안과 지택. 어느새 거리의 끝에 다다른다.
#10 운동자의 옆길(오후)
운동장에 들어선 두 사람. 리안이 다시 망설인다.
리안
근데 택아, 그..
지택
응?
리안
우리 이제 결혼에 대해 생각해 볼 시기인 거 같은데…
하물며 부모님이라도 뵙고 해야 하지 않아?
지택
아…. (머뭇거리며) 갑자기?
리안
아니 뭐 그냥…. 나이도 나이니까.
긴 정적이 흐른다. 리안은 땅을 바라보고, 지택은 하늘을 올려다 보며 걷는다.
지택이 고민 끝에 멈춰 선다. 리안은 오지 않는 지택을 돌아본다.
지택
리안아…. 미안하지만…. 너랑 결혼까지는 아닌 거 같아.
너는 있어? 나랑 결혼할 생각이?
리안
아니, 뭐, 딱히 결혼에 대한 로망이 있는 거는 아니야.
그래도 해야 한다면, 너랑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좀 섭섭하네. 그렇게 딱 잘라 말하니까….
(목소리가 쥐구멍으로 들어간다.)
침묵이 이어진다.
지택이 고개를 여러 번 끄덕이며 떨군다. 그리고 다시 걸음을 움직인다.
리안의 표정에는 왠지 모르는 서운함이 묻어있다
그의 발에 맞춰 리안도 몸을 돌려 함께 걷는다.
리안 나레이션
생각하지 못했다.
나의 삶이 덫이 되어 나를 괴롭힐지.
나는 사랑조차 용납할 수 없는 꽝인 걸까.
리안
(머뭇거리다가)
내 직업 땜에 그래? 삶이 딱해서?
지택
결혼은… 아무래도 신중해야 하잖아.
계획도 세워야 하고… 미래도 생각해서….
리안
왜 미래가 없어 보여?
내가 그깟 알바나 하면서 사니까?
(풀이 죽은 듯이)
지택
현실적으로 생각한 거야.
리안
나도 현실적으로 생각하고 있어.
야근했다며 피곤에 찌들어 보고싶고, 상사 욕하면서 너한테 하소연 하고싶어!
그러고 싶다고 나도!
(어이없다는 듯이 웃다가 점점 목소리가 격해지며 화를 제어하지 못한다.)
지택
알아, 아는데 그럼, 어떻게 하자고 나보고.
나한테도 미래라는 게 있잖아.
난 그냥 안정적으로 살아있으면 좋겠어.
가족도 꾸리고, 별 부담이 없어 행복했으면….
리안
부담까지 느껴가며 왜 십 년씩이나 만나준 거야… 가족도 못 꾸리는 나를….
지택
(일그러진 얼굴로)
너는 항상 그러더라.
자기를 한없이 깎아내리면서 남 무안하게 만들어버리는…
(한숨)
그렇게라도 말하면 기분이 좀 편해?
내가 쓰레기가 돼주면서 미안하다, 잘못했다 말하면 끝나냐고.
(길게 쉬고 꺼내는 한마디)
너… 이거 자격지심이야.
(싫증을 내며)
지택도 언성이 높아진다. 회심의 한마디가 리안의 가슴에 묵직하게 박힌다.
리안
뭐? 자격지심? 그래 너보다 부족해서, 아니, 너랑은 달라서 그렇게 느끼고 있나 보다.
근데 네가 그렇게 판단하면, 내 인생이 형편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는 걸….
너는… 아니?
지택
그만 이야기하자. 그만.
너, 그 기분에 맞춰주는 것도, 있지도 않는 피해자, 가해자 나누는 짓도… 이제 지친다.
(고개를 떨구다가 결심에 찬 눈빛으로 바라본다.)
나 먼저 가볼게.
시간을 좀 갖자 우리… 미래에 대해서도
(한숨을 쉬며)
리안
이대로 가면 너 진짜… 진짜 날 그렇게 봐왔고… 그렇게 생각하고…
(울먹이며 소리치다가 슬픔에 잠겨 목소리가 줄어든다.)
떠나는 지택, 제자리에 앉아 하염없이 우는 리안. 화면은 반으로 나누어 두 사람을 보여준다.
리안 나레이션
잡고 싶지만 잡을 수 없었다.
그게 내가 가진 결말의 한계였으니까.
지택 나레이션
돌아가고 싶지만 돌아갈 수 없었다.
다른 우리의 결말에는 한계가 있으니까.
#11 리안의 집
그와 함께한 사진들을 지우는 리안. 연락처를 지우려다가 이름만 바꾼다.
묘한 짜증과 슬픔이 몰려오는 바람에 핸드폰을 던지고 침대에 엎드려 베개에 얼굴을 박는다.
리안 나레이션
어쩌면 끝날 사랑이었다.
비극적인 결말로 끝맺을 사랑.
이번 인생은 꽝이었다.
몇 개월이 지난 후
#12 편의점 앞
무표정의 리안이 알바를 마치고 편의점을 나오다가 자신을 기다린 지택을 본다.
밝아진 분위기의 지택이 예전과 사뭇 다른 느낌이다.
지택
아. 안녕. 오랜만이네. 아직 여기에서 일하는구나. (편의점을 바라보며)
리안
여긴 왜….
지택
아…좀 걸을까? 할 말도 있고, 너 걷는 거 좋아하잖아. (어색함과 망설임이 담긴 채)
리안
그래, 뭐.
정적이 흐르는 거리에 걸음 소리만 가득 찬다.
벤치를 발견한 지택, 머뭇거리며 입을 연다.
지택
여기… 좀 앉을까?
리안
그래. (벤치에 앉으며)
못 본 사이에 얼굴이 훨씬 좋아졌네. (무심하게)
지택
아, 머 그냥….
너는 요즘 머하고 지내?
만나는 사람이라도 생겼어?
리안
알아서 뭐 하게.
아잇, 이건 왜 이리 안 까져.
리안이 캔맥주를 따는데 버거워한다. 말투는 가시에 박힌 듯이 날카롭고 까칠하다.
지택
줘봐. (그녀의 캔을 따주며)
리안
뭐 고맙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새침한 말투)
지택
아~ 그… 나 결혼해.
그래도 우리 10년 가까이 만났는데 안 전해줄 수도 없고, 겹겹이 아는 지인들도 있고 하니까….
시간 되면 잠깐이라도 들려. 예찬이랑 주희도 온다더라….
(조심스럽고 머쓱한 말투로 머리를 긁적이며)
리안
그래서 얼굴이 밝았던 거였구나.
좋겠네. 나랑은 이루지 못할 소원… 드디어 이뤄서…
(옅은 숨을 내쉬다가 앞머리를 손으로 넘기며)
근데 있지, 나 못 가겠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아니, 안 갈래. 네 결혼식.
지택아, 너는 나를 두 번 죽였어.
다른 인생이라며 헤어지는 결말로 나를 인도했고, 보란 듯이 나타나 결혼한다며 준 이게.
우리는 역시 달랐음을 증명했어.
미안하다. 진작 헤어졌으면 더 빨리 행복했을 텐데.
내가 너의 인생에 걸림돌 같은 거였다.
(청첩장을 흔들며)
지택
무슨 말을 그렇… (그녀를 따라 일어나며)
리안
그리고 나 남자 생겼어. 날 더 이해해 주고 사랑해 줘.
내 마음도, 내 직업도, 내 삶도.
그러니까 너도 그렇게 잘 살아. 할 얘기 없으면, 이만 가볼게.
다신 안 마주쳤으면 좋겠다.
(지택의 말을 끊고, 거짓말을 섞어가며 태연한 모습으로 자신을 감춘다.)
먼저 자리를 벗어나는 리안.
#13 공원의 벤치
한동안 멍하니 거리를 걷다가 공원의 벤치에 앉는다. 노을이 그녀의 곁을 노랗게 물들인다.
리안
누구는 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아니?
그냥 하는 거야 그냥. 나도 너랑 결혼할 생각 없었어!
리안이 서럽게 울며 맥주캔을 찌그러뜨린 채 던진다. 그러자 검은 실루엣이 그녀의 앞으로 스친다.
동호회 임원
에헤이~ 길에다 막 쓰레기 던지고 그라믄 안돼요!
(리안이 던진 캔 주워 비닐에 넣으며)
리안
예? 아… 죄송합니다.
동호회 임원
얼레! 왜 울먹이시지.
내가 너무 심하게 말했나?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세요?
리안
아뇨. 그냥… (고개를 숙이며)
동호회 임원
허허… 그럴 때는 좀 뛰면 나아지던데…. 산책도 좋고…. (옅은 당황의 말투)
고개를 들어 공원을 뛰는 사람들을 본 리안. 그녀의 눈앞에 형광색 조끼가 비친다.
주위로 반딧불이 같은 여러 사람들이 바닥의 무언가를 줍고 있다.
리안
아…네…. 환경미화 중이세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동호회 임원
뭐, 그것도 맞는 말이긴 하지만, 환경미화원은 아니고 플로깅 중입니다.
리안
플러팅? (흠칫하며)
동호회 임원
예? 플로깅이요…. 플로깅…. (시큰둥한 표정으로)
리안
아… 플로깅~ 그게 뭐예요?
동호회 임원
음~ 러닝하면서 길거리의 쓰레기들은 줍는 활동이죠.
저기 있는 사람들 모두 저희 플로깅 회원입니다.
(주변의 반딧불이들을 가리키며)
리안
아~ 좋은 일 하시네요.
동호회 임원
아뇨, 머 일종의 여가라고 생각합니다.
운동도 되고 환경도 생각하고 겸사겸사. 그러지 말고, 시간이 되시면 동호회 참여해 보세요!
같이 뛰다 보면, 거 답답한 게 조금이라도 해소되지 않을까요?
리안
네…. 뭐 조언 감사합니다.
동호회 임원
그럼, 기회 되면 봬요.
여러분, 여기도 끝난 거 같은데 슬슬 다음 코스로 이동할게요!
(멀리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손을 흔든다.)
동호회 사람들
예~
리안이 공원으로부터 서서히 멀어져가는 그들을 바라만 본다.
-다음 날-
#14 편의점 안
리안은 편의점 안 창문을 통해 쉐도우 복싱을 하며 지나가는 어느 한 사람을 본다.
리안
슈…슈슉…슉슉 이것은 입에서 나는 소리여~
(책상에 턱을 괸 채, 그의 행동을 더빙한다.)
하…지루해…. (하품을 하며)
지루한 몸을 책상에 엎드린 채 SNS를 본다. 그러다 우연히 결혼에 대한 게시글을 발견하는 리안.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며 다시 슬픔에 잠긴다.
#15 운동장 옆길
리안과 세영이 퇴근길에 만나, 함께 운동장에 앉아 있다.
세영
그나저나 같이 퇴근하는 거 오랜만이다.
(뚱한 그녀의 얼굴을 보며 눈치를 보며)
너 설마, 아직도 미련이 남아있…. 아니다, 갑자기 찾아와서 그렇게 통보하면 떠오를 만도 하지.
(다시 눈치를 살핀다.)
야 괜찮아~ 나라는 좁고 남자는 차고도 넘쳐. 차라리 잘 됐어. 좀 앉자.
운동장을 향해 고개를 세우는 리안. 좀 전에 보았던 복싱선수를 발견한다.
리안
어…. 어? 저 사람 아까 그 슈슉….
세영
음? 수슉? 먼 슈슉?
복싱선수의 진지함에 한껏 그를 지켜보는 리안.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한다.
리안
아…. 아무것도 아니야.
복싱선수 원테이크가 이어지며 어느새, 계속되는 세영의 혼잣말.
리안은 세영의 말이 귀담아지지 않는다.
세영
그나저나 양심도 없나.
자기가 찼으면서 청첩장 주는 건 무슨 전개야? 여기가 미국이야? 할리우드냐고?
그때와는 사뭇 달라 보이는 복싱선수.
그를 유심히 들여다볼수록 우스꽝스러운 몸에서 영혼을 바칠 듯 맹렬해진다.
사투를 벌이는 그에게 한눈이 팔린 리안.
그는 줄넘기를 멈추고, 쉐도우복싱을 하다가, 50m 달리기를 한다.
숨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헐떡거린다. 그의 옷에는 이미 땀으로 얼룩져있다.
또 다시 같은 자리에서 몇 번의 반복이 이어진다.
실패하는 그를 보며, 입술 깨물면서까지 아쉬워하는 리안.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 감정을 이입하기 시작한다. 문득, 과거의 말이 리안의 머릿속에 스친다.
임원의 목소리
운동도 되고 환경도 생각하고 겸사 겸사죠.
같이 뛰다 보면 답답한 게 조금이라도 해소되지 않을까요?
순간, 그녀의 눈이 번뜩인다.
복싱선수는 목표를 달성하자 환하게 웃으며, 마치 온몸으로 포효하듯 승리의 기운을 내뿜는다.
리안은 그 모습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육성으로 가슴 속 깊이 차오르는 감격을 내뱉는다.
리안
됐어! 됐어!
(주먹을 불끈 쥐며)
세영이 혼잣말을 하다가 당황하며 그녀를 올려다본다.
세영
음? 됐어? 뭐가 됐어? 뭐가?
리안
아… 아니야 갈 때가 됐다고…. 가자…집에… 하하… (당황스러운 표정)
세영
(리안이 이별에 미쳐버린 줄 알고 안타까운 미소를 지으며)
그래, 너도 10년이나 만났는데 제정신이 아니겠지. 들어가서 쉬자.
#16 리안 집
그녀가 노트북을 바라보며 플로깅 가입에 대해 고민한다. 갑자기 노트북이 말썽을 부린다.
리안
아, 이거 또 이러네. 이 똥컴, 진짜 하….
(렉 걸린 노트북을 두드리며)
그러다 신청 부분을 잘못 눌러버린 리안.
리안
어? 어! 어! (당황하는 말투)
아 씨… 어떡해… 하…. (손으로 머리카락을 마구 흔들며)
시간은 흐르고 고민하는 리안. 무언가 결심한다.
리안
아 몰라, 일단 해봐. (귀찮다는 듯이 침대에 몸을 맡기며)
-시간이 지나, 플로깅 당일-
#17 리안 방
테이크가 끊지 않고 자연스럽게 다음날이 된다. 툴툴대는 리안. 방문을 열고 들어와 양말을 신는다.
핸드폰에는 “폴로깅하는 날”이라는 알림이 울린다. 시계 줄을 차며 현관으로 나선다.
#18 현관문
무심코 슬리퍼를 신고 나가는 리안. 다시 돌아와, 허름한 신발로 바꿔 신고 나간다.
화면은 그녀의 신발만 비추고, 연이은 한숨이 들린다.
#19 어느 한 공원(낮)
동호회 회장
자 여러분! 오늘 새로 오신 회원님이십니다. 다들 리안씨에게 박수~
동호회 사람들
잘 부탁해요.
(박수 소리)
사람들 틈 사이로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세모
어!!! (놀란 표정과 함께 반갑다는 듯이 손을 흔들며)
리안
어…?
(저 사람이 여기 왜 있냐는 듯이 의아해하는 표정과 약간의 떨떠름한 표정)
세모를 귀찮게 여기는 리안. 세모가 계속 손을 흔들어보아도 부끄러운 듯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고개를 돌린다. 뻘쭘해하는 세모. 흔들던 손으로 머리를 빗으며 머쓱해한다. 하지만 그의 입가엔 여전히 미소가 남아있다.
동호회 임원2
자, 다들 봉투랑 집게 챙기셨죠? 천천히 움직이다 저 짝 모퉁이 돌면서부터 스퍼트낼게요.
힘드시면 각자 쉬어가면서 페이스 조절하시면 돼요. 그럼 다들 파이팅!
(전쟁 영화의 한 장면처럼 한 손에 집게를 들며 멋진 연설을 마친다. 그의 말에 사람들이 반응한다.)
동호회 사람들이 하나둘씩 흩어져 쓰레기를 줍는다. 눈치를 살피는 리안. 그들의 행동을 따라 하기 시작한다. 누군가는 껌딱지를 떼어내고, 누군가는 버려진 캔을 발로 밟는다. 리안도 자신의 일을 찾아 헤맨다.
그들이 지나간 자리를 돌아보는 리안. 매우 깨끗하고 생기 돋은 거리가 나타난다.
자연스레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20 길가
폴로깅을 하는 사람들. 그 사이로 리안이 보인다. 리안의 서투른 행동을 보며 안내하는 세모.
세모
어어! 폐휴지는 이쪽!
(잠시 후)
플라스틱은 라벨 떼시고
(잠시 후)
리안님, 거기 길 없어요! 일로, 일로
계속되는 세모의 참견. 리안은 귀찮기만 하다.
#21 벤치가 있는 길거리
봉투에 쓰레기가 거의 차 있을 때, 병 하나를 집는 리안.
그러다 병 안에 마시다 남은 액체가 그녀의 몸에 묻는다.
리안
우웩, 하 씨, 왜 먹다 남은 걸 막 버려! (소스라치며 옷가지를 만진다.)
인상을 쓰는 리안. 냄새를 맡아보기도 하고, 군데군데 훑어보기도 한다.
그때 바로 뒤에서 세모가 등장한다.
세모
괜찮아요? 아이고… 조심 좀 하지.
특히 이런 공병 집을 때는 항상 안을 살피… (계속 자기 말만 하듯이)
리안
전 괜찮아요. 먼저 가세요. 뒤따라갈게요. (그의 말을 끊으며)
세모
예? 무슨 소리입니까?
저는 오늘 뒷정리 담당이라 뒤에 있어야 하는데?
아 정말 괜찮으시죠? 냄새 많이 날 텐데~ 막걸리라~
리안
네네, 괜찮아요. 제가 알아서 할…
(그의 행동이 귀찮다는 말투)
킁킁·· 킁킁··
막걸리 냄새의 출처를 찾는 리안.
세모
킁킁·· 킁킁··
(세모도 냄새를 따라 그녀의 옷을 향해 코를 들이밀며.)
하윽~ 거 봐요. 막걸리라서 냄새도 심하네.
(그녀의 옷가지를 잡아당긴 채)
리안
하아… 요즘 왜 이러냐, 진짜.
(팔과 어깨를 털썩 내려둔 채)
세모
흐음… 잠만 기다려봐요.
세모가 가방에서 세정 티슈와 휴대용 섬유탈취제를 꺼낸다. 그리고 그녀의 옷을 만지며 냄새를 지워낸다.
세모
됐다! 임시방편이니까, 집 가서 세탁하시구.
번질 수 있으니, 손빨래가 좋겠네요.
(웃으며 문지르던 옷가지를 내려둔다.)
리안
킁킁…뭐 감사합니다.
(냄새를 맡고, 고개를 숙여 감사의 표시를 한다.)
세모
그나저나, 이미 다 가셨나? (두리번거리며)
세모의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전화가 걸려온다.
엄마
야 세모야. 너 이번에는 사진 꼭 찍어야한다.
저번처럼 그냥 오면 운영 지원금이고 머고 아무것도 못 받아!
세모
아이 참. 알겄어유 어무이. 금방 찍고 글로 갈게.
어이, 어이 이따 봬유~ (능청스러운 말투로 전화를 끊으며.)
여기는 제가 마무리할 테니까 먼저 가세요. 저는 보고 올릴 사진을 찍어야 해서.
리안
네…. 그럼…. (꾸벅이며)
#22 쉼터
휴식이 찾아오고, 혼자 김밥을 먹으며 멀리서 떠드는 동호회 사람들을 향해 멍을 때리는 리안.
그녀의 곁으로 세모가 등장한다.
세모
사람 뚫리겠네. 멀 그렇게 봐요? 읏차.
(뒤에서 갑자기 나타나 리안의 옆에 앉으며)
리안
엄마! 깜짝아!
(세모를 피하기 위해 옆으로 물러나며)
세모
(한 박자 쉬고)
옷은 어때요? 냄새는? (그녀에게 어깨를 붙이며 관심을 가지는 듯한 몸짓)
리안
덕분에 아침 댓바람부터 낮술 때린 취객처럼 보이진 않겠네요. (옷을 보며 )
세모
오~ 다행이네~ (다시 고개를 돌리며)
아, 비유도 매우 적절했고요.
피식 웃는 리안. 세모도 흐뭇하게 바라본다.
리안
어머니 일은 잘 마무리하셨어요?
세모
저 엄마 없는데요? (태연한 표정과 말투)
리안
예? 아니, 아까 전화로 분명 어머니라고… (당황한 눈빛)
세모
아~ 동호회 회장님이에요. 몇 년 전부터 플로깅 시작하면서 알게 되었거든요.
지금은 그냥 엄마 같아서 그냥 엄마라 불러요.
(이해한 듯 미소를 띠며)
리안
아… 그렇구나… 알바는 안 힘드세요?
(당황한 모습을 지우고자 화제를 돌리며)
세모
그럼요. 행복해요.
(먼 곳을 바라보며 천진난만한 말투)
리안
아하… 곧 월급날이라서?
뭐 하고 싶은 게 있으신가 보네요.
(고개를 떨구며 신발을 동동거린다.)
세모
네, 빚 갚을 수 있어서요. 그 돈으로.
리안
네? 빚이요?
아니 아무리 돈이 필요하다지만 그 나이에 벌써 대출을…
세모
아~ 대출이 아니라.
(웃으며 나른한 말투)
잠시 머뭇거리는 세모. 천천히 고백한다.
세모
흠… 노름쟁이 말론 엄마랑 저는 숨바꼭질 중이랬어요.
그러다가 유치원 때, 엄마 등에 업힌 친구들을 보면서 나만 평생 숨바꼭질한다는 걸 알았죠.
아! 그 노름꾼이 우리 아빠.
(노름꾼에 대한 설명을 빠뜨렸다가 생각났다는 듯이).
아버진 결국 노름쟁이 운명대로 돈 때문에 인생마저 포기했어요. 무책임하게.
(고개를 잠시 떨구더니)
뭐,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기도 하고… 다 크고 남은 건 빚밖에 없더라고요.
리안
그럼, 언제부터 빚을….
세모
한~ 중학생 때? 처음으로 전단질 돌리며 돈을 갚았어요.
이젠 내 빚으로 되었으니까 뭐.
리안
취미는 없으세요…?
세모
음… 그런 건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그럴 시간도 없었고.
몸을 앞뒤로 흔드는 세모. 차분하게, 조금의 아픔도, 조금의 슬픔도 없어 보인다.
리안
괜찮…으세요…?
(걱정어린 눈빛)
세모
(피식 웃으며)
처음엔 저도 시발시발거렸죠.
근데 희한하게 점점 무뎌지더라고요.
살기 위해 정말 할 수 있는 알바는 다 해본 거 같아요.
그렇게 알바가 끝나면, 밤이 찾아오고… 아침을 기다려요.
그리고 한적한 곳에 앉아, 뜨는 해를 바라보죠.
아… 이렇게라도 살아 있다?
(손목의 맥박을 짚으며)
고요한 새벽에 느껴지는 손목 어딘가의 맥박 소리가… 뛰다 못해 소스라치는 느낌이에요.
그걸 느낄 때면 늘 행복해요.
숨을 쉰다는 방증이니까.
(쉬고)
뭐, 채무도 줄어드는 재미도 있고.
이런 재미마저 없었으면 그 아비에 그 자식 팔자였겠죠?
리안
저랑 별반 다르지 않네요.
(고개를 떨구며)
세모
리안씨도 혼자세요?
리안
아뇨, 가족있는데요?
세모
아… (잠깐 생각하다 깨달은 표정)
벙찐 세모를 바라보며 피식 웃는 리안.
리안
있기야 있는데 형편이 너무 어려워서… 저도 하루살이처럼 살아요.
세모
누구나 다 사정이 있겠죠. 뭐.
하나둘씩 일어나는 사람들. 이동할 채비를 한다. 세모가 그 모습을 본다.
세모
슬슬 갑시다. 우리도.
리안에게 신호를 보내는 세모. 두 사람은 무릎을 짚고 일어난다.
#23 공원
한참 활동 중, 공원 너머에서 지택과 그의 약혼녀를 발견한 리안.
남녀는 사랑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공원을 걷고 있다. 그 장면이 자신의 과거와 같으면서, 행복해져 버린 지택의 모습에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의 충격을 받은 리안.
지난날이 그립거나, 혹여 자신의 상황이 초라하게 느껴져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다.
약혼녀
오빠, 나 잠시만 화장실 좀.
지택
어어 그래.
공원을 두리번거리다가 멀리서 리안의 실루엣을 본 지택. 몸을 비틀어가며 리안을 찾는다.
지택
리안?
지택이 다시 약혼녀가 떠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다가 리안의 실루엣으로 발걸음을 움직인다.
둘은 서서히 가까워진다.
지택
리안인가? 혹시 리안이니? 리안….
(고개를 계속 기웃거리며)
당황하며 갈팡질팡하는 리안, 숨을 곳이 마땅히 없다.
지택이 실루엣의 정체를 확인할 찰나, 누군가 뒤에서 그의 머리에 종량제 봉투를 뒤집어씌운다.
지택
아악… 악 이거 뭐야!!!(비틀거리며)
리안에게 도망가라며 손짓하며 뛰는 남자. 세모이다. 그의 입가에는 장난기가 스며든 미소가 번진다.
한편, 동호회 임원이 리안에게 썬캡을 씌워 주고, 지택을 바라보는 어깨를 돌린다.
손짓하며 뛰는 세모, 모자 속 입가가 미소로 바뀌는 리안. 몸부림치는 지택. 살며시, 그리고 서서히 그들을 비춘다. 시간은 마치 그들에게 소박한 변화를 줄 것처럼 천천히 흐른다.
#24 코스의 종착지(밤)
지택에게 가까스로 도망친 리안과 세모. 자리에 걸터앉아 숨을 헐떡인다.
생각이 많아진 리안의 곁으로 동호회 사람들이 다가온다.
동호회 회원3
무슨 실연도 이런 실연이 없구먼.
동호회 회원4
원래 다~ 그 나이에 이별도 해보고 새로운 사랑도 찾아보고 하는 거여.
동호회 회원2
오늘 참 고생 많았어. 리안씨.
동호회 회원5
이것 좀 챙겨가~ 이것도 가면서 마시구.
동호회 회원2
다들 고생하셨어요~!
리안에게 음료를 건네고, 어깨를 주물러주는 사람들. 리안이 우울한 표정을 하다가, 그들을 보며 방긋 웃는다. 세모는 옆에서 숨을 고르고 있다.
#25 노을이 물들인 길거리
플로깅이 끝난 리안과 세모. 나란히 길을 걷는다.
리안
그… 아까… 왜 도와주셨어요? (머뭇거리며)
세모
도와달라 하는 거 같길래…
(밤하늘을 바라보며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걷고 있다.)
리안
네? 제가 언제!?….
잠깐, 발끈하다가 차분하게 돌아와 그의 눈치를 살핀다.
리안
궁금하진 않아요? 뭣 땜에 그랬는지?
세모
그냥~ 힘든 일이 있었구나. 힘들겠구나.
별반 다를 거 없죠.
리안씨나, 저나, 리안씨를 도와준 사람들이나.
리안
그래도 우린 좀 다르잖아요.
세모
다 똑같은 사람인데 뭘…
(고개를 떨군다.)
리안
똑같은 사람?
세모
유튜브에서 봤는데, 인류가 살아온 세월이 지구 나이로 치면, 4초 살았대요. 고작 4초.
뭐 그렇게 따지면, 사람들이 전부 단거리 달리기 중 아니겠어요?
리안
그러니까, 결국 다 같은 사람이다~?
세모
그죠, 뭐 다 같은 사람….
리안
그럼… 행복도 다를 거 없겠죠?
(옅은 미소로 세모를 바라보며.)
세모
그걸 제가 어떻게….
리안
아니, 뭐, 늘 행복해 보여서….
잠시 먼 곳을 보는 세모. 그녀의 말의 의미를 생각하다가 깨닫고 방긋 웃음을 보인다.
세모
별반 다를 거 없어요. 행복도.
웃으며 고개를 돌려, 얼굴을 마주한 두 사람. 서로에게 내밀한 동질감을 느낀다.
어느 덧, 길의 끝이 보이고 모퉁이에서 두 사람의 방향이 달라진다. 둘은 어물쩍거리며 인사를 건넨다.
#26 현관문
현관문 앞에 앉아 상자 속 새 신발을 꺼내는 리안. 그 옆에는 허름한 운동화와 슬리퍼가 있다.
그녀는 신발을 신으며 옅은 음으로 흥얼거리고는 걸음을 내딛는다.
걸음마다 전과는 사뭇 다른 가벼움이 배어 있다.
#27 운동장
세영을 만난 리안.
세영
머냐? 슬리퍼만 신던 애가 웬일?
리안
나도 집에 운동화 있거든여~ 좀 뛰어 볼려고.
세영
아~ 다이어트?
리안
살쪄 보여? (걱정 어린 눈빛)
세영
장난~ 장난~ (발그레한 웃음)
리안의 팔을 감싸는 세영
세영
아 참, 플러깅인가 머신가는 어때? 재밌어?
리안
플로깅~ 뭐~ 뛰는 것도 재밌고 사람들도 괜찮고.
그냥 쏘쏘~ (새침한 말투로 웃으며)
세영
웬열, 항상 부정 타듯이 말하더니, 혹시 너~ 거기서 남자라도 만난 거 아니야~?
리안
야, 남자는 무슨 남자. 빨리 가자. 나 내일 아침 알바야.
서서히 뛰기 시작하는 리안. 세영으로부터 멀어진다.
세영
얼레? 쟤가 그럴 애가 아닌데~ 진짜 남자라도 생긴 거야? 뭔데, 뭔데?
리안
아 됐어~ 빨리 오기나 해!!
#28 편의점(아침)
다음 날, 리안이 편의점에서 플로깅 참가 투표란에 “참”을 선택한다. 그리고 자신의 다이어리에 기록한다.
흥얼거리며 생기 가득한 리안. 카메라는 그녀의 새 신발을 따라 투표란을 비추고 다이어리로 향한다.
“짤랑!”
벌떡 일어나는 리안.
리안
어서 오세요! (맑고 경쾌한 목소리)
#29 운동장(엔딩크레딧)
검은 화면에 영화 제목이 나타나고 노랫소리가 재생된다.
글씨가 사라지며 검은 화면이 점차 뚜렷해지더니 운동장을 비춘다.
위에서 내려다본 운동장에는 시간이 빠르게 흘러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모습이 담긴다.
화면은 여전히 운동장에 있는 사람들을 보여주며 크레딧이 올라간다.
#30 쿠키 영상
리안
어서 오세요! (맑고 경쾌한 목소리)
숨을 헐떡이며 닭가슴살을 들고 편의점 계산대에 온 복싱선수.
리안이 복싱선수를 향해 미소를 보인 채 결제를 해주며, 음료를 건넨다.
리안
그것만 드시면 퍽퍽해요. 이거라도 드세요. (다정한 목소리로)
복싱선수
어…어… 감사합니다…. (당황하고 쭈뼛대는 모습)
편의점 나서는 복싱선수. 목을 돌리며 근육을 푼다.
잠시, 음료를 쳐다보더니 무심하게 주머니에 넣고, 다시 원, 투 쉐도우복싱을 하며 발걸음을 옮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