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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근거림 Mar 26. 2017

낡아버린, 그곳에 가면

이따금씩 동네를 배회하곤 한다. 책을 읽으려 해도 좀처럼 집중이 되질 않고, 티브이를 보려 해도 관심을 끄는 방송이 없을 때 말이다. '그래도 어디를 다녀 오겠다고 정해두는 게 좋지 않을까?' 고민하다가도 걷다 보면 주변 풍경에 매료되어서 인지, 아니면 지니고 있던 상념에 깊게 빠져서인지 무엇을 꼭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어디를 꼭 걸어야 한다는 목적이 없기에 발길이 이끄는 대로, 시선을 사로잡는 대로 걷는다. 그러다가 발길을 멈추고, 시선을 고정하게 되는 곳이 나타나면 그곳은 주로 정겨움이 숨 쉬고 있는 장소였다.


물론, 30년 동안 한 동네에서 토박이로 살아온 나에게는 정겹지 않은 곳이 없다. 호기심 많던 어린 시절에는 동네의 골목길이란 골목길은 모두 돌아다녔고, 나이가 점차 들어가면서 음식점에서부터 술집까지 한 번쯤은 들어가 보거나 들어 본 곳이 되었다. 홍은동이라는, 인근에 위치한 신촌이나 종로에 비해 덜 알려진 나의 고향에는 화려함은 없지만 익숙함이 있다.


오늘은 포방터 시장이라 불리는 곳을 지났다. 포방터는 6•25 전쟁 때 퇴각하는 북한군을 공격하기 위해 대포를 설치한 곳이라고 한다. 역사가 되어버린 전쟁의 흔적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치열했을, 오로지 가족과 나라를 위해 희생을 감수하신 많은 분들을 생각하면 이렇게 한가로움을 누려도 되는 것인지 죄송한 마음이 든다. 피와 땀으로 우리의 '오늘'을 지켜주신 앞선 시대의 어머니, 아버지들을 위해 진심 어린 감사의 인사를 올리며 시장 안으로 들어간다.


어머니가 자주 들르시던 생선 가게가 나왔다. 할머니께서 혼자 운영하시던 그 곳은 시장 내 유일한 생선가게였다. 어머니가 "동태 있어요?"라고 물어보면 "두 마리 만원"이라며 간결하게 대답하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오랜만에 들른 생선가게는 비어있었다. 좁은 평수에 야외 까지 길게 늘어서 있었던 생선들은 '임대문의'라는 짤막한 편지만 남긴 채 사라졌다.

그들의 수장이었던 할머니께서는 어디로 가신갈까. 부디 건강하게 지내셨으면 좋겠다.


좋아하던 떡볶이 집이 나왔다. 맛은 그다지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떡볶이에 들어가는 고추장처럼 추억이 듬뿍 담긴 곳이기에 매 번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떡볶이를 구입하거나, 떡볶이 만드는 사장님의 모습을 한참 바라다본다. 으레 그렇듯 나는 사장님을 기억하지만, 사장님은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


큰 동네는 아니지만, 여러 사람이 모여 사는 곳이기에 익히 들어 본 떡볶이 가맹점들이 하나 둘 들어섰다. 사람들의 발길은 새로운, 유명한 가게로 향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 또한 그 대열에 동참했었다. 제법 주름이 잡힌 얼굴의 사장님이 보인다.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종종 들르고 있다고, 잘 먹고 있다고 인사라도 건네볼까 싶다가 이내 지나친다. 비록 손님은 줄었지만, 오늘도 떡볶이와 함께 추억을 팔고 계신 사장님께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


사람들의 관심이 끊기는 곳은 서서히 잊혀간다. 기억 틈에서, 추억 틈에서. 내가 이따금씩 동네를 배회하는 건, 어쩌면 지금의 나일 수 있게 도와주었던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감사의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한 움큼씩 더 담아주었던 시장의 인심과, 그곳을 뛰어놀았던 친구들과의 우정, 변함없는 사랑으로 지켜봐 주는 이웃에 대한.


낡아버린 그곳에 가면, 아버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는 나의 역사가 있다. 어느덧 30년째 역사공부를 한 나는 누구 못지않게 빠삭하다고 자부할 수 있다. 저기 정육점이 위치했던 곳은 원래 문방구였고, 대형교회가 들어선 저곳은 원래 고깃집이라는 사실을 최근 이사 온 사람들은 알지 못할 것이다. 새로운 가게가 들어섰다고 해서 이전의 가게가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닌가 보다. 떠올리는 누군가에 의해 다시 예전 모습 그대로 지어지는 걸 보니.


언젠가, 좋아하는 사람이 놀러 온다면 소개하고 싶다. 정겨운 우리 동네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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