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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근거림 Aug 06. 2017

파도소리가 듣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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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소리가 듣고 싶다는 말을 자주 꺼내던 시기가 있었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나에게 말했다. 


바다에 갔다 오면 되지 


그러게 말이다. 갔다 와야지 하고 마음먹은 게 벌써 일 년 전이다. 이제 와서 왜 갔다 오지 않았냐고 물어보아도 적당한 핑곗거리가 생각나지 않는다. 밀물 뒤에 썰물 오듯 지냈던 것 같다.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닥치면 언젠가는 괜찮아지겠지, 나아지겠지 하며. 그렇게 지나갔다. 긴 하루가 모여 짧은 한 달이 되고, 짧은 한 달이 모여 나의 일 년이.


교통편이 다양해져 언제라도 바다에 갈 수 있다. 숙박하지 않아도 하루, 아니 반나절만 시간을 내면 다녀올 수 있다. 그럼에도, 간절히 바랐으면서도 어떠한 바다가 좋은지, 어떠한 교통편을 이용하고 싶은지 찾아본 적 없다. 왜 그랬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떠오르는 이유는 오직 '일'이다. 내향적인 성격을 지닌 나에게 휴식이란 고스란히 독백할 수 있는 시간이다. 업무와 사람에 치여 평일을 보내고 나면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집에서 쉬어야지'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어느 바다에 갈지 찾아보는 것도 귀찮고, 몇 시간씩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도 썩 내키지 않았다. 바다로 가서 파도소리를 듣는다고 하여 무엇이 달라질까. 고작 파도소리를 듣기 위해 하루라는 시간을 온전히 쓰는 게 어린아이의 치기 어린 행동 같기만 했다. 그러나 1년이 지난 오늘, 파도소리가 듣고 싶다던 내 말의 의미를 알 것만 같다. 아무도 나를 찾지 못하는 곳으로 가 독백하고 싶다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지난 1년은 나에게 고통이었다. 퇴사를 결심하였으나 그만두지 않았고, 퇴사를 결심하게 된 계기가 그대로 남아있는 직장에 다녔다. 상사의 고성은 나의 생각을 마비시키고 '죄송합니다'를 반복케 했다.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않았던 상사의 원칙은 나를 예민하게 만들었고, 동료와 말을 섞는 행동이 상사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을까 싶어 침묵했다. 게다가 사람을 상대하는 업무는 여러모로 어려웠다. 눈과 입이 고정된 채 농담을 건네는 모습은 섬뜩했고,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다가도 서로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 상황이 생기면 냉정하게 돌변했다.   


이러한 내 상황을 연로한 부모님에게 털어놓기에는 대안 없이 우울했고 친구들은 저마다의 일로 바빠 선뜻 말하지 못했다. 쌓여가던 감정이 한계에 다다를 때면 나는 파도소리를 떠올렸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파도소리가 듣고 싶다고 구조요청을 보냈던 것 같다. 나 이렇게 괴로우니 봐달라고, 나의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직장인으로 지낸지도 벌써 4년이다. 보잘것없다 느껴지는 이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통을 인내해야 되는지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힘들다'라는 말은 꺼낸 사람, 들은 사람 모두에게 위안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힘들다' 표현하지 않는 사람들이 괜찮은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고충을 가지고 살아간다. 다만 드러내는가, 드러내지 않는가의 차이일 뿐이다.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생각에 마음이 울적해진다. 함께 위로하고 싶다. 요즈음 사람들은 어떠한 고충을 가진 채 살아가고 있을까. 친한 친구에서부터 지금 내 옆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까지. 알고 싶지만, 궁금하지만 오늘은 나에게 먼저 묻고 싶다.  


너는 정말 안녕하니


장마가 이어지던 하늘이 맑게 개었고, 풍랑이 일던 바다는 잠잠해졌다. 해변의 모래들은 원래의 빛깔을 찾았고 나직한 바람이 불어와 나를 감싼다. 그래. 파도의 끝이 발등을 적시는 곳까지 나아가 마음이 들려주는 소리를 듣고 싶다. 꺼내지 못했던, 꺼낼 수 없었던 오직 나를 위한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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