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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근거림 Aug 13. 2017

여름밤, 다가오는 휴가를 생각하며

더운 여름이 이어지고 있다. 계절의 경계가 모호해진 요즈음에는, 입추나 말복이 되었다는 뉴스에도 가을을 떠올리기 어렵다. 우리는 계절의 변화를 몸으로 먼저 느낀다. 여름이었는데 추워지면 '가을이 오는구나' 싶고, 그보다 더 추워지면 '겨울이 오는구나' 싶다. 밤 산책을 나온 오늘, 온몸에서 땀샘의 개장 소식을 알리는 걸 보니 아직 여름이구나 싶다.


나는 여름을 좋아한다. 단순히 추위를 잘 타는 편이기 때문이다. 영하의 기온으로 내려가지 않은 날에도 남들보다 옷을 두텁게 입었으면서, 덜덜 떨고 있는 나를 느낄 때면 군대는 어떻게 다녀왔는지 싶다. 추운 날 야간훈련이나 보초를 설 때면, 우습게도 빨리 막사로 복귀하여 컵라면을 먹으며 추위를 녹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전역을 하면 모진 추위 속에서 고생하는 일이 덜 할 텐데, 그때는 뭐가 그리 단순했던지.


여름은 피서의 계절이다. 너나 할 것 없이 앞다투어 휴가를 다녀오고 더위로 지친 심신을 달랜다. 전국의 사람들이 특정지역으로 몰리는 휴가철은 때때로 장관을 이룬다. 뉴스에서 보도하는 '여름휴가'는 언제나 북적북적한 사람들로 가려진 바다 장면으로 시작한다. 거기에 더해 사람들로 빽빽하던 출근길 버스가 며칠 동안이나 여유 공간을 확보한 채 오는 걸 보니 지금은 여름, 휴가철이구나.


휴가를 떠났던 사람들이 돌아와 다시 출근길 버스가 만원이 될 즈음에 나는 휴가를 떠나기로 했다. 올해 또한 변함없이 제주도에 간다. 해외라고는 고작 일본을 갔던 게 다이지만, 여름이면 나는 제주도를 먼저 생각한다. 처음으로 제주도 여행을 떠난 건 24살 때이다. 누구는 수학여행으로, 누구는 가족여행으로 일찍이 제주도에 방문하지만 나는 군대를 전역하고 24살이 되어서야 제주도에 첫 발을 들였다.



누나와 매형과 함께 갔던 제주도는 그리 흥미로운 곳이 아니었다. 여행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던 나는, 누나와 매형이 제주도에 가자는 말에 흔쾌히 동의했을 뿐, 여행 일정에 내 의견을 조금도 말하지 않았다. 당시의 내가 여행에 관심이 없었던지라 누나와 매형의 사전조사를 통해 가는 곳은 당연히 좋은 곳이라는 인식이 컸다.


두 번째는 직장에서의 직원 연수로 제주도를 찾았다. 여행사를 섭외하여 갔던 이번 여행은 '쉼' 보다는 '관광'의 개념이 컸다. 제주도 곳곳에 있는 다양한 관광지를 찾아다니고, 맛집을 찾아 방문하고, 저녁이면 회식을 해야 했던 여느 연수와 다르지 않았다. 여행 첫날 동료들이 주던 한라산에 취해, 남은 일정을 무시한 채 잠이 들었던 일이 애석하게도 여행 중 가장 기억에 남는다.  


제주도를 사랑하게 된 것은 세 번째 여행으로 다녀온 후이다. 직장에서 퇴사하고 얼마 지나지 않을 무렵, 힘들어하던 직장생활을 끝내고 다시 취업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방황하고 있었다. 간절했던 나만의 시간은 넋두리로 채워졌고,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 자각할 때면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걱정에 걱정을 거듭하다 결국에는 전 직장에 여전히 다니고 있는 동료들이 부러웠고, 나는 이대로 추락하는 것만 같았다. 심연 속 어두운 곳으로, 스스로를 끌어당기며.


이대로 사람들에게 잊히는 건 아닌가 싶어, 나를 찾기 위해 떠났던 2015년 여름의 제주도 여행은 단순하게 결정되었다. '걷는 사람'이라는 직업을 갖고 싶다는 나의 농담에 누나가 제주도에 올레길이라는 산책로가 있고, 걷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이 배낭을 메고 올레길 여행을 떠난다고 했다. 그 말에 혹 하여 4박 5일이라는, 올레길 여행 치고는 긴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올레길 6번 코스부터 9번 코스까지 걸었던 여행에서, 나는 버스를 한 두 번 이용한 것을 제외하고 걸어서 이동했다. 숙소는 각 코스의 끝에 예약하였고 하루에 한 코스씩 걸었다. 코스마다 길이가 달라 어느 날은 부지런히 걸어야 했고, 어느 날은 바다를 바라보며 사색에 잠기기도 했다. 다만, 낯선 사람들에게 말을 거는 게 쑥스러워 대부분 혼자 다녔다. 올레길 7번 코스 시작부터 봤던 사람을 끝나는 지점에서, 또 숙소에서 우연히 만나 함께 저녁 먹은 걸 제외하고는.


생각난다. 바다를 보며 울었고, 밤하늘의 별빛을 보며 다시 울었다. 제주도에서의 나는 혼자였고, 혼자가 된 나는 마음껏 나에 대해 터 놓을 수 있었다. 타인의 입장에서 이해하려는 나의 성향 때문에, 나의 생각이 틀린 건 아닌지 한 번씩 의심하던 그 습관조차 내던진 채 나를 바라보았다. 흐르는 바다에서, 빛나는 별에서.


그렇게 여행을 다녀온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취업에 성공하였고, 그 결과가 현재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는 뒤로한 채, 나름대로 건강한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 그리고, 힘이 들 때면 그 날의 기억을 떠올린다. 고요가 물들인 세상에서 목청껏 나를 소리쳤던 그 날의 기억을.



또 한 번의 제주도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 다수가 일상으로 복귀한 8월 말 즈음이면 일상에서 나의 빈자리를 찾기 어려울 것이기에, 원래 없었던 사람처럼, 영원히 사라질 사람처럼 떠나고 싶다.


나는 그 날, 2015년의 여름과 돌아올 2017 여름을 생각하며 미소 짓는다. 고작 하천 옆을 걷는 게 현실이지만, 여행을 다녀온 것처럼 나의 마음은 벅차오른다. 서둘러 떠나고 싶지만, 서둘러 떠나게 되면 여행 또한 끝나게 되니 미루고 싶기도 하다. 뭐 아무렴 어때. 상상만으로도 좋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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