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은, 작은 규모의 출판사를 운영하는 작은 엄마가 이사 간 곳에서 짐을 정리하는 날이었다. 큰 책상을 배치하고 컴퓨터를 연결하는 고된 작업이 기다리고 있다며, 나에게 하루만 도와줄 수 있는지 연락을 주셨다.
당시의 나는 백수였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어느 곳에도 취업하지 못한. 평생 학생으로 살아갈 줄 알았다. 졸업과 입학이 반복되는, 주어진 환경 내에서만 최선을 다하면 되는. 대학의 끝에 나를 기다리고 있는 과정은 없었다. 대학에 진학하지 않은 사람들은 더 일찍 경험했을 테다. 덜컥 사회인이 되어버린, 특별히 고민한 적 없었던 앞으로의 삶이란 숙제가 내 앞에 나타났다.
비슷한 학년의 사람들이 스펙을 쌓아갈 때, 나는 주저하는 시간을 쌓아갔다. 대학생으로서의 하루가 버거웠던 나에게, 미래의 내 모습을 생각하며 직장인으로의 시작을 준비하는 일은 어려웠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식사 대신 과제를 삼켜야 했던 지난 기억들이 떠오른다. 최선을 다한 오늘이 모여 미래의 내가 되어간다고 흔히 말하지만, 이루고 싶은 구체적인 목표 없이 흘려보냈던 그때의 내 삶은 외롭고 괴로웠다.
토익공부를 하고 영어회화 학원에 다니기도 했다. 독서실에서 과제나 예습을 하고, 몇 달간은 학업 스터디에도 참여했다. 하지만 늘어나는 실력만큼 커지는 건 '내가 왜 이 공부를 해야 되지?'라는 의문이었다.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하고 사회복지사가 되려던 나에게는, 누구나 갖기 위해 노력하는 스펙 이외에 필요한 공부가 따로 있었다. 현장에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다양성을 존중하며, 개개인이 원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협력하는 과정을 배워야 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나는 봉사활동을 하고 실습하는 시간을 늘리며 스펙 쌓는 시간을 줄였다. 내 생각이 틀리지 않기를 바라며.
도서관에서 자기소개서를 쓰고 있던, 작은엄마의 연락을 받기 보름 전 즈음의 날이었다. 머리를 식히기 위해 들어갔던 구직사이트에 모 기업에서 채용설명회를 한다는 글이 보였다. 내용을 살펴보며 설명회 날짜를 확인하니 바로 다음 날이었다. '제발'하는 마음으로 전화를 걸어 문의하니 신청이 가능하다고 했다. 모의 면접이 진행되니 준비해 오라는 말도 덧붙였다. 이미 채용된 것 같은 기분에 자기소개서를 닫고 홈페이지 구석구석을 누르며 기업의 특징을 찾아보았다. 그 중 직원 사진첩이 유독 눈에 띄었다. 밝은 선배들 사진에 내 모습이 들어가 있는 걸 상상하며, 하루를 보냈다.
채용설명회를 마치고 이력서를 제출했다. 들어가고 싶은 마음보다는 하나의 과정처럼 생각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마주한 내일이 정해지지 않은 삶은 두려웠다. 도서관은 매일 오고 있는데 '취업이 안 되면 어쩌지'하는 생각에 압박을 느끼고 있었다. 걱정은 커질수록 새로운 걱정들을 만들어냈다. 부모님의 기대, 친구들의 취업소식, 줄어드는 기업의 채용 등은 자기소개서를 쓰던 나의 손을 자주 멈추게 했다.
취업이 간절해지던 찰나에 채용설명회에서 본 기업의 이미지가 나쁘지 않았고, 이 곳에 지원하지 않는다 해서 딱히 가고 싶은 곳도, 갈 곳도 없었다. 며칠 뒤, 1차 합격자 명단에 있는 내 이름을 확인하고 면접 준비를 했다. 흔히 생각하는 관리자 면접 이외에 발표면접을 준비해야 된다고, 전화로 문의한 나에게 인사 담당자는 이야기했다. 한 가지 주제를 정해서 4분 이내에 다른 지원자와 기업의 직원들 앞에서 발표해야 하는, 3일 정도의 여유가 있었던 그때의 나는 고민했다. ppt를 만들기에 앞서 내가 왜 사회복지사가 되려 하는지 확신이 필요했다.
학부생으로 보낸 4년, 그 안에서 봉사활동과 실습을 통해 만났던 여러 사람들, 그 사람들과 함께하며 느꼈던 생각들을 모아두었던 사진을 보며 정리하기로 했다. 사진에는 당시의 내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었는데, 나는 대체로 웃고 있었다. 힘들다며, 봉사활동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 자주 졸곤 했었는데. 사진에 찍힌,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 또한 즐거워 보인다. '맞아, 저런 때도 있었지'. '사진 속 저 아이는 몇 살이 되었을까?', '몸이 아팠던 아이인데 잘 지내고 있을까?' 하는 혼잣말이 입주변을 맴돌았다. 졸업하고 입학하는, 주어진 환경 내에서 살아간다 여겨지던 나에게 문득 되고 싶다는,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면접을 준비하던 그 기업과 함께.
긴장되지 않았다. 친구와 대화하듯 준비한 발표를 마쳤다. 관리자 면접에서도 여러 질문들에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희한했다. 간절한 마음에 떨릴 법도 한데, 차분하고 여유로웠던 나는 6시간의 면접을 무사히 마치고 집으로 향했다.
오후 2시, 책상을 옮기다가 들어간 기업 홈페이지에 최종 합격자 공고가 올라왔다. 심장이 뛰는 걸 느끼며 누른 그곳에 내 이름이 있었다. 작은 엄마와 손을 마주 잡고 흔들며 합격의 기쁨을 나누었다.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의 의무교육을 마치고 성적과 담임선생님의 조언으로 들어간 대학교를 졸업했던, 나에게 처음으로 스스로 결정한 되고 싶은 직업, 하고 싶은 일이었다.
짐 정리를 마치고 돌아가던 그 길에 하늘을 보며 다짐했다. 나를 뽑아준 기업이 후회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거라고. 그리고 '만들어가야지, 나만의 꿈을'이라고 나직이 속삭였다.
2013.02.14
첫 직장에서 여러 괴로운 일들을 겪었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그만큼 좋은 일도 많이 겪었기 때문이다. 부푼 꿈을 안고 입사한 그곳. 그만둔 지 3년이 되어가지만 여전히 꿈에 나올 정도로 생생하다. 팀에 배정되던 날, 첫 회식을 하던 날, 입사 턱을 쏘던 날, 크게 실수했던 날, 높은 실적을 냈던 날 같은 기억들은 여름을 준비하는 벚꽃나무처럼 나를 쓸쓸하게 만든다.
특히 함께했던 동료들이 자주 생각난다. 일처리가 느렸던 내가 2년이 넘는 기간 동안 잘 다닐 수 있었던 이유는 동료의 존재 덕분이다. 협업해야 하는 구조였기 때문에 한 명이 일을 잘 한다고 해서 팀이 돋보이지 않았고, 한 명이 일을 못한다고 해서 팀이 떨어져 보이지 않았다.
서로가 한 번씩 당겨주거나 받아야 하는, 그곳에서 나는 참 좋은 사람들을 만났다. 만약, 그때의 동료들이 변하지 않은 모습으로 내 곁에 있다면 어떨까. 가끔은 보고 싶을 때가 있다.
하나씩, 또 다음 이야기들을 써 내려가야지.
2018.0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