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나아갑니다

다소 우울할 수 있어요..!

by 두근거림

의식을 잃고 싶었습니다. 기어코 한 잔 더 마신 맥주에 두 눈이 감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기대는 고개를 들고 음미하는 콧바람과 같습니다. 현실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신경이 쇠약한 편인가 봅니다. 콧바람을 쐬려다가도 마음과는 다른 일이 생기면 곧잘 고개를 수그립니다. 웅덩이에 떨어지는 낙엽이 파장을 일으키듯, 바람결에 날아오는 먼지 같은 작고 그럴싸한 일에도 저는 온몸을 떨어댑니다.


매 분, 매 초가 전투를 준비하는 병사와 같습니다.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고, 방패를 쥐고, 칼을 들며 적의 공격에 대비합니다. 발가락에 잔뜩 힘을 주며 나아가는 저의 앞에는 언제나 복병이 나타납니다. 위험을 극복하기 위해 쌓아 왔던 훈련을 비웃듯, 복병은 예리한 공격을 가해옵니다. 방패가 날아가고 칼이 부서지는 상황에 그나마 남아있던 전의마저 사라집니다. 두려움이 채워집니다.


갑옷으로 전해지는 충격 앞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공격이 끝나기만을 다만 기다리는 것입니다. 흉포하고 집요한 그의 얼굴을 쳐다보고 싶지 않지만, 좀처럼 두 눈이 감아지질 않습니다. 다리가 베이고, 손끝이 잘려 선혈이 낭자하는 시간마저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선의가 선의로서 돌아왔으면 좋겠습니다. 악의에 악의가 따라가는 것까지 뭐라 할 수는 없습니다만, 적어도 선의가 무참히 짓밟히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선한 마음에 불순한 의도를 품고 이용하려 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개인의 안위만 살피는 사람들이 득세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타인을 해하면서 얻는 이득이 안녕을 보장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바라는 것이 많은 걸까요. 저답게 살아가고 싶습니다. 여리게, 베풀며, 나누고, 협력하며, 때로는 손해를 볼 지라도 함께 지내고 싶습니다.


사람들이 호시탐탐 허점을 노리는 것만 같습니다. 이리저리 피하기 위해 궁리를 해 보아도, 그들의 눈 밖으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저는 저이지만, 제가 아니기도 합니다. 삶이란 악의로 가득 찬 사람들이 설계해 놓은 함정에 점차 들어가는 과정인 것 같습니다. 의도하는 대로 움직이는 누군가의 꼭두각시가 된 기분입니다.


시간이 흘러갑니다. 사람들은 앞을 향해 나아갑니다. 바람에 등을 맡긴 채 걸어갑니다. 제 등에는 바람이 불어오지 않는 까닭에,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다만 서 있을 뿐입니다. 옴짝달싹 않고 떠들썩한 사람들 틈에서 바라볼 뿐입니다.


혼자 남겨진 기분이 듭니다. 소리를 내어 보려고 하나, 입을 크게 벌릴수록 응어리진 말들이 세게 꼬여갑니다. 눈물을 흘려 보려고 하나, 무엇을 위해 울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울음의 이유가 심경의 치유라고 하기에는 어폐가 있습니다. 변하는 게 없기 때문입니다. 상황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눈물은 일시적으로 감정을 해소해주지만, 상황을 바꾸지는 못합니다. 오히려 채찍처럼 날렵한 눈들이 띄어, 허점을 잡힐지도 모를 일입니다. 침묵하는 것이, 눈물을 머금는 것이 제가 다만 할 수 있는 일인가 봅니다.


moon-2762111.jpg 출처: Pixabay로부터 입수된 Patricia Alexandre님의 이미지 입니다.


밤이 되어 갑니다. 가로등에 불빛이 하나 둘 켜집니다. 멀찍이 떨어진, 어둡고 음습한 거리로 들어섭니다. 익숙한 느낌에서 안도감을 얻습니다. 이곳이 제가 살아가는 길인가 봅니다. 표정을 감추고, 입을 다물고, 곁을 지나가는 아무에게도 관심을 갖지 않는, 이 길 말입니다.


아침이 밝아올 것입니다. 억센 물살이 흐르는 수중에 잠수를 하는 기분으로 저는 살아가겠지요. 발버둥 치며 어둠이 찾아오기만을 기다리겠지요.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습니다만, 저는 나아갑니다. 나아갑니다. 밤이 올 때까지, 다만 나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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