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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근거림 Nov 29. 2015

[13] 상처 주는 말, 상처받는 맘

사람은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는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왜 판단하는 걸까?


또박또박 대들고 싶다. 들은 말, 몇 배로 더해 돌려주고 싶다. 그러나 사람이나 상황 앞에 한 없이 작아지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변명은 침묵이다. 분명 국어사전에는 각 단어의 뜻이 정확하게 명시되어 있지만, 말로써 전해지는 순간부터 그 의미는 다양하게 변한다. 그 변화는 말하는 사람, 듣는 사람 모두에게 해당된다.


'오늘 입은 빨간색 옷이 잘 어울리네요'와 유사한 말을 들어 본 적이 있다. 만약 상대방이 평소 돌려 말하는 것을 즐겨한다면 이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정말 잘 어울리다는 건지, 안 어울리는데 돌려 말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지나가는 소리인지.  흘려들을 법도 한데 예민한 내 귀는 많은 가능성을 품는다.


말하는 사람, 듣는 사람은 정해져 있는 게 아니다. 때론 역할을 바꾸기도 한다.


오해를 줄이기 위해서는 말하고 듣는 서로를 온전히 이해해야 한다.  다소 투박한 표현을 자주 쓰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하자. 지역마다 나름의 특색이 있고,  살아온 환경 또한 모두 다르기 때문에 선입견 없이 받아들이는 데는 어려움이 있다. 만약 자신이 온화한 표현을 자주 사용하는 사람이라면 때로는 투박한 표현이 상처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자. 온화한 표현을 사용하는 사람도 투박한 표현을 하는 사람에게 때로는 상처를 줄 수 있지 않을까?  


꼭 상사에게만 상처받는 건 아니다. 다양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조직 내에선 때론 후배들에게 상처를 받기도 한다. 말에는 직급이 없기 때문에. 모두가 잘 알다시피 한 번  내뱉은 말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다. 우스갯소리로 귀가 두개고 입이 하나인 이유에 대해 나는 더 많이 말하라는 답을 하기도 했었다.

우리 한 번 생각해보자. 한 마디 말이 내 입에서 나오면 처음엔 2개의 귀가 담고, 또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었을 땐 4개의 귀가 담게 된다. 내가 1이란 사실을 전달했다면, 그 사실은 늘어나는 귀의 양 만큼이나 본래의 의미를 잊는다.

  

물론 뜨끔할 때도 있다. 말을 하고 난 직후에 '아, 내가 말을 잘못 했구나'하고  알아차린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조직 내에 그 수가 얼마나 있을까? '나는 지금 당신의 말에  상처받았어요. 사과하세요'라고 당당히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이.


사람은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다.


먼저, 상대방을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해보자.  무엇을 인생의 소중한 가치로 여기며 살아가는지. 말이나 표정 행동으로 추측하지 말고, 생각을 들어보자. 그리고 나를 떠올려보자. 나는 무엇을 인생의 소중한 가치로 여기는지. 또, 그 가치들이 상대방에게 어떻게  전달되어지고 있는지. 혹은, 내가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고 있는 건 아닐지.  


노력한 후에, 진심을 다해 노력한 후에도 받아들일 수 없다면 포기하는 게 좋겠다. 굳이 나를 저버리면서까지, 숱한 스트레스를 품어가며 이해할 필요가 있을까? 차라리 '원래 그런 사람이지',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하며 상대하지 말자. 그러기엔 내가 너무 아깝다.


그럼에도 상처를 주는 사람과 꼭 일해야만 하는 상황이라면, 감정이  가라앉은 상태에서 말을 꺼내보는 것도 한 가지 좋은 방법이다. 참았던 화가 계속 쌓이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곤 한다. 나 또한 경험해 보았다. 처음엔 단순히 감정이 상하는 정도였고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졌다. 그런데 어느  날부턴 그 사람과 같은 공간에 있는 것도, 얼굴을 쳐다보기도 힘든 그 상황.  


사람은 상처를 주고, 또 받는다. 나는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또 받는다. 그 연장선상에 서서, 내가 상 준 사람은 깨끗이 잊고 나에게 상처 준 사람만 증오하는 건 아닐지. 생각해 볼 일이다.


나는 단  하나뿐인 존재다. 그건 상대방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나로써 존중받길 원하는 것처럼, 상대방도 같은 마음임을 잊지 말자.


꼭, 돌아보길 바란다. 일부러 상대방에게 상처 주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아직 그렇게 믿고 싶다. 평소 나는 어떤 사람인가?  말할 땐 어떤 사람이며, 들을 땐 어떤 사람인가?


만약, 부서에 퇴사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왜 퇴사를 결심했는지 진심 어린 마음으로 기울여보길 바란다. 답은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무심코 던진 당신의 말 한 마디라는 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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